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묻는 딸에게, 아빠가 - 기독교에 회의적인 교양인과 나누고 싶은 질문 25가지
정한욱 지음 / 정은문고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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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과 교양을 갖춘 정직한 신앙


정한욱 저, '믿음을 묻는 딸에게'를 읽고


제목 (믿음을 묻는 딸에게)과 함께 부제 (기독교에 회의적인 교양인과 나누고 싶은 질문 25가지)만 읽어도 짐작할 수 있듯, 이 책은 딸이 질문하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을 빌려 저자가 기독교에 관련된 25가지 주제들을 선별하고 일반교양 수준에 맞춰 풀어쓴 글의 모음이다. '시작하며'에 이어 차례를 보면 저자가 다루는 주제들이 기독교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기독교 신학 혹은 신앙을 전제로 하지만 (저자는 기독교인이다), 그것을 넘어 인문학, 철학적인 내용까지 두루 섭렵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기독교인뿐 아니라 비기독교인에게도 열려있다. 부제에 등장한 '기독교에 회의적인 교양인'이라는 표현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차례를 다시 살펴보면, 25가지 질문들은 진지한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고민하고 갈등하는 주제들임을 깨닫게 된다. 또한 기독교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보였던 주제들도 기독교가 다뤄왔고 다루고 있으며 다뤄야만 하는 것들임을 깨닫게 된다. 


이 책을 읽고 나는 기독교인의 교양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저자의 독서의 양과 폭, 지식의 양과 깊이, 그리고 관찰과 성찰에 이은 탁월한 통찰은 나를 충분히 압도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매 꼭지는 간결하고 이해하기 쉽게 쓰여 가독성도 좋은데, 그 꼭지를 쓰기 위해 동원된 참고 서적들을 보면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성경과 신학을 성실하게 읽고 연구하는 평상시 저자의 내공이 잘 드러난 책이라 생각한다. 또한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잡힌 관점, 딸에게 알려주듯 애정과 이해와 배려가 담긴 문체 등을 보며 나는 보수적인 신앙인의 모델을 본 것 같았다. 


'교양인'이라는 단어 선택이 탁월했다는 생각이다. 기독교인 중에도 교양인이 좀 더 많아지길 고대한다. 질문하고, 답하려고 애써보고, 모르면 모른다고 정직하게 말할 줄 아는 상식적인 기독교인이 많아지면 좋겠다. 옹졸하고 편협하고 반지성적이고 비겁하기까지 한, 우물 속에 갇힌 이기적인 신념을 정통이나 순수라는 단어로 포장하여 기독교를 부끄럽게 만드는 기독교인들이 이해를 추구하며 끊임없이 공부하는 신앙인으로 거듭나길 간절히 소원한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 충분히 변화의 마중물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이다.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일독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덧. 그나저나 내 아들은 언제 이런 질문을 하게 될까. 나는 그 질문들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정은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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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긴밤 -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83
루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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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 아닌 함께, 내가 아닌 우리


루리 글, 그림, '긴긴밤'을 읽고


밤의 길이는 영혼의 상태를 반영한다. 짧은 밤은 단잠과 함께 치유와 회복을 의미하는 반면, 긴 밤은 불면에 시달리거나 선잠을 자면서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긴긴밤을 통과했다는 것은 생사를 오가는 삶의 극한 순간을 간신히 넘어섰다는 표현이리라. 작품 속 주인공 코뿔소 노든과 펭귄 치쿠는 이러한 긴긴밤을 숱하게 통과한다. 이 작품의 방점은 단순히 고난과 역경을 극복했다는 데에 있지 않다. 그 긴긴밤 모든 순간을 함께 했다는 데에 있다. 혼자가 아닌 함께 말이다. 같은 코뿔소끼리도, 같은 펭귄끼리도 아닌, 코뿔소 한 마리와 버려진 알을 든 펭귄 한 마리가 함께 하는 공동체. 이 작품이 단순한 성장소설이 아닌 이유다. 


코뿔소와 펭귄의 연대는 강자와 약자의 연대다. 이들은 어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잠시 연합한 계약 관계가 아니다. 코뿔소는 화염 속에서 무너진 철조망을 넘어 그가 원하는 천국으로 뛰어갈 수 있었다. 바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말이다. 그러나 노든은 그러지 않았다. 버려진 알이 담긴 양동이를 물고 졸졸 따라오는 치쿠를 모른 체하지 않았다. 그는 치쿠의 느린 걸음에 기꺼이 보조를 맞추어 얼마나 더 걸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한 채 하염없이 걸어야만 하는 긴긴밤을 선택한다. 그에게 천국인 곳이 아닌 치쿠와 알에게 천국인 바다를 향해서 노든은 혼자가 아닌 함께를 선택한다. 이 동화를 읽으며 내겐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그리스도인인 나는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뛰노는 천국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노든도 치쿠도 부모가 누군지 모르는 고아로 성장했다. 노든은 야생 생활에서 인간의 폭력 때문에 아내와 딸을 잃기도 했다. 죽기 직전 구조되어 잠시 살게 된 동물원에서 그는 앙가부라는 친구도 잃었다. 역시 인간의 폭력 때문이었다. 생존자였던 노든은 인간에 대한 복수로 동물원을 떠났다. 그런 상황에서도 노든은 치쿠를 모른 체하지 않았던 것이다. 노든은 조그맣고 약한 치쿠와 치쿠가 들고 품고 다니는 알을 위해 그의 유익을 기꺼이 포기하고 그들을 보호하며 돕기로 했던 것이다. 아름다운 선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만약 노든이고 치쿠가 곁에 있다면 과연 나는 노든과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치쿠가 죽고, 다행히 때맞춰 태어난 아기 펭귄 '나'는 (이 작품의 화자다) 노든의 목숨 건 도움과 희생으로 혼자 마침내 바다에 다다른다. 험한 절벽을 혼자 넘으며 '나'는 '나'를 살게 하고 여기까지 있게 한 많은 이들의 진정성 어린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나'의 천국은 공짜가 아니었다. '나'를 사랑했던 이들의 땀과 눈물과 피의 열매인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단순한 성장소설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천국 입성이 이 작품의 화룡정점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일지 모른다. 여기서도 연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나'의 바다 도착이 이루지 못한 목적으로 작품이 끝났다 하더라도 이 작품의 메시지는 약해지지 않는다. 천국에 먼저 간 치쿠와 저 멀리 초원에서 늙어가는 노든의 마음에 안타까움이 더해질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작품을 읽고 뻔한 격언 하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혼자라면 빨리 갈 수 있지만, 함께라면 멀리 갈 수 있다.' 천국은 빨리 갈 수 있는 곳이기보다는 멀리 가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라 믿는다. 혼자가 아닌 함께, 내가 아닌 우리에게 허락된 곳일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나를 돌아본다. 나에게 노든이나 치쿠와 같은 존재가 있는가. 나는 혼자인가, 함께인가. '우리'라고 말할 수 있는 동지가 있는가. 소중히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내 것을 기꺼이 내려놓고 그 사람을 위해 모든 걸 내놓을 수 있는 사랑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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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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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과 저녁 사이에 충만하기


욘 포세 저, '아침 그리고 저녁'을 읽고


낯선 작가의 책을 손에 들고 낯선 세상에 처음 발을 내민다. 용기 내어 조심스럽게 첫 발만 디디면 어느새 나는 숙련된 여행자가 되어 이국의 냄새를 맡고 이국의 소리를 듣고 이국의 사람과 사물과 자연을 보면서 모든 시공간을 향유하기 시작한다. 독서는 낯선 곳으로 떠나는 혼자만의 여행이다.


