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밤 슈테판 츠바이크 소설 시리즈 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원당희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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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이 벗겨지는 순간

슈테판 츠바이크 저, ‘환상의 밤’을 읽고

여기 우물에 갇힌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상류계층에 속한 예비역 장교이자 사교계에서 존경받는 신사다. 동시에 그는 현재 권태에 빠진 불감증 환자이기도 하다. 어느 날 그는 그가 사는 공간이 진공 상태라는 진실을 보게 된다. 살아있으나 죽어있는 상태로 부유하는 자신의 일상이 가면 무도회장이라는 진실을 깨닫게 된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빨간 알약을 먹고 현실에서 막 깨어난 것처럼. 

환상의 밤, 예기치 못하게 훅 들어온 낯선 세상. 그러나 그 세상은 존재하지 않던 세상이 아니라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 봉인된 채 숨겨지고 잊힌 세상이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이른 나이에 받은 넘치는 유산으로 인한 부유함이 그의 내면 자아를 허영과 가식으로 병들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가 얻은 건 부와 명예, 그리고 나른한 안락함이었지만, 잃은 건 인간적인 자아, 참된 자신이었다. 회고록 형식을 따르는 이 작품 속 현재 화자는 그날, 그 환상의 밤을 잊지 못하고 그에게 각인된 기억에 의지하여 글을 써내려 간다. 환상의 밤은 그의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작품에서 소개된 환상의 밤은 다분히 이성에서 감정으로 치닫는 전환의 순간으로 그려진다. 그 밤은 이성이 아니라, 운명이라 부를 수도 있는 즉흥과 우연이 지배하는 시간으로 채색되기 때문이다. 작품 속 화자는 그날 벌어진 사건 가운데 열병에 취한 듯 분노와 탐욕과 쾌감을 느끼며, 생명의 잠재력과 뜨거운 열정을 넘어 삶의 기쁨을 되찾고, 너무나 인간적이고 참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감정을 느끼고 표현/분출할 수 있는 자신의 모습, 체면이라는 허울 아래 묻혔던 자신의 모습과 조우하게 된다. 

남들과 다르다는 우월감, 그 허세와 허영은 나름대로의 이성에 기반한 합리적인 삶을 조장하는 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에 맞춰 살아야 할 것만 같은, 소위 우물 안의 질서에 따라 살아가게 된다.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렇게 우아하지만 맹목적으로 휩쓸려 사는 삶을 영혼 없는 삶으로, 죽은 삶으로 그리고 있다. 환상의 밤은 화자의 죽은 영혼이 봉인을 해제하며 소생하는 시간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말하는 환상의 밤이 철저하게 우연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는 그 예측할 수 없는 우연이 가져온 도박 같은 모험을 선택하는 화자의 심리가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읽는 동안 마치 내 마음인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이성을 거뜬히 넘어서서 삶을 압도하는 그 순간, 그 혼란의 순간, 마음 한 펀에는 위험에 뛰어드는 무모함을 인지하는 이성적인 자아가 있고, 또 다른 한 편에는 전신을 마비시키며 생명까지 거는 도박 같은 모험을 감행하고 싶어 하는, 우연과 미지의 것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에 이끌리는 또 다른 자아가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작품 속 화자는 후자를 선택한다. 그 결과 그동안 참된 자신으로부터 도피해온 스스로의 모습을 보게 되고, 수치와 죄책을 느끼게 되며, 정직성과 진실성에 눈을 뜨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 환상의 밤, 그에게는 일생일대의 전환이 일어났던 것이다.

작품 속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전혀 맛보지 못했던 황홀경이 내게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이는 우연성이 고분고분 내 도전에 복종한다는 몰아적인 기쁨과 환희를 의미했다.’ 아, 그 기분! 그 위험천만한 순간! 악마의 유혹 같기도 하고 신의 계시인 것 같기도 한 그 느낌! 살면서 우린 이런 순간을 적어도 한 번쯤은 경험하게 된다. 어느 쪽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인생이 송두리째 뒤바뀔 수도 있다. 환상의 밤은 저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며 우리들의 모든 삶에 침투하고 있는 실재인 것이다. 이런 순간이 찾아오면, 부디 작품 속 화자처럼 평소 불가능했던 도약을 감행하여 내가 몰랐던 나를 발견하고 온전한 나로 남은 인생을 살 수 있길 기대할 따름이다. 

