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기도 믿음의 글들 245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홍종락 옮김 / 홍성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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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기도에 관한 루이스의 생각

C. S. 루이스 저, ‘개인 기도’를 읽고

공동 기도가 아닌 개인 기도에 관한, 신학자나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의 입장에서 바라본 여러 의문점들과 그에 대한 루이스의 견해 혹은 믿음이 잘 담겨 있는 책이다. 자칫 가르치려 드는 자의 강압적인 뉘앙스를 피하기 위해 루이스는 말콤이라는 가상 인물을 설정하고 그에게 편지로 답을 하는 방식을 취한 듯하다. ‘루이스가 메리에게’에서도 비슷한 형식을 볼 수 있지만, 말콤은 메리보다는 신학 혹은 신앙적인 지식과 경험이 많은 친구로 설정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루이스의 답장은 기독교의 교리나 문화 혹은 세계관에 대한 기초적인 설명보다는 좀 더 세분화되고 전문적이라 할 수 있는 깊이까지 나아간다. 이 책의 장점은 평신도 입장에서 개인 기도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는 점이지만, 이것은 또한 이 책의 한계를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책에 적힌 루이스의 대답이나 설명이 기독교의 공통된 입장이라기보다는 신학과 철학과 문학에 능통한 한 평신도의 입장이라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될 것 같다. 그리고 그가 속한 기독교는 영국 성공회라는 점도 잊으면 안 된다. 특히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연옥의 존재에 대한 믿음, 천국의 모습이나 기도의 능력에 대한 세세한 설명은 루이스가 편하게 쓴 개인적인 의견 정도로 보는 관점이 필요할 것 같다. 이것이 루이스가 의도적으로 말콤이라는 가상 인물을 통해 서간체 형식을 빌려 이 책을 쓴 이유일 것이다. 

루이스의 신학에 문제가 있다는 둥, 루이스의 책을 읽으면 혼란이 온다는 둥의 의견을 여러 사람들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정통 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평신도가 마음껏 상상하고 의견을 내놓는 모습이 나에겐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고 묻지 않고 자기 의견을 피력하지 않는 익명성의 비겁한 무리보다는 훌륭하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나는 언제나 그랬듯 루이스에게 감사한 마음이 크다. 루이스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당대와 후대 기독교인에게 남긴 건 실보다는 득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 같다는 게 내 지론이다.

이 책에선 개인 기도 중에서도 청원 기도에 대한 얘기가 대부분을 이룬다. 전지하신 하나님에게 우리는 왜 청원 기도를 드려야 하는지부터 시작해서 성만찬이나 몸의 부활 등의 성경적 지식과 교리에 이르기까지 루이스의 해박하고 일리 있는 친절한 설명을 편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 밑줄 그으며 묵상할 만한 문장들도 많았다. 네 문장만 여기에 옮겨본다.

“균형 잡힌 마음상태는 기도로 구해야 할 축복 중 하나이지 기도할 때 입어야 하는 멋진 의상이 아니라네.”
루이스가 무심히 던진 이 문장을 읽고 나는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아마도 자주 기도를 미루거나 하지 않아도 될 이유를 찾는 나의 모습이 드러난 것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작은 일들로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위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체면 때문일 듯싶네.”
이 문장 역시 읽고 나는 부끄러웠다. 기도를 어떤 어렵고 구별된 의식만으로 배웠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나와 기도 사이의 거리에 대해서도 재고해 볼 수 있었다.

“신비주의를 향한 나의 욕구는 물욕과는 전혀 상관없지만 사도 바울의 판단으로 보자면 ‘영’이 아니라 ‘육체’에 해당하네. 영적인 것에 대해서도 충동적이고 고집스럽고 탐욕스러운 욕구가 있을 수 있는 거야.”
기독교는 신비하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위험하다. 나는 루이스처럼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면이 기독교의 중요한 부분이라 믿는다. 