문학은 삶을 풍요롭게 한다. 책 한 권으로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로 대체된다. 옹졸하고 편협했던 나는 조금은 더 너그러운 마음과 조금은 더 깊은 눈을 가진 사람으로 확장된다. 문학은 사람을 겸손하게 한다. 낮은 자세로 새로운 세상을 접하고 귀 기울이고 멈추고 가만히 살피게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사려 깊은 사람이 되어간다. 하지만 문학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익숙함을 떠나 낯섦을 맞닥뜨릴 수 있는 용기. 그리고 그것에 함몰되지 않는 용기, 나아가 그것을 극복하려 하지 않는 용기, 마침내 그것을 감싸 안는 용기. Embrace. 보이는 것만을 의지하지 않고, 시대의 조류에 생각 없이 편승하지도 않고, 다양성과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분별력 있는 사람으로, 문학은 나를 성장시킨다. 잘 만난 문학작품 하나는 똑똑한 사람 열 명의 말보다 낫다. 


어젯밤 나는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를 만났다. ‘아침 그리고 저녁‘이라는 짧은 책은 곧장 나를 노르웨이의 어느 외딴섬으로 안내했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을 조용히 내려놓고 기꺼이 순례자가 되어 그곳에서 한 아이가 태어나는 경이로운 순간을 함께 했다. 한 생명의 탄생. 나는 저자가 제목에서 말하는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이야기는 그다음 문장에서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뛴다. 인생의 낮 시간은 이리도 짧은 것일까. 낯선 세상에서 아침을 맞이하자마자 곧바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되다니. 인생의 황혼은 금세 불어닥쳤다. 태어난 아기는 어느새 손자까지 본 노인이 되었다. 아니, 노인이 되어 죽음을 맞이한 지 몇 시간 채 되지 않은 존재가 되어있다. 곧 막내딸이 그날따라 아버지의 집에서 아무런 기척이 없다는 사실을 파악한 뒤 걱정 가득한 채 자신의 차가워진 육신을 만나러 올 것이었다. 


작품의 팔 할은 자기가 죽은 줄도 모르고 평상시와 같지만 뭔가 다른 낮 시간을 보내는 혼령의 이야기다. 죽은 자가 맞이하는 오전과 오후의 이야기. 하지만 그 시간도 넉넉하지 않다. 단 하루만 허락된 시간이다. 작품 마지막에서 그는 살아있을 때 가장 친했던 친구 (이미 죽은, 그러니까 친구의 혼령)의 인도 하에 저 세상으로 넘어간다. 그렇게 인생의 아침부터 저녁을 모두 보여주고 주인공은 마침내 사라진다. 그는 덤덤하고, 또 덤덤하다. 마치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는 것처럼.


인생을 하루 (아침 여섯 시부터 저녁 여섯 시까지)에 빗댄다면 나는 몇 시쯤에 있을까. 절반은 넘긴 것 같아 보이니, 정오가 지난 지 한 시간 정도 되지 않을까. 이른 여섯 시에 태어나 아침을 맞이하고, 늦은 여섯 시에 자다가 조용히 저녁을 맞이한 요한네스가 문득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겨우 오후 한 시에 위치한 나는 과연 여섯 시 저녁을 맞이할 수 있을까.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떠나보내게 될까. 내가 마침내 저녁을 맞이하게 될 때 나를 기억해 줄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요한네스의 아침과 저녁을 함께 하며 순례를 마친 나는 결국 현재의 나로 돌아온다. 그리고 좀 더 사랑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과 좀 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몸과 마음을 넉넉히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자 욘 포세는 먼 이국땅 한국에서 이런 뜻밖의 열매를 거둔 사실을 알기나 할까. 나는 그저 감사한 마음일 뿐이다. 내가 위치한 낮 시간을 혼령이 아닌 지금의 내 모습으로 충만히 채우고 싶다. 늦은 여섯 시가 되기 전에 저녁을 맞이해도 좋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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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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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음'의 문체


최은영 저,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읽고


서양고전문학을 선호하는 나는 한국소설도 꾸준히 읽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려면 베스트셀러 위주로 이미 입소문 난 책들을 먼저 살피게 된다. 최은영 작가는 수년 전부터 '쇼코의 미소', '내게 무해한 사람'으로 이미 주목받는 차세대 한국 현대소설가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책 소개를 보고는 읽지 않으리라 마음먹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모두 단편집이었기 때문이다. 단편이 주는 의도적인 불친절함과 불가피한 아련함 (혹은 무책임함)보다는 복잡하고 장황하더라도 깊고 풍성함으로 긴 시간 푹 빠져들 수 있는 장편을 나는 사랑한다. 참고로 나에게 큰 영향을 끼친 고전문학은 한결같이 장편이다. 나는 책으로부터 여러 방 잽을 맞는 것보다 묵직한 어퍼컷 한 방을 기대한다. 그리고 벽돌책의 매력은 그것을 깨본 자만이 알 수 있는 비밀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2년 전 '밝은 밤'으로 최은영이 다시 회자되었을 땐 미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구해서 읽었다. 역시 단순한 이유였다. 장편이었기 때문이다. 읽고 나서 감동했다. 그리고 뜻밖이었다. 여느 한국소설처럼 기발하고 특별하고 신기한 사건이나 상황이 전제되지 않은, 어찌 보면 뻔한 인생을 써 내려간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뻔하지 않게 개별성에서 보편성을, 평범함에서 비범함을 자연스럽게 끌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고전문학에서 내가 느끼던 것과 비슷한 인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다짐했다. 최은영의 다음 작품이 나오면 그것이 단편집일지라도 꼭 읽어보겠노라고.


작년에 출간된 이 책은 일곱 편으로 구성된 단편집이다. 이미 모두 다른 지면에 실린 글들을 모아 한 권으로 묶은 것이다. 연작 소설도 아니고 독립적인 이야기를 가진 단편 모음이다. 보통 단편집은 가장 먼저 소개되는 글이 대표작인 경우가 많다. 이 단편집도 그랬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라는 작품은 첫 단편의 제목이자 이 책 전체의 제목이기도 하다. 