감정에 천착한 듯해 보이는 슈테판 츠바이크. 그는 이성에 매몰된 인간들의 의식세계에 감정이라는 폭탄을 던진 것처럼 보인다. 이미 기울어진 배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반대쪽으로 치우쳐야 하는 법이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감정에 천착한 이유 역시 나는 여기서 찾는다. 감정이 이성보다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감정도 인간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영역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온전하고 건강한 인간성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라고. 이는 인간의 본성을 도스토옙스키와는 다른 각도로 공략하여 후벼 파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글을 계속해서 읽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슈테판 츠바이크 읽기
1. 감정의 혼란: https://rtmodel.tistory.com/m/1608
2. 환상의 밤: https://rtmodel.tistory.com/m/1615

#세창미디어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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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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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룰루 밀러 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고

하마터면 책을 덮을 뻔했다. 미리 읽은 친구들의 권고가 아니었다면, 나는 정말 이 책을 책장에 도로 꽂아 두던지 중고책으로 팔아치웠을 것이다. 무려 절반을 읽었을 때까지도 몰랐다. 지금까지 수백 권의 소설을 읽어왔음에도 예측하지 못했다. 이야기가 이런 반전으로 급박하게 진행될 줄은. 

에필로그를 보아 하니 이 구성은 처음부터 치밀하게 짜여진 저자의 설계였던 것 같다. 저자 스스로가 이 책의 탄생 배경을 캐럴 계숙 윤의 ‘자연에 이름 붙이기 (Naming Nature)’라는 분류학 책에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직관에 의해 경도된 관행 (혹은 신념)이 가진, 눈에 보이지 않지만 무시할 수 없는 힘을 폭로하고 고발한다. 제목이 바로 그걸 직접적으로 대변해준다. 나도 그랬지만, 아마도 많은 독자들은 제목이 무슨 의미일까 궁금해하며 주위에서 하도 유명하다고 하니까 이 책을 손에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 가서야 비로소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원제는 ’Why Fish Don’t Exist’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한국어 번역에서는 Why를 빼먹었다. 이는 아마도 영문 제목이 의문형이 아니라 하나의 구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Why (왜)라는 단어를 어떻게든 살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지’ 정도면 어땠을까? 어색하긴 하지만, 한국어 제목처럼 단순 평서문이 아니기 때문에 적어도 이 구가 쓰인 주 문장의 주어와 동사가 궁금해지는 효과를 낼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원제에서 생략된 주어와 동사는 ‘I know’가 아닐까 한다. 맨 앞에 ‘Now’를 하나 넣어주는 것도 좋겠다. 그러면 원제는 마침내 마침표를 가지고 이렇게 된다. ’Now I know why fish don’t exist.’ 그렇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이 책의 한 축은 저자의 회고록 형식을 따르는 깨달음의 여정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엔 몰랐지만, 이젠 알게 된 과학적 사실, 그 진리에 대해서. 

