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걸작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김호영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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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재된 욕망

오노레 드 발자크 저, ‘영생의 묘약‘과 ’미지의 걸작’을 읽고

단편소설을 즐기지 않는다. 급작스런 이야기 전개로 말미암아 증폭되는 주해와 해석의 간극 앞에서 나는 적잖이 당황스러워하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현대소설을 즐기지 않는 이유와도 일맥상통한다. 재치와 기발함보다는 진부할 정도로 상투적인 (뻔한) 주제와 이야기 전개를 선호하는 나는 빛바랜 상투성에서 감춰진 보석과도 같은 진리를 재발견하고 독자의 마음과 생각을 환기시키는 것이 문학이 해낼 수 있는 힘이라 믿는다. 

이런 나로서는 이 책에 담긴 두 단편을 읽긴 했으나 제대로 읽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 맥락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고, 개연성이 떨어지는, 단편소설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벌어지고야 마는 사건이 과연 무엇을 상징 (의미)하는지 나는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누군가는 나의 이런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어 할지도 모르겠다. 나완 달리 단편이 주는 그 끊김에 오히려 매력을 느끼고 즐기는 사람들도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녹색광선에서 2019년에 출판한 첫 책에 담긴 발자크의 ‘영생의 묘약’과 ‘미지의 걸작’은 모두 인간의 내재된 욕망을 다룬다. 전자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영생에 대한 욕망을, 후자는 살아 숨 쉬는 미술 작품에 대한 불가능한 욕망을 보여준다. 영생에 대한 욕망은 모든 인간이 공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살아 숨 쉬는 회화에 대한 욕망은 예술가만이 공유하는 그 무엇일 것이다. 그러나 발자크는 예술가가 아닌 그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을 만큼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을 이 작품에서 탁월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감상문에서는 한 작품씩 짧게 살펴보고자 한다. 

1. ’영생의 묘약‘
주인공 돈 후안은 호화로운 저택에서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부잣집 아들이다. 어느날 파티가 한창일 때 임종을 맞이하게 된 아버지 옆에서 돈 후안은 아버지로부터 최후의 부탁을 듣는다. 마지막 숨을 거두자마자 작은 천연 수정 병 안에 든 물로 온몸을 닦아달라는 것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돈 후안은 한참을 망설였다. 시간이 흐르고 장례를 준비하러 온 모든 사람들을 내보내고 돈 후안은 아버지의 마지막 부탁을 실행에 옮겨보기로 한다. 온몸이 아닌 눈 하나만 닦아보자고 생각했다. 시체의 오른쪽 눈꺼풀을 살짝 닦자마자 아버지의 눈이 뜨였다. 돈 후안은 아버지가 죽기 전에 하셨던, 계속 살 거라는 둥, 자신이 신이라는 둥,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수정 병 안에 든 물은 영생의 묘약이었던 것이다.

약삭빠른 돈 후안은 부활한 아버지의 눈을 리넨 천으로 짓이겨 죽여버린다. 이후 효심 깊은 아들로 추앙받게 되었고, 영원히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돈 후안은 지혜가 생겼는지 세상의 모든 원리를 꿰뚫게 된다. 예순 살이 되고 스페인에 정착한 그는 결혼하고 아들 펠리페를 갖는다. 시간이 지나고 돈 후안도 노쇠해진다. 임종을 맞이할 즈음이 되어 아들 펠리페에게 마지막 부탁을 한다. 언젠가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바로 그 부탁을 말이다. 물론 펠리페가 자기처럼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여러 수사들과 거짓말을 동원하면서.