작가 지망생 화자의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인 이 작품은 늦깎이 대학원생일 때 만난 한 강사에 대한 기억과 그녀가 남긴 흔적들을 돌아보며 현재 자신의 위치를 객관화하여 성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제는 사라져 버린 그 강사가 화자에겐 희미한 빛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녀를 따라가고 싶었다. 그 방향이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없고, 목적지가 어딘지,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도 몰랐지만, '나'는 그녀처럼 그저 더 가보고 싶었던 것이다. 어느덧 과거 그녀의 위치에 와있는 '나'는 여전히 그 희미한 빛을 쫓아, 동시에 희미한 빛이 되어, 그녀를 종종 떠올리며 하루를 살아간다. 단편소설의 한계이자 그것의 고유한 매력을 아련함에서 찾는 나는 옛 기억의 회상, 그리움, 그리고 그것이 이루는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를 바라보는 것을 글로써 써내는 데에 침착한 최은영의 문체가 적격이라는 생각이다. 


두 번째 작품 '몫'과 다섯 번째 작품 '파종'에서도 글쓰기에 관련된 소재가 중요하게 활용된다. 한편 거의 모든 작품에서 크고 작게 다뤄지는 주제는 여성이 중심에 놓인 사회적 약자의 삶과 그 삶에 대한 연민, 그리고 그들을 짓밟고 이용해 먹는 자들을 포함한 사회 구조에 대한 고발이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서는 젊은 여자 강사를 대하는 학생들의 무례함을 잠시 언급하는 반면, '몫'에서는 그러한 문제를 전면에 등장시킨다. 이야기의 흐름이 'A여자 대학교' 학생들에게 가해진 집단 폭력, 'B대학교 대학원'에서 일어난 교수 성희롱 사건,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남편을 죽여야 했던 여자들과 그렇게 살인을 해야 아내가 살 수 있는 사회구조의 잔인함에 대한 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세 번째 작품 '일 년'에서는 주로 남자들로 이루어진 정규직 사원들과 함께 일 하게 된 일 년 계약 인턴의 비참한 현실을, 네 번째 작품 '답신'에서는 가부장적 아버지의 폭력성과 미성년자 여자아이를 성 노리갯감으로 삼는 학교 선생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그 폭력에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가슴 아픈 현실을 폭로한다. 


'파종'에서는 이혼을 경험한 여자와 그녀의 딸이 살아가는 상처 입은 삶을 그리기도 하지만, 그들의 삶에 개입하여 직접적인 도움이 되어주는 한 사람의 인생과 그가 죽고 남긴 흔적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남은 모녀에게 희망으로 앞날을 비추는 모습도 잔잔하게 보여준다. 


여섯 번째 작품 '이모에게'에서는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받은 여자들의 상처와 더불어 자신을 돌봐주었던 이모의 육아와 훈육방침에 대한 화자의 해석이 실망, 애정 없음, 차가움에서 사랑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독립된 인생과 성숙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한 여자의 삶을 그려낸다. 


마지막 작품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에서는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남의 집에서 길러져야 했던 한 여자의 기구한 인생을 소개하면서 두 딸을 포함한 그 누구에게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평생을 겉도는 그녀의 삶을 비추며 먹먹한 가슴으로 부끄러움에 대해 고찰하게 만든다.   


이런 주제들로 모아진 글이다 보니 아무래도 책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는 침울한 편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어둡지는 않다. '밝은 밤'에서 느꼈던 최은영이 가진 문체의 '밝음'이 낳은 효과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주제를 다루는 방법이 진부하지 않으면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어 작품을 읽어나가기가 어렵지 않다. 그래서 나는 한강 작가의 글이 깊고 무거워 읽기 부담되는 독자에게 최은영 작가의 글을 권하고 싶다.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나는 최은영 작가의 글에 좀 더 무게가 실리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진다. 여성이 중심에 놓인 글만이 아닌 다른 주제를 다루는 이야기도 도전해 보면 좋겠다는 바람과 함께 말이다. 그러면서도 최은영 작가만이 가진 '밝음'의 문체가 멈추지 않고 고유하게 빛나기를 기대한다.


*최은영 읽기

1. 밝은 밤: https://rtmodel.tistory.com/1408

2.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https://rtmodel.tistory.com/1747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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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진화론과의 대화 - 성경과 진화론 사이에 존재하는 불일치에 대한 비평 내일을 위한 신학 시리즈 3
신국현 지음 / 세움북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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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와 아직 사이의 요원한 대화


신국현 저, '유신진화론과의 대화'를 읽고


1. 후기에 앞서


먼저 이 리뷰는 세움북스 대표님의 리뷰 요청을 수락한 이후 기증된 책을 읽고 쓴 글임을 밝혀둡니다. 저도 인간인지라 제가 구매하지 않고 기증받은 책을 리뷰할 때에는 냉철한 비판보다는 긍정적인 부분을 좀 더 고려해서 반영하곤 합니다. 감사하게도 이번엔 대표님께서 비판적인 시각도 괜찮다고 말씀해 주셨기에 저는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고 조금은 더 객관적이고 조금은 더 냉철하게 이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리뷰는 어디까지나 저의 주관적인 입장이 반영된 글이라는 점을 숙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 역시 시대의 자식이고, 제 글은 제 안에 자리 잡은 세계관, 사상, 신앙 등에 영향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후기에 앞서 저의 소개를 간략하게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1996년 포항공대 생명과학과에 학부로 입학하여 졸업한 이후 2009년 같은 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2011년 미국으로 건너가 박사후연구원 과정을 끝내고 스탭사이언티스트를 거친 후 2022년 6월에 한국에 들어와 현재 기초과학연구원 유전체교정연구단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인 실험생물학자입니다. 제가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연구했던 내용은 분자생물학, 세포생물학, 발생생물학, 마우스유전학, 혈액학 등이 기반이었고, 그 이후로도 저는 비슷한 영역에서 쉬지 않고 현장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과학자인 동시에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저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자 주님이시고 지금도 성령으로 믿는 자 안에서 내주, 인도,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저는 또한 하나님이 창조주이자 구원자이심을 믿습니다. 이미 왔으나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지금도 매일 살아내기 위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사적인 복음에 갇혀 있다가 뒤늦게 복음의 공공성을 깨닫고 교회, 일터, 가정, 그 어느 곳에서도 여호와의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 그리고 말과 이론이 아닌 삶 자체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내려고 성령을 의지하며 부단히 애쓰고 있습니다. 


