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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을 주는 소녀 2~3 세트 - 전2권 ㅣ 영생을 주는 소녀
김민석 지음, 안정혜 그림 / IVP / 2024년 11월
평점 :
구원하는 공감
김민석 글, 안정혜 그림, ‘영생을 주는 소녀’를 읽고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책. 텍스트가 미처 전달하지 못하는 여백을 그림으로 충만하게 채우는 책. 세 권으로 구성된 ‘영생을 주는 소녀’는 만화책이다. 두 시간 만에 세 권을 내리읽었다. 나도 모르게 몰입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만화책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이 작품의 키워드는 폭력과 기독교라고 할 수 있겠다. 작품 속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폭력은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성폭력이다. 에붐의 대표 이도연은 스스로가 성폭력의 피해자다. 가해자는 윤민후 목사, 윤다라의 아버지다. 주인공 윤다라는 아버지가 강단 앞에서는 훌륭한 목사이지만 강단 뒤에서는 어머니를 때리고 여러 여성 교인들을 성추행 및 성폭력 대상자로 삼는 모순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을 어릴 적부터 보고 자란 간접 피해자이자, 아버지의 철저한 영향 아래 어린 시절을 보낸 가부장적 권위주의의 직접 피해자다. 이도연과 대립 각을 세웠으나 결말에 가서 무너진 윤다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게 되는 장지오 목사 역시 장환의 딸로서 처음엔 몰랐으나 나중에 아버지가 다양한 방식으로 폭력자에 자리를 꿰차고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윤다라와 장지오는 모두 아버지의 그늘 아래 눌려 순응적인 삶을 강요받았던 피해자였던 것이다. 우리나라 많은 여성들을 대표하는 인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윤민후와 장환, 이 두 사람은 모두 1세대 아버지, 목사, 회장 자리에 앉아 부와 권력을 거머쥔 가부장적 폭력자의 전형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소설의 구도만 봐도 이 작품이 얼마나 현실적인지, 특히 성폭력으로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오점을 기록한 한국 교회의 단면을 얼마나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한국인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수치심이었다. 부끄럽고 또 부끄러웠다.
다행히 ‘영생을 주는 소녀’는 이런 타락한 한국 교회의 단면을 고발하는 데에 멈추지 않는다. 또한 가증스러울 정도로 파렴치한 폭력자들을 효과적으로 처벌하는, 말하자면 폭력을 더 큰 폭력으로 갚고 다스리는 방식으로 귀결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월터 윙크가 말한, 이른바 '구원하는 폭력'이라는 신화에 매몰될 뿐이다. 대신 이 작품 속에서는 직간접적인 폭력의 피해자로 등장한 윤다라, 이도연, 장지오, 이 여성 트리오가 주축이 되어 이야기를 펼쳐 나가는데,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내재된 폭력성을 해결하기 위해 타자를 공감하고 이해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이는 기독교에서 황금률로 알려진 예수의 말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눅 6:31)"의 가시적인 성취로도 보인다. 폭력의 희생자가 가해자를 향해 복수가 아닌 용서를 택하고,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며, 잠재적 폭력의 가해자가 잠재적 희생자의 마음을 공감하여 잠재적 폭력을 예방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공상과학적 장치 '토브'의 메커니즘이 바로 '공감'이기 때문이다. '토브'는 히브리어로 '좋았더라'의 의미를 가지며 성경의 창조기사에 등장한다. 그리고 이도연이 개발한 프로토 타입을 윤다라가 개량하여 작품 속에서 폭력에 저항하고 해결하는 키로 작동한다. 즉, 이 작품의 시작은 폭력이었으나 끝은 공감을 통한 폭력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나아간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작품의 시작이 폭력이고 끝이 공감이라면 중간과정은 어떠한가? 세 권으로 구성된 이 장편 만화는 기본적으로 공상과학을 기반으로 하지만 폭력, 살인, 강간, 배신, 복수가 넘실대기 때문에 스릴러 소설로도 충분히 읽힐 수 있겠다 싶다. 가 주요 테마로 등장하는 스릴러 혹은 범죄소설로도 읽힐 수 있다. 그러니 이 책이 페이지 터너가 아닐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형식은 비단 흥미를 유발하는 목적으로만 쓰이지 않는다. 윤민후나 장환이라는 개별적인 악에 머무르지 않고 이 책은 인간의 보편적인 어두운 구석을 비추고 드러낸다. 특히 폭력성이 원래 인간에게 내재된 것인가, 아니면 어느 특정한 시기에 후천적으로 얻게 된 것인가, 하는 폭력의 탄생에 대한 질문은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일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지탱하는 두 개의 거대한 축은 정의와 공의다. 느헤미야의 김근주 교수는 여호와의 공의를 공감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공감할 줄 아는 능력을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한 손길 혹은 흔적이라고 믿는 나는 바로 이 능력이야말로 우리 인간이 유전자나 환경 혹은 본능에 충실하게 살 때 비롯되는 ‘인간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인간만이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인간다운‘ 모습을 추구하고 구현하기 위한 정석이자 좁은 길이라 믿는다. 또한 이 공감이라는 소중한 힘은 이 책에서도 소개되듯, 마치 아이가 부모에게 바라는 보상 심리처럼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목적으로 행하는 선한 행위의 한계를 초월하여 마침내 이웃을 사랑하는 바른 길이 되리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토브'라는 공상과학적인 도구가 아닌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바로 읽고 해석해 낼 때 나는 그 힘이 충분히 발현되고도 남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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