“청원기도에 대해 너무 많이 쓴 것 같기도 해. 하지만 후회하지 않네. 그것이 올바른 출발점이거든. 모든 문제의 근원이기도 하고. 나는 청원기도의 문을 지나지 않고서 더 높은 형태의 기도를 하거나 그런 기도를 논하려 드는 사람은 믿을 수 없네. 청원기도를 하지 않거나 경멸하는 것은 탁월한 거룩함의 표시가 아니라 믿음이 부족하여 낮은 수준에서 만족한다는 표시일 수 있다고 보네.”
나는 이 문장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 솔직하게 나를 열고 어린아이처럼 간구하는 데에 게으르지 말자고 다짐했다. 균형은 반드시 이런 과정을 거쳐야 얻을 수 있는 그 무엇일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모든 신앙인에게 권하고 싶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도 좋아할 것이다. 

* 루이스 읽기
1. 예기치 않은 기쁨: https://rtmodel.tistory.com/682
2. 고통의 문제: https://rtmodel.tistory.com/695
3. 헤아려 본 슬픔: https://rtmodel.tistory.com/699
4.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https://rtmodel.tistory.com/822
5. 천국과 지옥의 이혼: https://rtmodel.tistory.com/852
6. 순전한 기독교: https://rtmodel.tistory.com/911
7. 시편 사색: https://rtmodel.tistory.com/942
8. 순례자의 귀향: https://rtmodel.tistory.com/1164
9. 순전한 그리스도인 (by 김진혁): https://rtmodel.tistory.com/1176
10. 세상의 마지막 밤: https://rtmodel.tistory.com/1629
11. 침묵의 행성 밖에서: https://rtmodel.tistory.com/1633      
12. 루이스가 메리에게: https://rtmodel.tistory.com/1635
13. 페렐란드라: https://rtmodel.tistory.com/1637   
14. 개인기도: https://rtmodel.tistory.com/1653

#홍성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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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의 여행 페이지터너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원당희 옮김 / 빛소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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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틋함일지도 모르는 긴장 섞인 서먹함

슈테판 츠바이크 저, ‘과거로의 여행’을 읽고

한 남자가 프랑크푸르트 역에서 그가 부인이라 부르는 한 여자를 만나 함께 기차를 타고 하이델베르크를 향한다. 두 사람 사이엔 애틋함일지도 모르는 긴장 섞인 서먹함이 감돈다. 이 묘한 감정은 사랑, 열정, 초조, 혼란, 그리고 자제가 낳은 열매이자 이 작품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팽팽하게 유지되는 감정선이다. 약 십 년 만에 만난 두 사람은 헤어지기 직전 금지된 사랑을 막 시작했었다. 그러나 남자의 멕시코 장기출장 때문에 둘은 반강제적으로 헤어져야만 했고, 마침 유럽에서 터진 전쟁으로 말미암아 이별의 기간은 더 길어졌었다. 유일하게 둘을 이어주던 편지까지 전쟁 때문에 불가능해지면서 남자의 마음에선 점점 여자가 잊혀갔다. 남자는 멕시코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 결혼도 하고 아이도 갖는다. 세월이 흘러 전쟁이 끝나자 남자의 마음속엔 다시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 한동안 잊었던 여자에게 장문의 편지를 쓴다. 2년 뒤 남자는 업무회의차 베를린을 찾게 되고, 여자를 만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의 남편이자 남자의 보스였던 사람은 이미 죽었고 여자는 혼자였다. 둘은 과연 십 년 전 못다 한 사랑을 재개할 수 있을 것인가. 스포를 하지 않기 위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생략하기로 한다.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한 남자는 겸연쩍은 마음으로 잡은 호텔방에 간신히 부인과 함께 들어가지만 이내 답답함을 느끼고 탈출하듯 산책을 나와 회상에 잠긴다. 십 년 전 여자가 읽어주던 시가 떠올라 남자의 기억의 저장고를 열어젖혀 버렸기 때문이다. 그 시는 예언과도 같았다. 다음과 같다. “얼어붙고 눈 내린 옛 공원에서 두 그림자가 과거의 흔적을 찾고 있구나.”

막 불이 붙었지만, 장작개비 하나 태우지 못했던 금지된 사랑이 십 년이라는 기간을 통과하며 어떻게 변모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슈테판 츠바이크는 단지 그 변화 과정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순간순간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일어나는 보이지 않는 감정선에 독자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기를 원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결과보다는 과정이랄까. 둘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선 마지막 페이지에 가서도 알 수 없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열린 결말을 갖는 작품인 것이다. 그렇다고 이 작품을 미완성이라고 할 수 없는 까닭은, 독자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남자와 여자의 그 애틋하고도 서먹하고 도무지 어찌할 바 모르는 그 묘한 감정선을 함께 타며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미완성 이야기로 완성을 이룬 것이다.  