아들 펠리페는 돈 후안과 달리 효심 깊고 순종적이었다. 아버지의 부탁대로 실행에 옮긴다. 밝은 달빛 아래 충실히 시체의 얼굴을 닦았고, 이어서 오른팔을 적시자마자 젊고 억센 아버지의 팔이 펠리페의 목을 졸랐다. 유리병이 떨어졌고 액체는 다 증발해버렸다. 돈 후안은 얼굴과 팔 하나만 부활한 불완전한 영생체가 된 것이었다. 머리 좋은 사람답게 산루카르 수도원장은 이 기적을 이용해먹기로 결심했고 실행에 옮긴다. 그러나 소문을 듣고 예식을 보러 온 모든 사람들 앞에서 무신론자 돈 후안의 머리는 조롱과 저주의 말을 쏟아내며 몸에서 툭 떨어져나와 신부의 머리를 물어뜯는다. 수도원장이 숨을 거두는 순간 돈 후안의 머리는 외친다. “바보 같은 놈. 자, 말해보시지, 신이 있다고?” 그리고 책은 마무리된다. 영생을 욕망했던 자의 최후는 우스꽝스럽고 괴기스러운 머리와 한쪽 팔, 즉 불완전한, 아니 어쩌면 존재하지 말았으면 더 좋았을 법한 존재로 막을 내리게 된 것이었다.

2. ‘미지의 걸작’
이 작품에서 초점이 맞춰지는 인물은 프렌호퍼 선생이다. 그는 다른 두 인물, 포르뷔스와 푸생과는 달리 실존인물은 아니지만, 발자크가 예술가의 내재된 욕망을 드러내기 위해 창조한 천재 화가이다. 프렌호퍼 선생은 이미 노인이며 세상에서 아무 화가도 할 수 없는, 회화 속 인물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기법에 능통한 자였다. 그는 십 년 전부터 그려왔던 한 여인에 대한 그림이 있다고 했다. 그 그림은 그림을 넘어 살아 숨 쉬는 사람으로, 그리고 프렌호퍼의 애인이자 프렌호퍼 자신만의 창조물이자 소유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는 그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오랜 기간 애를 썼고, 그러면서 그 작품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못하는 비밀 (미지의 걸작)이 되었다. 그는 끝내 만족하지 못했다. 여전히 생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프렌호퍼에게 부족한 것은 실제 모델이었다.

어쩌다 프렌호퍼와 포르뷔스 사이에서 끼게 된 푸생은 애인에게 프렌호퍼 선생님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델이 되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그냥 모델이 아니라 누드 모델이었다. 다른 남자 앞에서 옷을 벗어야 하는 것이었다. 푸생과 그의 애인 질레트는 헤어질 수 있는 위험을 감지했고 그것을 감수해야 했다. 질레트는 푸생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로도 생각했다. 프렌호퍼의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푸생과 질레트는 그의 집으로 찾아간다.

질레트를 보고 프렌호퍼는 십 년간 숨겨오며 은밀한 관계를 가졌던 그림 속의 여인 카트린 레스코를 공개하기로 마음을 바꾼다. 포르뷔스와 푸생은 잔뜩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프렌호퍼가 아끼는 여인이 그려진 그림이라 하는 화폭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실물처럼 그려진 한쪽 발을 제외하고는 여러 선들과 색들만이 빈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프렌호퍼는 혼자서 광기에 찬 채 ‘무’에서 ‘완전’을, 그리고 ‘생’을 마음 속에서 그려내고 그것을 실제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살아있는 그림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을 그 누구보다도 간절히 원했던 어느 한 천재 화가의 환상일 뿐이었던 것이다. 프렌호퍼는 다음날 자신의 모든 그림을 불태우고 자기 자신마저도 죽음으로 내몬다. 

이 두 작품의 공통된 소재이자 주제는 인간의 내재된 욕망이지만, 발자크는 단지 그것을 드러내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것이 부질없고 불가능한 것임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어쩌면 발자크는 이 두 단편소설을 통해 인간에게 내재된 욕망에 대해 일종의 경고를 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돈 후안도 프렌호퍼도 결국 파멸에 이르고 말기 때문이다. 그리고 돈 후안과 프렌호퍼는 우리 자신이 될 수도 있다.

#녹색광선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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