2. 후기 
(1) 총평


이 책을 다 읽어내기는 생각보다 어려웠습니다. 난이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 책은 진지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쓰였습니다. 이 책이 읽기 어려웠던 이유는 읽는 내내 답답함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시대착오적인 표지그림에도 불구하고 제목에 쓰인 '대화'라는 단어 때문에 저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인내심을 가지고 책을 끝까지 읽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저의 기대는 기대만으로 끝나버렸습니다. 다행스러운 건 이 책에서 비신사적인 글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신사적인 자세를 유지합니다. 저자의 훌륭한 인격을 대변하는 점이자 본받을 점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자세가 동등한 상대와 대화할 때의 자세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오히려 반은 구구절절 변명하는 것처럼 보였고, 나머지 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교정하고 가르치려는 자세를 고수하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저는 저자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자의 글은 마치 핍박받고 비난받았던 과거의 억울함을 풀고자 노력하는 글 같아 보였습니다. 제가 느낀 답답함과 불편함은 아마도 저자의 울분이 많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왜 그런진 잘 모르겠지만, 저자는 시종일관 스스로를 피해자의 위치에 두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과거에 받았던 피해가 부당하기 때문에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듯한 의도가 연민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또한 스스로를 한 개인이 아닌 '정통 기독교'를 대변하고 성경을 수호하는 역할을 자처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책에서 저자는 반복적으로 "성경은……", "성경에서는……",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등의 문구를 사용합니다. 저자가 대화 상대로 가정하는 유신진화론이 야기하는 문제점들 (이 문제점들은 이미 숱하게 창조과학 진영의 근본주의적인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논쟁했던 것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유신진화론자라고 칭해지는 사람들조차도 이 문제점들을 알고 있으며, 이것들이 해결될 수 있는 신학적 해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점입니다)을 낱낱이 나열한 이후 저자의 입장이 그대로 담긴 것이라 생각되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근본주의 입장의 성경 해석을 덧붙일 때마다 말이지요. 마치 저자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정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가질 수 있다고 여기는 듯했습니다. 여기서 비판할 가장 중요한 점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저자가 대화하고 비판하는 상대가 유신진화론이라는 사실입니다. 흥미롭게도 제가 비판할 점들은 모두 표지에 다 나와 있습니다. 이 책은 내용이 아무런 반전 없이 표지와 일맥상통하는 책인 것입니다.


(2) 유신진화론


개인적으로 '유신진화론'이라는 용어 자체가 맘에 들지 않습니다. 마치 유신진화론이라는 분과 학문이 존재하는 듯한 인상을 풍기기 때문입니다. 그런 학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유신진화'라는 용어도 사용을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진화 중 유신진화도 있고 무신진화도 있을 것 같은 불필요한 추측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과학계에 불필요한 문제점들을 던져버리는 무책임함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리고 창조과학자들과의 오랜 논쟁을 살펴봐도 충분히 알겠지만, 언제나 문제는 과학의 영역이 아닌 신학의 영역, 즉 성경 해석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있었습니다. 이런 용어의 사용은 한국 기독교 안에 팽배한 잘못된 고정관념, 즉 과학과 신학이 마치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여기는 풍토를 더 견고히 하는 효과를 낼까 봐 우려가 됩니다. 또한 유신진화론이라는 용어에는 창조라는 의미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저자도 인정하듯 유신진화론자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믿습니다. 무신론자 혹은 유물론자와 전혀 다른 입장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진화적 창조'라는 용어 사용을 저는 선호합니다. 이미 이것은 제가 과신대 활동을 적극적으로 할 몇 년 전에 나왔던 얘기 중 하나입니다. 이런 얘기가 종결되지 않고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현상이 저는 여전히 기이하고 안타깝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여전히 근본주의자들과의 대화는 이미 왔으나 아직 오지 않은 것 같고, 요원하기만 한 것 같습니다.


진화는 신을 믿든지 안 믿든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지금도 관찰 가능한 자연 현상일 뿐입니다. 몇 년간 우리를 괴롭혔던 코로나 바이러스의 변종을 진화라는 현상 아니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해마다 접종하는 독감 예방주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 어떤 항생제도 먹히지 않는 슈퍼박테리아를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든, 아직도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믿든, 선택은 본인의 자유이지만, 그렇게 믿는다고 해서 과연 무엇을 얻고 무엇을 지킬 수 있을지 저는 의문입니다. 저자는 책에서 진화를 거부한다고 단도직입적으로 선포합니다. 저에게는 정말 충격적인 고백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건 중력을 거부한다고 하는 것과 한치도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를 저자의 용기라고 봐야 할지 뭐라고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또 언급하겠지만, 저자는 아마도 ‘진화’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진화주의’, 그중에서도 ‘진화절대주의’를 거부하는 것이지 않을까 합니다. 즉, 단어 선택을 잘못하신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오해와 비난을 받지 않도록 용어 사용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저자의 불찰일 것입니다. 거부할 대상이나 비판할 대상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대화라는 단어로 옷을 입혀 책을 쓰시다니요. 적어도 이 책은 감정에 호소하는 책이 아니라 지성에 호소하는 책인데 말입니다. 


저자의 이력을 보면 충분히 지성을 갖춘 분이라 저는 참 이상하기만 합니다. 물론 저자가 진화를 거부하는 이유는 성경을 수호하고자, 정통 기독교를 유지하고자 하는 숭고한 의지가 반영된 결과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연 진화를 거부한다고 성경을 수호하고 정통 기독교를 유지할 수 있을지요. 나아가 이런 의문까지 듭니다. 진짜 저자가 수호하고 유지하려는 게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믿고 따르는 기독교 신앙인지, 그렇다면 저자의 신앙은 어떤 색깔을 가지고 있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이것은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자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데에 아무런 주저함이 없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믿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권장하는 근본주의 기독교인에 가깝습니다. 또한 과학이라 해놓고 과학계에 논문도 출간하지 못한 채 공식적인 인정도 못 받고 교회 안에서 세미나 형태의 수준에 머물고 있는 유사과학인 창조과학을 두둔하면서 창조과학이 반지성도 아니고 그저 비주류 과학이라고 주장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건 주류, 비주류 문제가 아닙니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과학계에서 목소리 큰 그룹이 힘을 가진다고 생각하시진 않겠지요? 얼마든지 과학적으로 실험이나 관찰 증거를 대고 논문으로 출간하면 창조과학도 정정당당한 하나의 과학으로 대우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창조과학이란 용어 자체부터가 모순이듯 창조과학은 과학이 아니랍니다. 그들의 설명 중엔 과학적 방법론이 불완전한 형태로 군데군데 사용되긴 하지만요.


성경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하는 건 건강하지 못합니다. 성경을 언제나 은혜로운 책이자 아무런 모순이 느껴지지 않는 책이라고 믿는 그리스도인은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모든 것을 통달하여 하나님과 비슷한 경지에 올랐거나, 성경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교회 목사님이 해주시는 말씀만 듣고 아무 생각 없이 주문 외우듯 성경을 읽는 사람. 저는 후자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경은 제대로 읽게 되면 은혜롭다기보다는 상당히 불편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체적으로 모순되는 부분도 많고 배경 이해가 없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자와 목회자의 성실한 공부와 연구가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들의 위치는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저는 저자도 이러한 신학자이자 목회자가 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저자는 유신진화론자들이 진화론적 개념을 도입하여 아무 문제없는 성경적 창조 개념을 무리하게 수정하고 난도질한다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덧붙입니다. 유신진화론자들이 성경의 진술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신 완전한 창조 개념을 믿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상황을 만들었다고요. 여기서 저자가 사용한 '성경의 진술대로’, ‘완전한 창조 개념’이라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의 성경 해석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저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성경적 창조 개념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지요. 저에겐 저자가 스스로 근본주의자라는 사실을 천명하는 거나 다름없는 부분으로 보였습니다. 이 책은 그러므로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어야 한다고 믿는 근본주의 기독교 목사의 세계관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물인 것입니다. 