어찌 보면 삼류 연애소설 같은 냄새가 살짝 풍기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 이 작품은 너무 우아하다. 상상할 수 없는 시공간과 상황 속으로 나를 데려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게 만드는 힘. 나는 다시 한번 겸허한 마음으로 슈테판 츠바이크 앞에 서게 된다. 그의 전 작품을 읽을 이유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그는 인간의 감정을 다루는 귀재임이 틀림없다.

*슈테판 츠바이크 읽기

1. 감정의 혼란: https://rtmodel.tistory.com/1608
2. 환상의 밤: https://rtmodel.tistory.com/1615 
3.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https://rtmodel.tistory.com/1625  
4. 과거로의 여행: https://rtmodel.tistory.com/1652

#빛소굴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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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걸작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김호영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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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재된 욕망

오노레 드 발자크 저, ‘영생의 묘약‘과 ’미지의 걸작’을 읽고

단편소설을 즐기지 않는다. 급작스런 이야기 전개로 말미암아 증폭되는 주해와 해석의 간극 앞에서 나는 적잖이 당황스러워하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현대소설을 즐기지 않는 이유와도 일맥상통한다. 재치와 기발함보다는 진부할 정도로 상투적인 (뻔한) 주제와 이야기 전개를 선호하는 나는 빛바랜 상투성에서 감춰진 보석과도 같은 진리를 재발견하고 독자의 마음과 생각을 환기시키는 것이 문학이 해낼 수 있는 힘이라 믿는다. 

이런 나로서는 이 책에 담긴 두 단편을 읽긴 했으나 제대로 읽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 맥락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고, 개연성이 떨어지는, 단편소설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벌어지고야 마는 사건이 과연 무엇을 상징 (의미)하는지 나는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누군가는 나의 이런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어 할지도 모르겠다. 나완 달리 단편이 주는 그 끊김에 오히려 매력을 느끼고 즐기는 사람들도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녹색광선에서 2019년에 출판한 첫 책에 담긴 발자크의 ‘영생의 묘약’과 ‘미지의 걸작’은 모두 인간의 내재된 욕망을 다룬다. 전자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영생에 대한 욕망을, 후자는 살아 숨 쉬는 미술 작품에 대한 불가능한 욕망을 보여준다. 영생에 대한 욕망은 모든 인간이 공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살아 숨 쉬는 회화에 대한 욕망은 예술가만이 공유하는 그 무엇일 것이다. 그러나 발자크는 예술가가 아닌 그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을 만큼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을 이 작품에서 탁월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감상문에서는 한 작품씩 짧게 살펴보고자 한다. 

1. ’영생의 묘약‘
주인공 돈 후안은 호화로운 저택에서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부잣집 아들이다. 어느날 파티가 한창일 때 임종을 맞이하게 된 아버지 옆에서 돈 후안은 아버지로부터 최후의 부탁을 듣는다. 마지막 숨을 거두자마자 작은 천연 수정 병 안에 든 물로 온몸을 닦아달라는 것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돈 후안은 한참을 망설였다. 시간이 흐르고 장례를 준비하러 온 모든 사람들을 내보내고 돈 후안은 아버지의 마지막 부탁을 실행에 옮겨보기로 한다. 온몸이 아닌 눈 하나만 닦아보자고 생각했다. 시체의 오른쪽 눈꺼풀을 살짝 닦자마자 아버지의 눈이 뜨였다. 돈 후안은 아버지가 죽기 전에 하셨던, 계속 살 거라는 둥, 자신이 신이라는 둥,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수정 병 안에 든 물은 영생의 묘약이었던 것이다.

약삭빠른 돈 후안은 부활한 아버지의 눈을 리넨 천으로 짓이겨 죽여버린다. 이후 효심 깊은 아들로 추앙받게 되었고, 영원히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돈 후안은 지혜가 생겼는지 세상의 모든 원리를 꿰뚫게 된다. 예순 살이 되고 스페인에 정착한 그는 결혼하고 아들 펠리페를 갖는다. 시간이 지나고 돈 후안도 노쇠해진다. 임종을 맞이할 즈음이 되어 아들 펠리페에게 마지막 부탁을 한다. 언젠가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바로 그 부탁을 말이다. 물론 펠리페가 자기처럼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여러 수사들과 거짓말을 동원하면서.