한편, 제목이 만약 ‘Why do fish not exist?’처럼 의문문이었다면, 저자의 깨달음을 담아낼 수 없게 된다. 답을 몰라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을 만큼 도전적으로 느껴진다. 물론 ’Do you know why fish don’t exist?’라고 할 수는 있었겠다. 하지만, 책을 다 읽어 보면 저자의 목소리는 독자에게 묻지 않고 덤덤하게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고기 (어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학적 사실을 알고 한동안 충격의 도가니에 빠져 있기도 했고, 사람들의 직관에 의한 관행에 맞서 싸웠던 여러 과학자들의 실의를 목도하기도 하면서 저자의 목소리는 높은 피치가 아닌 분명 낮은 음으로 발성되었을 것이다. 저자의 목소리에는 실망과 허망함과 답답함과 체념이 묻어 있다. 저자가 책에서 말하듯이 ‘사람들은 결코 편안함을 진실과 맞바꾸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한 자는 누구나 그런 심정이 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이 책의 또 다른 축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과학자의 일생을 존경어린 마음으로 살펴보다가 돌연 그의 숨겨진 진실을 마주하게 되고 정반대의 심정으로 변화되는 저자의 여정이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거의 모든 물고기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과학자로서의 블루오션을 누리며 업적을 쌓아나갔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 그는 우생학의 신봉자였고, 나치의 독일이 아닌 세계 경찰 국가 미국이라는 나라 안에서 우생학의 악한 뿌리를 견고하게 내리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쌓은 사회적 지위가 가지는 권위를 악용하여 정치적인 폭력을 휘둘렀다. 과학자라는 가치중립적인 전문가 타이틀을 팔아먹으며 우생학이 마치 생물학이 밝혀낸 비밀스러운 진리인 것처럼 만들어 사람들을 선동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입김과 정치적 힘으로 인해 제정된 법 때문에 수많은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들이 생명을 잃거나 불임화를 당하게 된다. 게다가 그는 그를 어렵게 만들었던 한 사람을 죽게 만들기도 했다. 사고사를 가장한 살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살인 혐의로 끝내 피소되지 않는다. 

추앙했던 사람이 희대의 악마 같은 사기꾼이자 경도된 이념주의자로 전락하는 과정 (혹은 처음부터 그의 내면에 있던 악마가 점점 더 발현되어 결국 그를 삼키는 과정)을 옆에서 목도하는 기분은 과연 어떤 맛일까?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밖의 분기학적인 과학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여정만큼 충격적이진 않았을까? 

이 책의 두 축은 물고기 (어류)에서 모인다. 저자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게 가하는 복수는 치명적인 외통수다. 두 축의 접점의 존재 자체를 거짓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 그것은, 적어도 내게는, 데이비드의 인생 전체를 거세시킨 효과를 내는 것 같았다. 아마도 이 부분에서 짜릿함을 느낀 독자는 나밖에 없진 않았을 것이다.

책을 덮고 생각한다. 같은 과학자로서 과학자의 기본 자세를 다시 떠올려본다. 인간의 본성과 심리를 떠올려본다. 사람이 얼마나 쉽게 이념 혹은 신념에 경도될 수 있는지 생각해본다. 상당히 의미 있는 책을 읽었다는 생각이다. 다시 한 번 끝까지 이 책을 읽게 조언해준 친구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그리고 우생학이 여전히 잠재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모든 곳에 정의가 실현되고 소수자와 약자들이 복원되는 역사가 있길 기원한다.

#곰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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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혼란 - 지성 세계를 향한 열망, 제어되지 않는 사랑의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서정일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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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무엇에 이끌리는가

슈테판 츠바이크 저, ‘감정의 혼란’을 읽고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는 말에서 물어야 할 건 ‘언제’이다. 우리는 언제 이성적일까? 

우리는 생각한 대로 살아갈까? 아니면 살아왔던 대로 살아갈까? 이성은 습관을 이길 수 있을까? 이길 수 있다면 왜 우리의 오늘은 과거의 지배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는 걸까? 과연 인간이 이성적이라는 말은 옳은 걸까?

이성이 지배하는 세상은 예측과 통제가 가능한 시공간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적어도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지배하는 건 이성이 아닌 듯하다. 우리의 세상은 늘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세상 뿐만이 아니다.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건 한 세상을 이해한다는 것과 동의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불가능에 가깝다. 사람은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한 존재이다. 고로 세상은 물론 사람도 이성의 지배를 받진 않는 것 같다. 영향을 끼칠 수 있을뿐 이성은 지배력이 약한 듯하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는 말은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한다. ‘인간은 이성을 사용할 수 있으나,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동물’, 혹은 ‘인간은 아주 가끔 이성적일 수 있는 동물’, 혹은 ‘인간은 이성의 사용을 선택할 수 있으나 대부분은 그러지 않는 존재’라고.