과학은 지속해서 발전해 나갑니다. 성경을 기록할 당시에 모르던 과학 지식을 현대 사람들은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과학적 지식이 미천한 시대에 쓰인 성경이라 하더라도 그 모든 내용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아시다시피 구약성경이 기록된 시기는 코페르니쿠스가 나타나기 훨씬 전이었지요. 천동설을 믿고 있던 시대였다는 말입니다. 당연히 성경에는 그런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었을 겁니다). 저는 바로 여기가 신학이 시대의 발전을 막론하고 항상 필요한 지점이자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과학뿐 아니라 여러 지식적이고 문화적인 부분의 확장에 따른 성경 해석은 과학의 영역이 아닌 신학의 영역에서 이뤄져야 할 몫일 테니까요. 시대가 바뀌면서 달라지는 개념들과 관념들에 부합하면서도 여전히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을 수 있도록 해석을 연구하는 게 바로 신학자의 역할이겠지요. 노예제도가 사라지고 여성들의 인권이 보장되는 이 시대에 바울 서신은 물론 구약의 기록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일 테니까요. 


굳이 저 자신을 분류하자면, 저 역시 유신진화론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는 진화를 신을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지금도 관찰 가능한 자연 현상이기 때문에 저 역시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사람이고, 과학으로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고 그럴 수조차 없을 것 같지만, 기원 (생명의 기원과 인간의 기원) 문제에 대해 진화가 내포하는 의미와 성경 해석과의 불일치들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동시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자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영적인 사실을 믿는 믿음을 잃지 않기 위해 이러한 불일치를 풀어줄 수 있는 신학적 해석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반지성적이지 않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유신진화론자에 속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자가 비판하는 유신진화론이라는 상대는 그 의미가 굉장히 모호합니다. 그 이유는 전적으로 저자의 무분별한 용어 사용 때문으로 보입니다. 저자는 진화, 진화론, 진화주의, 이 세 가지 단어의 차이를 잘 모르거나 애써 무시하는 듯합니다. 저자가 책에서 유신진화론이라고 뭉뚱그려 비판하는 대상은 근본주의 기독교의 여집합 정도로 여겨도 무방하다 싶을 정도입니다. 저자가 사용하는 유신진화론은 진화절대주의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기도 합니다. 저자는 실제로 유신진화론자들은 진화론을 절대적이고 우주적인 법칙으로 믿고, 하나님이 일으키신 기적들을 한낱 신화나 설화로 치부한다고 비방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이유가 단순히 진화론을 보존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앞서 밝혔듯이 저 자신도 유신진화론자이지만 저는 진화론을 절대적인 법칙으로 보지 않습니다. 저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을 향해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일까요? 특히 기원에 대해서는 진화라는 현상을 연구하는 진화론이 그 어떤 것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기원 문제는 진화라는 현상으로 설명할 수 없고 나아가 과학의 영역을 벗어나는 문제입니다. 존재에 대한 문제는 철학이나 신학의 영역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용어이지만, 경도된 진화주의자 혹은 진화절대주의자들 중엔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믿고 행동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세상엔 한쪽으로 치우친 사람들도 소수 존재하니까요. 그렇게 존재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 일부의 치우친 부류를 저를 포함한 모든 유신진화론자들에게 대입하여 일반화시키며 비방하는 건 올바른 대화의 자세가 아닐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저자가 정의한 유신진화론이 야기하는 여러 신학적, 논리적 문제점들은 유신진화론자들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서 얘기했듯이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해 나가기 위해서는 그 문제점들을 야기한 진화라는 현상을 눈 가리고 아웅 하듯 거부할 게 아니라 있는 건 있다고 인정하고 수용한 이후 기존의 성경 해석과 다른 여러 교리들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면서 끊임없이 겸손한 자세로 연구에 임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이런 연구는 과학을 똑바로 이해한 신학자들의 역할이 클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이러한 일을 감당해 줄 신학자가 등장하여 과학과 신학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해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자가 그런 사람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3) 표지그림


표지그림은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숭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사람이 된다는 메시지를 담은 저 그림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폐기된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시대착오적인 그림인 것이지요. 이젠 다윈의 진화론을 아무도 저 그림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윈은 한 번도 원숭이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원숭이와 사람 사이에 대를 거듭해서 올라가다 보면 공통조상이 존재할 거라고 예측했을 뿐입니다. 물론 증명한 것도 아니고 관찰한 것도 (증명 및 관찰 불가입니다. 엄청나게 긴 세월 간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니었습니다. 다만, 본인이 관찰한 결과들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가설을 세우고 부분적으로 증명을 했을 따름입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불완전한 이론 맞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한낱 상상력으로 치부하는 건 과학이 어떤 학문인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의 말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저자는 책 속에서 그렇게 말합니다. 과학자로서 저는 모욕을 느꼈습니다). 


과학에서 하는 예측은 문학적 상상력과 다릅니다. 오히려 기존의 관찰과 실험 결과를 기반으로 할 수 있는 과학의 아름다운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수학을 사용해서 표현하기도 하지요. 그래서 뉴턴의 방정식 같은 수학공식이 아름답다고 표현하곤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예측은 틀릴 가능성을 언제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예측이 틀렸다고 해서 과학은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 예측을 했던 과학자는 실망할 수 있겠지만 말이지요. 과학은 언제나 그랬듯이, 새롭게 얻은, 예측과 다른 관찰 혹은 실험 결과를 포함하여 새로운 예측을 하게 됩니다. 이런 반복은 종교나 사상과 무관한 가치중립적인 과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윈의 진화론도 이런 식으로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즉, 원숭이와 사람의 공통조상을 본 적도 없고 증명한 적도 없지만, 여러 다른 관찰 결과들을 종합하여 미루어 예측해 보면 그 공통조상이 존재할 거라고 말하는 게 바로 과학인 것입니다. 결코 무신론을 지지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거부하거나 무시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완전히 증명되지 않은 이론을 절대적이고 우주적인 법칙인 것처럼 오도하여 모든 가치관과 세계관에 접목시킨다면 그것은 과학절대주의 혹은 과학지상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불건전한 사상 혹은 철학으로 봐야 적절할 것입니다. 이건 이미 과학의 영역을 벗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건강한 유신진화론자라면 기원 문제에 대해서는 과학이 설명할 수 있는 경계까지만 말하고 그 이상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말할 것입니다. 개인의 믿음이 반영된다면 확신에 차서 무엇인가를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과학이 아닌 개인의 믿음이지요. 언급했다시피 새롭게 밝혀진 과학적 사실, 현상들에 반응하여 성경 해석을 수정해야 하는 건 과학자가 아닌 신학자의 몫입니다. 