아들 펠리페는 돈 후안과 달리 효심 깊고 순종적이었다. 아버지의 부탁대로 실행에 옮긴다. 밝은 달빛 아래 충실히 시체의 얼굴을 닦았고, 이어서 오른팔을 적시자마자 젊고 억센 아버지의 팔이 펠리페의 목을 졸랐다. 유리병이 떨어졌고 액체는 다 증발해버렸다. 돈 후안은 얼굴과 팔 하나만 부활한 불완전한 영생체가 된 것이었다. 머리 좋은 사람답게 산루카르 수도원장은 이 기적을 이용해먹기로 결심했고 실행에 옮긴다. 그러나 소문을 듣고 예식을 보러 온 모든 사람들 앞에서 무신론자 돈 후안의 머리는 조롱과 저주의 말을 쏟아내며 몸에서 툭 떨어져나와 신부의 머리를 물어뜯는다. 수도원장이 숨을 거두는 순간 돈 후안의 머리는 외친다. “바보 같은 놈. 자, 말해보시지, 신이 있다고?” 그리고 책은 마무리된다. 영생을 욕망했던 자의 최후는 우스꽝스럽고 괴기스러운 머리와 한쪽 팔, 즉 불완전한, 아니 어쩌면 존재하지 말았으면 더 좋았을 법한 존재로 막을 내리게 된 것이었다.

2. ‘미지의 걸작’
이 작품에서 초점이 맞춰지는 인물은 프렌호퍼 선생이다. 그는 다른 두 인물, 포르뷔스와 푸생과는 달리 실존인물은 아니지만, 발자크가 예술가의 내재된 욕망을 드러내기 위해 창조한 천재 화가이다. 프렌호퍼 선생은 이미 노인이며 세상에서 아무 화가도 할 수 없는, 회화 속 인물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기법에 능통한 자였다. 그는 십 년 전부터 그려왔던 한 여인에 대한 그림이 있다고 했다. 그 그림은 그림을 넘어 살아 숨 쉬는 사람으로, 그리고 프렌호퍼의 애인이자 프렌호퍼 자신만의 창조물이자 소유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는 그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오랜 기간 애를 썼고, 그러면서 그 작품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못하는 비밀 (미지의 걸작)이 되었다. 그는 끝내 만족하지 못했다. 여전히 생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프렌호퍼에게 부족한 것은 실제 모델이었다.

어쩌다 프렌호퍼와 포르뷔스 사이에서 끼게 된 푸생은 애인에게 프렌호퍼 선생님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델이 되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그냥 모델이 아니라 누드 모델이었다. 다른 남자 앞에서 옷을 벗어야 하는 것이었다. 푸생과 그의 애인 질레트는 헤어질 수 있는 위험을 감지했고 그것을 감수해야 했다. 질레트는 푸생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로도 생각했다. 프렌호퍼의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푸생과 질레트는 그의 집으로 찾아간다.

질레트를 보고 프렌호퍼는 십 년간 숨겨오며 은밀한 관계를 가졌던 그림 속의 여인 카트린 레스코를 공개하기로 마음을 바꾼다. 포르뷔스와 푸생은 잔뜩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프렌호퍼가 아끼는 여인이 그려진 그림이라 하는 화폭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실물처럼 그려진 한쪽 발을 제외하고는 여러 선들과 색들만이 빈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프렌호퍼는 혼자서 광기에 찬 채 ‘무’에서 ‘완전’을, 그리고 ‘생’을 마음 속에서 그려내고 그것을 실제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살아있는 그림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을 그 누구보다도 간절히 원했던 어느 한 천재 화가의 환상일 뿐이었던 것이다. 프렌호퍼는 다음날 자신의 모든 그림을 불태우고 자기 자신마저도 죽음으로 내몬다. 

이 두 작품의 공통된 소재이자 주제는 인간의 내재된 욕망이지만, 발자크는 단지 그것을 드러내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것이 부질없고 불가능한 것임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어쩌면 발자크는 이 두 단편소설을 통해 인간에게 내재된 욕망에 대해 일종의 경고를 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돈 후안도 프렌호퍼도 결국 파멸에 이르고 말기 때문이다. 그리고 돈 후안과 프렌호퍼는 우리 자신이 될 수도 있다.