한편 ‘저 사람은 감정적이야’라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아마도 인간이 이성적이라는 전제를 진리로 가정하기 때문에 생긴 반동적인 결과일 것이다. 틀린 전제에서 도출한 명제가 옳긴 어렵다. 그러나 저 명제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감정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이성과 감정의 줄다리기에서 우리의 대부분의 일상은 과연 어느 쪽으로 치우쳐 있을까? 이성이 이기지 못하는 습관을 이루는 중추는 혹시 감정이 아닐까?

편하고 익숙한 것을 따라 살아가는 삶. 곧 습관이 지배하는 삶이다. 그것이 설사 어떤 기준에 부합하지 않아 수정되어야 한다고 이성적으로 판단이 된다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그 이성의 목소리를 따르지 않는다. 이성이 요구하는 것들은 도전으로 다가오고 에너지를 소비해야만 하는 애씀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약간의 손해를 볼 뿐 살 만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군중에 묻혀 익명성에 따라 살아가는 구름처럼 허다한 사람들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나도 당신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편하고 익숙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성보다는 감정이 지배하는 행동 양식에서 비롯되는 것 아닐까? 옳고 그름도 중요하지만, 이성을 따르면 더 건강하고 균형잡힌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데까지는 동의하지만, 그래도 나는 불편하고 생소한 삶 속으로 내 삶을 밀어넣고 싶지 않겠다는 최종 결정은 아무래도 감정의 영향 탓일 것이다. 일단 결정은 그렇게 해 놓고, 그것이 얼마나 나름대로 일리가 있고 틀리지 않은지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어쩌면 우리가 가진 이성이 가장 활발하게 작동하는 건 아닐까? 결국 이성은 감정의 뒤처리를 담당하는 역할에 머물진 않을까?

물론 성급하게 일반화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감정이 우리 인간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며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감정적’이라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넘어 반드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사실 감정적이라는 단어는 부정적일 수 없다. 감정은 이로 인해 억울한 누명을 쓴 것처럼 보인다. 인생의 전반전을 마치고 후반전을 살고 있는 내 눈에 비친 인간과 인간의 삶은 다분히 감정적이다. 이성이 아닌 감정이 지배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더 많은 것 같다. 그래서 해가 갈수록 나는 감정의 누명을 풀어주고 싶어 진다. 이성이라는 가면 안으로 숨지 않고 솔직한 인간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그로부터 다시 모든 것을 사유하고 해석하고 싶어 진다. 인간이 이성적이라는 대전제에 저항하고 싶어 진다.

억누를 수 없는 감정. 주체할 수 없는 마음. 제어할 수 없이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 오르는 욕망. 흔히 말하는 ‘운명’이라는 단어도 이성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한다. 운명을 믿지 않는 사람도 언젠간 운명적인 만남이나 사건을 부딪히게 된다. 이성을 가뿐히 넘어서는 그 무엇. 머리를 통과하지 않고 가슴을 울리는 그 무엇. 우리는 살면서 한 번쯤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시기를 만나기도 하고, ‘새로운 나’로 거듭나기도 한다. 이런 중요한 변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무게중심은 이성이 아닌 감정에 있지 않을까 한다. 이성으로 아무리 수긍해도 결국 나의 무거운 육체를 움직이게 하는 힘은 감정이 동반될 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종 이성의 수긍 없이도 감정의 동요만으로 우린 우리 몸을 움직이기도 한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첫 저서를 읽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내가 사랑하는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평전을 썼다고 해서 알게 된 작가이다. 그러고 보면 그를 알게 된 것도, 일차 저작을 읽고 나면 이차 저작까지 섭렵하고 싶어지는 내 욕망에 따른 결과다. 19세기말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작가로 활동하다가 부조리한 세상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 망명한 브라질에서 아내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당대 최고의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 책 머리에 적힌 바에 따르면, ‘그의 작풍은 인간의 데모니슈, 즉 인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감정들에 대한 이야기를 탁월한 심리묘사를 통해 그리고 있는 것들이 많다’고 한다. 이 작품 ‘감정의 혼란’ 역시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고도로 지성적이지만 이성의 힘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과 충동에 이끌리는 인물들의 심리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감지할 수 있고, 또 그것을 찾고 향유하려는 본능을 가진다. 심미적인 성향은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일 것이다. 아름다움의 정의는 사람마다 그리고 상황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누구나 살다 보면 심미적 체험을 하게 되고 그것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된다는 점은 보편적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롤란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대학을 가서도 방탕한 삶을 살던 롤란트는 예상치 못한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방문에서 뜻밖에도 첫 번째 심미적 체험을 갖는다. 당시 그는 한 여자와 하숙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버지는 많은 말씀을 하지 않으셨고, 그 절제와 배려는 롤란트에게 감동을 불어넣는다. 논리와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뜻밖의 도약을 감행하게 된다. 향락에 찌든 자신의 방탕한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거기로부터 나와 정신적인 것에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옮긴 학교에서 롤란트는 우연히 셰익스피어 강의를 듣게 되고, 뜻하지 않은 두 번째 심미적 체험을 하게 된다. 그 강의를 하던 교수의 진정성 깃든 열정이 롤란트의 눈과 귀를 열게 된다. 이후 그 교수와의 친밀한 관계가 이루어지고 롤란트는 문학의 세계로 깊숙이 빠져든다. 그것은 지적 호기심에 의한 회심이 아니었다. 교수에 대한 순수한 흠모와 그 교수를 통해 보게 된 문학의 아름다움이었다. 학문의 문외한이었던 롤란트는 심미적 체험을 통해 학문에 눈을 뜨게 되었던 것이다.