표지그림이 바로 이런 현상의 단적인 예로 볼 수 있습니다. 표지그림은 과학이 아닌 과학주의, 진화나 진화론이 아닌 진화주의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그림을 비판하는 건 좋습니다만, 이 그림 때문에 과학이나 진화, 혹은 진화론을 비판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저는 이 그림을 이 책의 표지그림으로 선택한 의도가 궁금합니다. 저자나 출판사는 과연 무엇을 얻기 위해 이 그림을 선택했던 것일까요? 단지 공부 부족은 아니었을지 의문입니다. 대화라는 단어는 이런 면에서도 부적절하네요. 


(4) 대화


책 제목에 등장하는 '대화'라는 단어는 책 내용과 무관합니다. 대화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책을 다 읽은 저에게 제목을 의뢰했다면, 저는 '근본주의 기독교인의 유신진화절대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고 제안했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무분별한 유신진화론이라는 용어의 반복적 사용으로 실재하지도 않는 유령을 상대로 소송을 걸고 자기를 공격했다고 비방하고 더 이상의 공격을 막기 위해 친절한 말들로 비판 및 교정하려고 애쓰며 그 해결책으로 문자적으로 성경을 읽는 근본주의 기독교를 강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자가 대화라는 단어에 집착하는 이유는 근본주의나 창조과학 관련된 사람들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으로 신사적으로 대우해 달라는 표현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5) 잘못된 지식으로 인한 모순


저자는 진화의 가장 첫 부분에서 발생하는 사건이 변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 변이 없이는 어떠한 진화론적 사건 (혹은 변화)도 일어날 수 없다는 걸 인정합니다. 변이가 생기기 위해서는 유전자가 존재해야 하고,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말은 이미 생명체가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므로, 저자는 진화가 무에서 유, 혹은 무생물에서 생물을 견인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저자는 진화론으로 생명의 기원 혹은 인간의 기원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혹은 성경과 반대되기 때문에 거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자가당착에 빠져있는 것이지요. 생물 진화의 시작점은 기존 생물이지 무생물이나 무가 아닙니다. 진화는 생물의 기원을 설명하지 못하고 설명하려 시도한 적도 없습니다. 그것을 시도한 것은 진화 혹은 진화 이론이 아닌 진화주의일 뿐입니다. 또한 진화가 마치 신을 대신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모든 현상을 다 설명하는 우주적인 법칙이라도 되는 것처럼 만드는 무신론자들의 철학 혹은 사상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저자는 진화론이 생명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는 도구일 수도 있다는 전제를 깔고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진화는 기원을 설명하지 못하고 그러려고 시도한 적도 없습니다. 저자는 가상의 적을 만들고 진지하게 싸우고 있는 꼴입니다. 이 점이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주범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진화는 관찰 가능한 현상이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으며, 진화 이론은 그 현상과 현상 이면의 기작을 연구하고 설명하려는 학문인 반면, 진화주의는 과학이 아닐뿐더러 학문이라 할 수도 없는 무신론자들의 썰일 뿐입니다. 저자가 무분별하게 사용하고 있는 진화론이라는 개념은 진화 혹은 진화 이론 혹은 진화 과학이 아니라 진화주의라는 유령인 것입니다. 저자가 반복적으로 지칭하는 유신진화론자는 유신진화론자라기보다는 유신진화주의자라고 혹은 유신진화절대주의자라고 해야 옳아 보입니다. 저는 유신진화론자라고 할 수 있겠지만 유신진화주의자는 아닙니다. 아마도 저 같은 유신진화론자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계속해서 저자는 진화론이 무신론을 대변하는 것처럼 우연과 목적 없음을 통해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는 법칙이자 기독교를 위협하는 적그리스도인 것처럼 말합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저자가 주야장천 대적하는 실체는 진화론이 아니라 진화절대주의인 것으로 보입니다. 과학이 아닌 철학이요 사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화라는 과학을 배격하는 듯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전적으로 저자의 잘못으로 보입니다. 즉시 수정하고 사과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이 밝혀내거나 증명한 것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럴 수조차 없습니다. 다만 그 시공간 안에서의 최선의 합리적인 설명일 뿐입니다. 과학자들이 밝힌 사실들은 언제나 더 정확하고 더 완전한 것으로 수정 및 대체될 여지를 갖습니다. 정치에 영향받지 않고 과학이 신뢰를 받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도 바로 이런 과학의 자정작용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유일하거나 절대적인 게 아니라 최선은 언제나 갱신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사용하는 진화론이라는 단어를 진화주의 혹은 진화우월주의나 진화절대주의라고 바꾼다면 책의 대부분에서 나는 잡음을 상당히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저자가 저지른 가장 큰 우는 철학이나 사상에 속하는 진화주의를 과학에 속하는 진화 혹은 진화 이론, 진화 과학으로 대치했다는 점, 그래서 엉뚱하게도 성경 혹은 기독교와 과학 사이의 거리를 더 좁히기는커녕 더 벌여놓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윈의 진화론으로 파생한 진화절대주의에 반대한다고 애초부터 밝히고 이 책을 썼더라면 저는 이 책을 읽지 마라고 하진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게 됐습니다. 다만 저자의 미흡함과 자가당착에 심심한 위로를 보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를 무신론이나 유물론 혹은 유신진화절대주의로부터 지켜내려고 하는 저자의 마음은 충분히 공감합니다. 다만, 그런 마음을 저자가 사용한 대화라는 단어가 무색해지지 않는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신학자이자 목사님이 되어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6) 불편하고 제거하거나 수정해야 할 문장들


너무 많아 다 적을 수 없지만 열 문장만 골라보겠습니다.


(6)-1: 26페이지 하단 - 27페이지 상단
| 예를 들어, 진화와 과학을 동일한 개념으로 생각하게 되면, 진화를 받아들이지 않음이 과학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거나, "진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비과학적이고 비이성적이다"라는 발언을 확정적으로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발언들은 사실 굉장히 틀린 표현이다. 왜냐하면 진화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여전히 과학을 신뢰하거나 심지어 실험 과학과 관련한 일들에 종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진화를 인정하지 않는 지적설계자들과 창조과학회에 속한 많은 이들도 과학자로서 연구와 실험에 참여하거나 과학을 가르치는 위치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또한 일반 과학 분야에서도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건전한 기여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진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일반인들 역시 여전히 과학의 여러 분야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
 >>> 당연히 진화와 과학은 동일한 개념이 아닙니다. 진화는 과학적 현상일 뿐입니다. 그러나 진화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과학을 신뢰할 수 있다는 말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누누이 말하지만, 진화는 지금도 무신론, 유신론을 떠나 누구나 관찰 가능한 생명 현상입니다. 이런 가치중립적인 자연 현상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과연 과학을 신뢰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자가 예로 든 지적설계자들과 창조과학자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게 아니라 속으로는 스스로 과학자로서 바라보는 과학적 사실과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라보는 신앙의 불일치로 인한 괴리를 느낄 것입니다. 괴리를 느끼면서도 일에 종사할 수는 있겠지요. 저 역시 창조과학을 신봉할 때에는 그랬으니까요. 그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는 저자의 시선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만약 그들 중 단 한 명이라도 지적설계나 창조과학이 주장하는 이론만으로 공식적인 학계에서 인정받는 논문을 내고 여러 학회에서 그 내용이 발표가 되어 무신론, 유신론을 떠나 냉철한 과학적인 입장에서 받아들여진다면 모를까요. 