#녹색광선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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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의 말들 - 안 쓰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되는 기적을 위하여 문장 시리즈
은유 지음 / 유유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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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의 말들의 힘

은유 저, ‘쓰기의 말들’을 읽고

본인을 평범한 생계형 주부라고 하는 은유 (본명 아닌 필명) 작가는 글 좀 쓴다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은유 작가는 스스로를 국문과나 문창과나 신방과 출신이 아니며 별도의 창작 훈련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글을 잘 쓰고 싶어 하는, 위에 언급한 전공 출신이 아닌, 숱한 사람들에게 더 매력적으로 다가간 것처럼 보인다. 나에게도 그랬다. 나 역시 상황만 다를 뿐 그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작가 중 하나였고 지금도 그렇기 때문이다. 이 책을 사놓고 언제 한 번 읽어봐야지, 하다가 마침내 다 읽고 말았다. 버스 안에서 시작해서 버스 안에서 끝낸 나의 첫 책이기도 하다. 한 손에 잡힐 정도로 작은 판형이라 늘 메고 다니는 가방 안에 쏙 들어갔고, 순서대로 읽을 필요 없이 아무 데나 펼쳐 읽고 싶은 데를 읽어도 되었기 때문에 출퇴근 버스에서 읽기에 적당했다. 

글쓰기를 배우고 싶은 사람들에게 권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글쓰기를 어떻게든 시작했고 앞으로도 지속하려는 의지를 가진 미래의 작가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이 책에는 글을 어떻게 쓰는가에 대한 내용보다는 글쓴이의 고뇌와 현실, 글쓰기에 대한 사랑과 한이 적나라하게 소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곳곳에 쓴 많은 문장들을 나는 구구절절 공감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쓴다는 것에 대한 절박함과 그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삶이 내 삶을 그대로 도려내어 써놓은 것 같았다.  

이 책의 왼쪽 페이지에는 유명인이 남긴 문장들 중 은유 작가가 고른 한 문장 (곧 쓰기의 문장들, 즉 쓰기의 말들)이 새겨져 있고, 오른쪽 페이지에는 그 문장으로부터 흘러나온 그녀의 산문이 실려 있다. 글쓰기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방법이 아주 효과적이라는 점에 나도 동감한다. 책을 읽다가 훅 하고 들어오는 문장들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런 문장들을 허투루 버리지 않고 자기만의 방법으로 수집해놓으면 그 수집함은 글쓰기 보물단지가 되기 때문이다. 책에 밑줄 긋거나 형광펜을 칠하는 것에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 노트에 옮겨놓는 것. 글쓰기를 지속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기 위해 꼭 필요한 습관이 아닐까 한다. 참고로, 나 역시 이 습관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104개의 문장들이 소개되어 있지만, 나에게 꽂힌 딱 한 문장을 골라봤다. 존 플랭클린이 했던 (혹은 썼던) 문장이다. 

“상투성은 문장에서 발휘되면 민망하지만 주제가 되면 핵심 요소로 변화한다.”

2년 전부터 조금씩 쓰고 있는 소설의 주제는 상투적이다. 뻔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을 다루는 나의 문장들을 나는 상투적이지 않도록 애쓰고 있다. 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 풀어내는 능력을 나는 소설가의 가장 큰 재주라고 생각한다. 존 플랭클린의 저 문장이 내 마음 깊숙한 곳을 조망한 것 같다고 생각한 이유다. 그리고 나는 평생 숙원일지도 모르는 내 소설을 위해 좀 더 신경을 써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어떤 문장은 쓰기의 시작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이처럼 쓰는 사람의 마음을 조망하기도 하고, 앞길을 비춰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쓰기의 말들’의 힘일 것이다.  