롤란트는 행복했다. 새로운 삶은 그에게 삶의 의미를 찾게 해주었다. 남들이 뭐라고 해도 개의치 않았다. 하숙집까지 교수가 사는 집의 윗층에 얻은 후 그는 매일 같이 교수와 시간을 보낸다. 학문의 깊이와 넓이는 맛보게 된다. 

몇 주 후, 하루 정도는 쉬라는 교수의 말에 순종하며 교수를 만나기 이전으로 잠시 돌아간다. 책을 내려놓고 강으로 수영을 하러 나간다. 거기서 어쩌다가 날렵하게 물을 가르고 나아가는 한 여자를 제치고자 힘을 다해 보지만 실패하고 마는 롤란트. 그는 그녀에게 매력을 느낀다. 예전처럼 작업을 걸게 된다. 그런데 이게 어인 일일까. 그녀는 그가 어디에 사는지 알고 있었다. 오늘도 저녁에 올 거냐고 묻는 것이었다. 아뿔싸. 그녀는 교수의 아내였던 것이다. 롤란트는 또 한 번 감정의 혼란를 겪는다.

그날 저녁 롤란트는 여느 때처럼 교수와 함께 저녁을 함께 하러 간다. 교수에게 어떤 비난을 들어도 좋다고 각오까지 했다. 교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교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교수가 갑자기 사라진다. 그렇잖아도 그에게 다정한 눈길과 보살핌과 가르침을 주었던 교수는 종종 그에게 쌀쌀한 태도를 보이는 등 롤란트가 느끼기에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던 차였다. 또한 교수와 그의 아내 사이에 흐르는 벽 같은 단절에 이상함을 느끼던 차였다. 롤란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롤란트는 마치 버려진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어떻게 말 한 마디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는 것인가. 그동안 가장 다정하게 지내던 사람인 자기에게조차! 롤란트는 처음 교수에게 반하던 때와 정반대의 감정의 혼란을 겪는다. 롤란트는 결국 일탈을 하게 되고 육체를 탐닉하던 그 시절의 모습으로 잠시 돌아간다. 그리고 교수의 아내와 하룻밤을 같이 하게 된다. 

다음 날 롤란트는 죄책감에 온몸을 부르르 떤다.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날 준비를 한다. 그때 마침 교수가 갑자기 돌아온다. 차마 교수에게 자초지종을 직접 말할 수 없었다. 편지를 하겠다고 했더니 교수는 제대로 작별해야 한다며 대화를 하자고 한다. 롤란트의 마음은 이미 무너졌다. 어찌할 바를 몰라 온몸을 떨며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표정으로 드러내고야 말았다. 눈치를 챈 교수는 이것저것 묻다가 아내가 그 이유인지 묻게 되고, 롤란트는 부인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고야 만다. 놀랍게도 교수는 태연했다. 젊은이가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롤란트는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이 혼란스러움은 약과였다. 