(6)-2: 31페이지 상단
| 일부 유신진화론을 지지하는 성경 신학자들은 결국 신구약을 통틀어 중요하게 제시되는 아담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인정하더라도 애매한 해석을 할 수밖에 없다. |
 >>> 그렇다면 저자가 속해 있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근본주의적 신앙을 견지한 신학자들은 아담의 역사성과 의미에 대해 확고한 해석을 하고 있는가요? 창세기 1-2장에 하나님은 아담을 흙으로 지으십니다. 저는 이 문장에서 '흙'에 강세를 두지 않고 '지으십니다'에 강세를 두고 읽습니다. 사람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신학적 메시지로 받아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흙이 아닌 모래로 지으셨다 하더라도 저의 믿음은 달리지진 않을 것입니다. 또한 이 문장은 하나님의 즉각 창조를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태어난 사람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으신가요? 우린 모두가 엄마의 난자와 아빠의 정자가 합쳐진 단 하나의 줄기세포인 수정란에서 시작하여 발생과정을 거쳐 세상에 태어나지 않나요? 발생생물학을 배우게 되면 마치 거기엔 신의 개입은 전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적절한 시간과 공간에 적절한 신호가 주어져서 적절한 세포들이 분열하고 이동하고 분화하면서 점진적으로 사람의 모습을 띠게 됩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은 발생과정이 만드는 산물일까요? 아니면 이 글을 쓰는 저나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하나님의 창조물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둘 중 하나를 택할 필요가 있을까요? 하나님이 발생과정을 주관하셔서 정확한 시공간에 정확한 세포의 탄생과 분열과 이동과 분화를 인도하셨다고 해석하는 게 과학도 신학도 놓치지 않는 바람직한 해석 아닐까요? 그러나 이런 것이 쉽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바입니다.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전성설이라는 과학도 아닌 유사과학이 사람들을 휘어잡고 있었으니까요. 전성설이란 엄마 배 속에서 수정란이 발생하여 사람이 되는 과정 없이 정자나 난자에 사람의 미니어처가 들어 있어서 크기만 커져 태어난다고 했던 말도 안 되는 이론이었답니다. 


(6)-3: 53페이지 하단
| 요컨대, 다윈의 진화론은 존재하는 다양한 생물 종의 발전 과정을 나름의 상상력을 동원해 잘 정리해 놓은 이론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윈의 상상력이라는 한계를 크게 벗어날 수 없으며, 그러하기에 여러 가지 모순되고 미흡한 점을 노출한다. |
 >>> 제가 후기에서 언급했듯이 과학자의 예측은 문학적 상상력과 다릅니다. 전자는 증거에 기반한 합리적인 추론이고, 후자는 아무런 근거 없는 주관적이고 논리에 맞지 않아도 되는 생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다윈이 후자로 종의 기원을 썼다면, 그 책의 명성이 지금까지 전해질 리가 없습니다. 다윈이 독재자이고 세상 모든 과학자들이 그를 추앙하는 사람이라면 모를까요. 다윈의 진화론이 내포하는 예측들은 어떤 과학자도 인정할 합리적인 증거에 기반한 것이었습니다. 예측은 예측이기에 당연히 시대적인 문제 때문에 불완전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떤 과학적인 이론이나 논문도 완벽한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학은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며 더 합리적이고 더 구체적이고 더 많은 것들을 설명할 수 있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답니다. 그러나 이런 불완전함 혹은 미흡함 때문에 최선의 설명을 무시하거나 거부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반지성적인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6)-4: 92페이지 중간
| 보통 '창조과학'을 포털에 검색하면 '사이비 과학'이라고 나온다. 그런데 이때 '사이비'의 의미는 과학으로서 전혀 가치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말은 곧 주류가 아니라 아니라는 의미다. 이 시대 주류 과학은 진화론을 토대로 해야 했기 때문에 진화론을 인정하지 않는 모든 과학은 비주류, 즉 사이비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분류는 진화론을 인정하는 측에서 정한 것이기 때문에 대중들은 창조과학을 반과학이나 비과학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도 엄연히 자신들의 견해에 대하여 정밀하고 객관적인 과학적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으며, 실제로도 창조과학 분야를 연구하고 연구한 내용들을 게재 (publish)함에 있어서는 어느 분야보다도 훨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
 >>> 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말을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재미있는 건 마지막 문장에 각주가 달렸는데, 자세히 보니 전 세계 과학자들이 내는 논문이 아니라 '한국창조과학회'의 사이트를 참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 단락을 읽으며 애처롭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6)-5: 123페이지 하단
| 창세기의 창조 기사는 실제 하나님께서 태초에 이 세상에 이루신 '역사'를 다룬 책이기에, 우리는 우주의 시작을 유일하게 역사적 사실로 기록한 그 책을 단지 세상 사람들과의 소통을 이유로 비유나 상징으로 전환해야 할 이유가 없다. |
 >>> 저자는 지속적으로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강요하고 그것만이 올바른 해석 방법이라 믿는 듯합니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 계속해서 발견되는 과학적 사실과 사회, 문화적 현상들을 계속 무시하면서 기존에 가졌던 성경 해석을 고수하는 것만이 성경을 대하는 바른 자세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6)-6: 56페이지 상단 & 127페이지 중간 & 131페이지 하단 & 144페이지 하단
| 인간과 하등한 생물들이 어느 한 부분에 가서는 공통 조상을 두고 있다고 주장한 것들은 성경이 말하는 바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내용들이었기에, 기독교는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
& | 진화론을 인간의 창조와 발전 과정에 직접적으로 적용했을 때, 인간의 특별성과 탁월성이 더하여지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이 원숭이와 별반 다를 것이 없으며, 더 나아가 인간이 무기물과도 존재론적으로 차이가 없기에, 우리는 그 존재론적 가치가 하락하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
& | 그러나 진화론자들에게 아담은 결코 그러한 완성된 수준에 도달한 인물이 아니었다. |
& | 인간이 가장 진화한 동물이라고 주장되고 있는 가운데, |
 >>> 저자는 인간이 가장 고등한 생물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존재론적 가치는 특별성과 탁월성에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첫 사람 아담을 완성된 수준에 도달한 인물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창세기 1-2장에는 이런 문장이 전혀 적혀있지 않습니다. 모두 해석일 뿐이지요. 아마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과 창세기 1:27-28에 의거한 해석일 것입니다. 그러나 생물학에서는 인간이 가장 진화한 생물이라는 결론을 내린 적이 없습니다. 인간이 가장 진보한 생물이라는 데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하등한 생물과 고등한 생물을 나누는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어디까지나 인간 중심적인 해석일 뿐입니다. 인간이 우월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동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을까요?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은 보호하고 섬기라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우월하다는 개념이 무엇인지도 모호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도 해석이 하나가 아닌 줄 압니다. 또한 인간이 진화의 최종 단계에 와 있는 생물이라는 생각은 틀렸습니다. 진화는 어마어마한 시간에 걸쳐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시점에서 보면 모든 종, 모든 생물은 완전한 개체이기도 하지만, 거시적인 시점에서 보면 모든 생물은 여전히 진화 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생물에는 다양성이 존재합니다. 그 다양성은 DNA의 변이로 생성되는 것이며,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환경에 따라 분포가 점진적으로 달라지게 되면서 진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자가 주장하는 아담의 완전성은 생물학적으로 근거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으며, 과학이 아닌 신학적 해석의 영역에 있다고 보입니다.