#유유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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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여름 - 태양, 입맞춤, 압생트 향… 청년 카뮈의 찬란한 감성
알베르 카뮈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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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해하지 못해도 마음을 훔치는 글: 황홀하도록 반짝이는 에세이

알베르 카뮈 저, ‘결혼’ 중 ‘티파사에서의 결혼’을 읽고

5년 전 즈음이었던 것 같다. 나는 무더운 여름날, 캘리포니아에서 전철을 타고 일터를 향하고 있었다. 커다란 창으로 웅장한 산가브리엘 산맥이 보였고, 내 손엔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이해하지도 못한 채, 그러나 황홀할 정도로 반짝이는 문장에 압도된 채 나는 열 페이지도 되지 않는 분량을 가득 메운 문장들을 읽고 또 읽었다. 아, 그 묘했던 기분이란! 그 글은 카뮈의 에세이, ‘결혼’의 첫 꼭지, ‘티파사에서의 결혼’이었다. 나는 금세 상상 속에서 아프리카 대륙 북단에 위치한 알제리로 날아갔고, 그곳의 태양에 눈부셔하고, 그곳에서 강렬하게 풍기는 압생트 풀 향에 취했으며, 그곳의 차가운 바닷속으로 뛰어들어가 온몸을 자연에 노출시키고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 

다 이해하지 못해도 마음을 훔치는 글이 있다. 그 글이 새로운 번역가와 새로운 출판사를 만나 새 옷을 입고 내 앞에 다시 나타났다. 나는 이 책을 사지 않을 수 없었고, 이 글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감동은 그대로였다. 아니, 증폭되었다고 해야 할까. 이번엔 조각난 순간들이 아닌 화자의 동선을 따라 온전한 한나절을 치열하게 보내고 온 것 같은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다음은 나에게 해석된 ‘티파사에서의 결혼’이다. ‘티파사에서의 결혼’은 아무래도 이 책의 백미일 것이고, 이렇게 따로 조그맣게 기념이라도 하는 의미에서 감상문을 남긴다. ‘결혼’의 나머지 꼭지들과 ‘여름’까지 읽고 나면 모두 모아 감상문을 한 번 더 쓸까 한다. 

1. 티파사에서의 결혼

뜨거운 태양과 강렬한 압생트 풀 향으로 가득한 티파사는 자연과 폐허의 왕국이다. 눈부신 빛과 야생의 향기에 취한 나는 과거의 교훈과 인간의 철학조차도 가소롭게 느껴지는 장엄한 자연과 바다의 세계가 내뿜는 숨결에 호흡을 맞춘다. 듬직한 슈누아 산이 보이고 마을 전체가 조망되는 티파사의 폐허에서 나는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봄에 티파사에 머무는 신들은 하객일 뿐이다. 나는 인간을 대표하여 자연과 폐허의 왕국에서 세계와 결혼을 한다. 세계와 하나가 되기 위해 마침내 나는 벌거벗고 바다에 뛰어든다. 여름이 오기 전 바닷물은 아직 차갑지만, 태양의 뜨거움과 바다의 차가움 속을 오가면서 나는 내 삶을 무제한으로 사랑할 권리를 깨닫는다. 아, 이 영광스러운 순간이란! 세계와 하나 됨으로써 나는 내 삶을 더욱 치열하게 사랑하게 된다. 영겁과 같은 찰나의 결혼식이 끝나고 나면 나는 항구 근처의 작은 카페에 앉아 초록색 아이스 민트티를 큰 컵으로 한 잔 마시고, 베어 물면 과즙이 턱까지 흠뻑 적시는 복숭아를 먹는다. 먹고 마시는 이 피로연에서 나는 또다시 삶의 기쁨을 즐기고 행복을 느낀다. 그러고 보면 신들과 마찬가지로 티파사도 하객일 뿐이다. 오늘 나의 결혼을 증언해 줄 듬직한 존재들. 인간과 세계의 결혼을 목격한 산 증인들. 저녁이 찾아오고 피로연도 끝이 나면 나는 국도 근처에 위치한 공원 한구석을 찾는다. 선선해진 대기에 차분해진 정신으로 나는 충족된 사랑에서 비롯된 내면의 침묵을 음미한다. 인류를 대표해 치렀던 세계와의 결혼식을 떠올리며 나는 내 배역을 훌륭히 수행했음을 깨닫고, 밀려드는 기쁨에 몸을 떤다. 내 몸은 사랑으로 인해 세계로 가득 차고 세계와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곧 밤이 오고 다른 신들이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 내내 그랬듯이 침묵할 것이다. 두 발을 대지에 딛고 있지만, 입가엔 만족스럽고 초월한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녹색광선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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