교수에게는 비밀이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고 말할 수 없었던 비밀을 롤란트는 그날 밤, 교수와의 마지막 날 밤 듣게 된다. “나도… 나도 자네를 사랑하고 있네.”

교수는 어릴 적부터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였다. 그는 지금까지 지킬 박사로 살 때는 저명한 교수로, 하이드로 살 때는 비밀스러운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어두운 거리를 다녀왔다. 그가 갑자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며칠간 떠났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교수에게는 롤란트가 순진무구한 사랑으로 자기에게 다가온 나날들이 너무나 가슴 벅찬 시간이었다. 그러면서도 롤란트를 보호하기 위해 쌀쌀맞게 대하고 모진 말을 건네곤 했던 것이다. 자꾸만 터져나오는 자기 안의 하이드를 물리치기 위하여, 그 하이드로부터 롤란트를 보호하기 위하여, 오해 받을 것을 감안하면서도 그렇게 해야만 했던 것이다. 롤란트는 그렇게 다시 한 번 감정의 혼란을 겪게 된다. 

이 작품 속에서 소개되는 이야기는 롤란트가 겪는 수 차례의 감정의 혼란을 위주로 전개된다. 모두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들은 노년의 교수가 된 롤란트의 기억에 선명하게 각인된 사건이 되었다. 우리의 삶 가운데에도 이런 일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우리의 기억을 이루고 있는 중추는 이성이 아닌 감정, 그중에서도 감정의 혼란이 자리하고 있진 않을까. 때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로, 때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계기로, 때로는 한 사람과의 작별을 감당할 수밖에 없는 사건으로 기록되는 것이다. 그때 그때마다 이성 역시 한 박자 늦지만 활발하게 작동한다. 이미 벌어진 그 감정의 혼란이 가져오는 트라우마를 해소하고 재해석하고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말이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인간의 본성 깊숙한 곳에 도스토옙스키와는 다른 결로 다가간 작가라는 생각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인간은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존재다. 인간은 신비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 작가를 만남으로써 나는 인간이라는 한 세계를 조금이라도 더 깊고 풍성하게 알기 위한 좋은 길잡이를 하나 더 발견한 기분이다. 전작 읽기를 시도해야 할 작가가 또 하나 생겼다.

#녹색광선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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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 - 털보 과학관장이 들려주는 세상물정의 과학 저도 어렵습니다만 1
이정모 지음 / 바틀비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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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고수의 생활 밀착형 과학 에세이

이정모 저,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을 읽고

생활 밀착형 과학 에세이다. 여기서 생활이란 정치, 문화, 사회, 경제가 섞여있는 우리들의 평범한 일상을 말한다. 그래서 과학을 전공한 것과 상관없이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또한 이 책은 누구나 경험하고 누구나 궁금해하지만 정확한 과학적 사실이 아닌 카더라 통신에 의한 미신, 무속, 관습, 편견으로 점철된 비과학적 지식을 타파하는 역할도 톡톡히 해낸다. 미신처럼 믿어왔던 오래된 오해가 풀리고 무속과 편견에서 벗어나 마침내 과학적 진리로 자유함을 얻는 기쁨도 만끽할 수 있다. 부디 이 책을 우리 시대의 고지식한 어르신들이 읽고 꼰대의 우물에서 벗어나는 역사가 일어나길 소망한다. 

덧붙여, 독자가 아닌 작가의 눈에 읽힌 이 책은 수십 편의 잘 써진 글을 읽을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한다. 이 책의 저자 이정모는 글쓰기 고수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은 작가다. 같은 내용을 이런 식으로 써낼 수 있는 작가는 아주 드물기 때문이다. 읽는 내내 내 마음속에선 존경심과 부러움이 일었다. 저자의 다른 책들도 살펴봐야겠다.