(6)-7: 142페이지 중간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윈의 진화론'이 천문학과 지질학과 생물학을 아우르는 절대적인 법칙을 제공하고 있다는 세계관을 강요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분명 불합리한 일일 수밖에 없다. |
 >>> 이 문장은 유신진화론을 본격적으로 비판하기 직전에 쓰인 것입니다. 앞서 후기에서도 언급했듯이 저자는 유신진화론을 진화절대주의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그 어떤 과학 이론도 절대적이지 못합니다. 뉴턴의 중력법칙도 거시 우주를 다룰 때에는 맞지 않다고 합니다. 하물며 생물의 진화를 연구하는 진화론이 절대적일 리가 있겠습니까. 저자의 오류는 유신진화론이 불확실하며 논리적 모순을 가지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말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고 해석하여 믿자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모든 과학 이론은 불완전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과학 이론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새로운 과학 현상과 이론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 되게 성경 해석을 수정해 나가는 것만이 시대를 막론하고 영영히 남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믿는 방법이 아닐까요. 


(6)-8: 149페이지 중간 & 하단
| 그러나 안타깝게도 진화를 명확하게 증거할 만한 중간 단계의 화석이 발견된 적은 없다. |
& | 물론 진화론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화석이 없는 것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화론자들이 화석을 워낙 신뢰하기 때문에 그것을 예로 들어 질문하는 것뿐이지, 실제로 우리가 궁금한 것은 현재 생물 종 안에 반드시 중간 단계의 종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화석에서도 발견된 적 없는 진화의 중간 상태의 생물 종이 실제 세계에 있을 리는 만무하다. |
 >>> 있습니다. 중간 단계의 화석. 지긋지긋한 주장이라 여기선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중간이라는 말은 무한하기 때문에 잘 사용해야 합니다. 두 점이 생기면 중간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중간이 발견되면 미지의 중간이 또 생겨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또한 화석에 의지하는 방법은 구시대적입니다. 이젠 분자생물학적인 기법이 동원되어 화석이 하지 못했던 많은 일들을 하고 있답니다. 이 책에는 안타깝게도 화석 얘기에 머물고 있군요. 더 안타까운 사실은 중간 단계의 종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고리 종이 무엇인지 공부해 보시길 부탁드립니다.


(6)-9: 211페이지 타이틀 & 223페이지 중간
| 유신진화론은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를 부인한다. |
& | 당연히 우리는 유일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과 권위의 말씀을 통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단번에 (once for all)', '완전히 (perfectly)' 창조하셨다는 사실에 전혀 의심할 이유가 없다. 이전까지 무의 개념이었던 세상에, 시간과 공간과 차원을 만드신 이가, '오직 그의 말씀만으로', '완전한' 창조를 이루셨다는 사실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
 >>> 위에 옮긴 문장만 봐도 '완전한 창조'라는 저자가 옹호하는 성경 해석에 해당됩니다. 창세기 1-2장을 아무리 읽어 봐도 '완전한'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거든요. '단번에'라는 말도 나오지 않습니다. 모두 해석인 것입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엄마 배 속에서 일어나는 사람의 발생 과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사람은 수정란에서 시작해서 단번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놀랍도록 정교한 프로그램에 의해서 열 달 동안 엄마 배 속에서 사람의 형태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자가 여기서도 문자주의적 성경 해석만을 고집하고 있으며 그것만이 올바른 성경을 향한 자세라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단번에 창조하는 방법만을 저자는 왜 강조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저자가 18세기 사람이라면 전성설을 옹호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까지 하게 됩니다. 그리고 완전하다는 단어의 정의도 모호합니다. 도대체 완전과 불완전의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 역시 전적으로 해석에 달린 문제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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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디 다양한 견해들을 성경에 근거해서 판단하는 가운데, 각자가 가진 신앙 양심에 의존하여 가장 성경적인 결론을 선택하기 바란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가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과학이나 이성보다 위에 있는 성경의 진술, 하나님의 진술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우리의 모든 인간적인 주장과 사유들은 침묵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론은 과학이나 문학, 혹은 철학에 있지 않다. 우리의 모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론은 성경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부디 이 책이 서로에 대한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하기보다는 성경적 창조론자들과 유신진화론자들 간의 '건전한 대화'의 교두보가 되기를 바란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진화론 문제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찢어지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해 주는 가운데 하나가 되어 갈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원한다. |
 >>>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성경의 진술', '하나님의 진술', '성경'은 문자주의적 해석을 말하는 듯합니다. 과학은 한 번도 성경 해석에 도전장을 내민 적이 없습니다. 과학만능주의자들이나 그런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저는 과학 역시 하나님이 만드신 학문이라 믿습니다. 과학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계획을 더 깊고 풍성히 깨닫게 도와주는 도우미 역할을 하리라 저는 믿습니다. 성경과 과학 중 과학을 버려야 성경을 수호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이분법으로 나누고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는 풍토가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한다고 저는 봅니다. 그리고 이 책이 '건전한 대화'의 교두보가 될 것 같지 않습니다. 이 책 덕분에 근본주의 기독교 혹은 창조과학을 저는 더 부정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저자가 말한 대로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서로를 잘 알아야겠지요. 먼저 배우고 경청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입니다. 창조과학에서 늘 회자되던 이야기를 정리해서 이 책에 사용한 것만 봐도, 유신진화론이라는 용어의 무분별한 사용만 보더라도 저자에게서 그런 자세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부디 진화를 사실로 인정하고 그것이 내포하는 의미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속해서 믿을 수 있는 신학적 해석을 더 연구하는 신학자로 거듭나길 소원합니다. 미국에 바이오로고스라는 단체가 있고 한국에는 과신대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과신대에서 제공하는 다수의 유익한 강의들과 책들과 정보들이 많습니다. 겸손한 자세로 하나씩 배워나가는 방법이 그 시작으로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창조과학에 물들어 있다가 그것의 한계를 보고 회심한 여러 신학자와 과학자들의 얘기도 들어보시길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그렇게 해서 요원하기만 했던 대화가 부디 가능해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한국 교회의 건강한 미래도 어쩌면 이런 움직임으로부터 시작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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