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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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음'의 문체


최은영 저,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읽고


서양고전문학을 선호하는 나는 한국소설도 꾸준히 읽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려면 베스트셀러 위주로 이미 입소문 난 책들을 먼저 살피게 된다. 최은영 작가는 수년 전부터 '쇼코의 미소', '내게 무해한 사람'으로 이미 주목받는 차세대 한국 현대소설가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책 소개를 보고는 읽지 않으리라 마음먹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모두 단편집이었기 때문이다. 단편이 주는 의도적인 불친절함과 불가피한 아련함 (혹은 무책임함)보다는 복잡하고 장황하더라도 깊고 풍성함으로 긴 시간 푹 빠져들 수 있는 장편을 나는 사랑한다. 참고로 나에게 큰 영향을 끼친 고전문학은 한결같이 장편이다. 나는 책으로부터 여러 방 잽을 맞는 것보다 묵직한 어퍼컷 한 방을 기대한다. 그리고 벽돌책의 매력은 그것을 깨본 자만이 알 수 있는 비밀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2년 전 '밝은 밤'으로 최은영이 다시 회자되었을 땐 미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구해서 읽었다. 역시 단순한 이유였다. 장편이었기 때문이다. 읽고 나서 감동했다. 그리고 뜻밖이었다. 여느 한국소설처럼 기발하고 특별하고 신기한 사건이나 상황이 전제되지 않은, 어찌 보면 뻔한 인생을 써 내려간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뻔하지 않게 개별성에서 보편성을, 평범함에서 비범함을 자연스럽게 끌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고전문학에서 내가 느끼던 것과 비슷한 인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다짐했다. 최은영의 다음 작품이 나오면 그것이 단편집일지라도 꼭 읽어보겠노라고.


작년에 출간된 이 책은 일곱 편으로 구성된 단편집이다. 이미 모두 다른 지면에 실린 글들을 모아 한 권으로 묶은 것이다. 연작 소설도 아니고 독립적인 이야기를 가진 단편 모음이다. 보통 단편집은 가장 먼저 소개되는 글이 대표작인 경우가 많다. 이 단편집도 그랬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라는 작품은 첫 단편의 제목이자 이 책 전체의 제목이기도 하다. 


작가 지망생 화자의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인 이 작품은 늦깎이 대학원생일 때 만난 한 강사에 대한 기억과 그녀가 남긴 흔적들을 돌아보며 현재 자신의 위치를 객관화하여 성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제는 사라져 버린 그 강사가 화자에겐 희미한 빛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녀를 따라가고 싶었다. 그 방향이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없고, 목적지가 어딘지,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도 몰랐지만, '나'는 그녀처럼 그저 더 가보고 싶었던 것이다. 어느덧 과거 그녀의 위치에 와있는 '나'는 여전히 그 희미한 빛을 쫓아, 동시에 희미한 빛이 되어, 그녀를 종종 떠올리며 하루를 살아간다. 단편소설의 한계이자 그것의 고유한 매력을 아련함에서 찾는 나는 옛 기억의 회상, 그리움, 그리고 그것이 이루는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를 바라보는 것을 글로써 써내는 데에 침착한 최은영의 문체가 적격이라는 생각이다. 


두 번째 작품 '몫'과 다섯 번째 작품 '파종'에서도 글쓰기에 관련된 소재가 중요하게 활용된다. 한편 거의 모든 작품에서 크고 작게 다뤄지는 주제는 여성이 중심에 놓인 사회적 약자의 삶과 그 삶에 대한 연민, 그리고 그들을 짓밟고 이용해 먹는 자들을 포함한 사회 구조에 대한 고발이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서는 젊은 여자 강사를 대하는 학생들의 무례함을 잠시 언급하는 반면, '몫'에서는 그러한 문제를 전면에 등장시킨다. 이야기의 흐름이 'A여자 대학교' 학생들에게 가해진 집단 폭력, 'B대학교 대학원'에서 일어난 교수 성희롱 사건,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남편을 죽여야 했던 여자들과 그렇게 살인을 해야 아내가 살 수 있는 사회구조의 잔인함에 대한 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세 번째 작품 '일 년'에서는 주로 남자들로 이루어진 정규직 사원들과 함께 일 하게 된 일 년 계약 인턴의 비참한 현실을, 네 번째 작품 '답신'에서는 가부장적 아버지의 폭력성과 미성년자 여자아이를 성 노리갯감으로 삼는 학교 선생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그 폭력에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가슴 아픈 현실을 폭로한다. 


'파종'에서는 이혼을 경험한 여자와 그녀의 딸이 살아가는 상처 입은 삶을 그리기도 하지만, 그들의 삶에 개입하여 직접적인 도움이 되어주는 한 사람의 인생과 그가 죽고 남긴 흔적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남은 모녀에게 희망으로 앞날을 비추는 모습도 잔잔하게 보여준다. 


여섯 번째 작품 '이모에게'에서는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받은 여자들의 상처와 더불어 자신을 돌봐주었던 이모의 육아와 훈육방침에 대한 화자의 해석이 실망, 애정 없음, 차가움에서 사랑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독립된 인생과 성숙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한 여자의 삶을 그려낸다. 


마지막 작품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에서는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남의 집에서 길러져야 했던 한 여자의 기구한 인생을 소개하면서 두 딸을 포함한 그 누구에게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평생을 겉도는 그녀의 삶을 비추며 먹먹한 가슴으로 부끄러움에 대해 고찰하게 만든다.   


이런 주제들로 모아진 글이다 보니 아무래도 책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는 침울한 편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어둡지는 않다. '밝은 밤'에서 느꼈던 최은영이 가진 문체의 '밝음'이 낳은 효과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주제를 다루는 방법이 진부하지 않으면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어 작품을 읽어나가기가 어렵지 않다. 그래서 나는 한강 작가의 글이 깊고 무거워 읽기 부담되는 독자에게 최은영 작가의 글을 권하고 싶다.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나는 최은영 작가의 글에 좀 더 무게가 실리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진다. 여성이 중심에 놓인 글만이 아닌 다른 주제를 다루는 이야기도 도전해 보면 좋겠다는 바람과 함께 말이다. 그러면서도 최은영 작가만이 가진 '밝음'의 문체가 멈추지 않고 고유하게 빛나기를 기대한다.


*최은영 읽기

1. 밝은 밤: https://rtmodel.tistory.com/1408

2.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https://rtmodel.tistory.com/1747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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