#바틀비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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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삶의 음악
안드레이 마킨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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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웅의책과일상 270번째 감상문입니다. Yay!**

삶: 그림과 음악, 그리고 글

안드레이 마킨 저, ‘어느 삶의 음악’을 읽고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야 하는 글이 있다. 휘몰아치는 서사 위주의 (흔히 ‘페이지 터너’라 불리는) 작품을 선호하지 않는 나는 언젠가부터 문장이 갖는 무게를 중시하게 되었다 (물론 이 무게는 주관적인 해석의 산물이다). 문장의 무게는 그 문장이 담아내는 사건이나 상황의 무게에 있지 않고, 그 사건이나 상황을 바라보고 해석하고 글로 써내는 작가의 시선과 내면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동일한 것을 보더라도 누군가는 기계적인 묘사에 급급한 글을 써내는 반면, 다른 누군가는 그 ‘순간’을 담아내는 글을 쓴다. 여기서의 ‘순간’이란 공감각적인 통찰의 반영이며, 그래서 고유하고 정확한 글을 요구한다. 그것은 즉흥적이라기보다는 관찰과 성찰을 거친 진한 열매일 때가 많고, 작가 내면에 웅크리고 있던 무엇인가가 마침내 그 상황으로 인해 표출된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무게를 가지는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는 그 작가만의 색 (사상이나 관점 혹은 세계관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으리라)을 갖기 마련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작가의 글을 좋아한다는 말은 곧 그 작가의 시선과 내면에 암묵적으로 동조한다는 표현과 다르지 않다. 어떤 글을 읽고 그 작가의 다른 작품이 읽고 싶어지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자극적인 사건이나 충격적인 상황 등으로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나는 이런 글을 ‘가볍다’고 표현한다) 글과 거리가 아주 먼 작품을 만났다. 가만히 멈추게 하고 가끔 책을 덮고 허공을 응시하게 만드는 이런 작품을 나는 사랑한다. 처음 들어보는 작가의 짧은 작품. 다 읽고 나면 글이 아닌, 그림과 함께 음악이 남는 작품. 누군가에게는 무미건조하기만 할 텍스트가 독자로 하여금 ‘보게’ 하고, 또 ‘듣게’ 하는, 이 오묘한 작품. 기억이 가지는 특유의 흐릿함에 묻어가며 표현되는 주인공 알렉세이 베르그의 기묘한 삶은 읽는 이에게는 잔잔한 향수의 옷을 입고 있지만, 가히 절망적이고 치열했던 한 개인의 서사다. 

숙청 대상으로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도망치던 그날은 공교롭게도 그의 피아노 연주가 계획된 이틀 전이었다. 그는 부모님이 잡혀가는 걸 두 눈으로 목격했고 본능적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피아니스트로 살 수 없게 된 피아니스트 알렉세이 베르그. 그는 전쟁 중 죽은 어떤 군인의 정체성을 입고 그 사람이 되어 살아간다. 피아노 건반 위에서 행복했던 그는 전쟁의 참사로 인해 구부지고 터지고 꺾인 시체들 위를 걷게 된다. 그러한 기구한 나날들을 뒤로하고 어느날 피아노 앞에서 그는 그동안 숨어지내던 자신의 경계를 풀어버리는 사건을 만나게 된다.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 숨어있던 피아니스트의 정체성이 자유함과 함께 분출한 순간이었다. 그로 인해 그는 수용소 생활을 해야 했고, 그 치열하고 허망했던 시절을 이 책의 화자에게 들려준다. 

깊은 겨울날 우랄 지방의 어느 기차역에서 우연히 듣게 된 알렉세이 베르그의 삶. 그의 삶은 그림이었고 또 음악이었다. 그러나 소설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서만 자신을 드러내는 화자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그 그림도 음악도 눈보라에 휩싸인 채 조용히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지난 밤의 꿈처럼 화자의 글을 매개하여 들려온 어느 음악가의 삶. 어느 삶의 음악. 책을 덮고 사뭇 숙연해진 나는 글에 감사하게 된다. 베르그의 그림 같은, 음악 같은 삶을 존재하게 해준 화자의 글에 감사를 표하게 된다. 나도 그런 소중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984BOOKS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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