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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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룰루 밀러 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고

하마터면 책을 덮을 뻔했다. 미리 읽은 친구들의 권고가 아니었다면, 나는 정말 이 책을 책장에 도로 꽂아 두던지 중고책으로 팔아치웠을 것이다. 무려 절반을 읽었을 때까지도 몰랐다. 지금까지 수백 권의 소설을 읽어왔음에도 예측하지 못했다. 이야기가 이런 반전으로 급박하게 진행될 줄은. 

에필로그를 보아 하니 이 구성은 처음부터 치밀하게 짜여진 저자의 설계였던 것 같다. 저자 스스로가 이 책의 탄생 배경을 캐럴 계숙 윤의 ‘자연에 이름 붙이기 (Naming Nature)’라는 분류학 책에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직관에 의해 경도된 관행 (혹은 신념)이 가진, 눈에 보이지 않지만 무시할 수 없는 힘을 폭로하고 고발한다. 제목이 바로 그걸 직접적으로 대변해준다. 나도 그랬지만, 아마도 많은 독자들은 제목이 무슨 의미일까 궁금해하며 주위에서 하도 유명하다고 하니까 이 책을 손에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 가서야 비로소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원제는 ’Why Fish Don’t Exist’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한국어 번역에서는 Why를 빼먹었다. 이는 아마도 영문 제목이 의문형이 아니라 하나의 구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Why (왜)라는 단어를 어떻게든 살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지’ 정도면 어땠을까? 어색하긴 하지만, 한국어 제목처럼 단순 평서문이 아니기 때문에 적어도 이 구가 쓰인 주 문장의 주어와 동사가 궁금해지는 효과를 낼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원제에서 생략된 주어와 동사는 ‘I know’가 아닐까 한다. 맨 앞에 ‘Now’를 하나 넣어주는 것도 좋겠다. 그러면 원제는 마침내 마침표를 가지고 이렇게 된다. ’Now I know why fish don’t exist.’ 그렇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이 책의 한 축은 저자의 회고록 형식을 따르는 깨달음의 여정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엔 몰랐지만, 이젠 알게 된 과학적 사실, 그 진리에 대해서. 

한편, 제목이 만약 ‘Why do fish not exist?’처럼 의문문이었다면, 저자의 깨달음을 담아낼 수 없게 된다. 답을 몰라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을 만큼 도전적으로 느껴진다. 물론 ’Do you know why fish don’t exist?’라고 할 수는 있었겠다. 하지만, 책을 다 읽어 보면 저자의 목소리는 독자에게 묻지 않고 덤덤하게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고기 (어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학적 사실을 알고 한동안 충격의 도가니에 빠져 있기도 했고, 사람들의 직관에 의한 관행에 맞서 싸웠던 여러 과학자들의 실의를 목도하기도 하면서 저자의 목소리는 높은 피치가 아닌 분명 낮은 음으로 발성되었을 것이다. 저자의 목소리에는 실망과 허망함과 답답함과 체념이 묻어 있다. 저자가 책에서 말하듯이 ‘사람들은 결코 편안함을 진실과 맞바꾸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한 자는 누구나 그런 심정이 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이 책의 또 다른 축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과학자의 일생을 존경어린 마음으로 살펴보다가 돌연 그의 숨겨진 진실을 마주하게 되고 정반대의 심정으로 변화되는 저자의 여정이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거의 모든 물고기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과학자로서의 블루오션을 누리며 업적을 쌓아나갔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 그는 우생학의 신봉자였고, 나치의 독일이 아닌 세계 경찰 국가 미국이라는 나라 안에서 우생학의 악한 뿌리를 견고하게 내리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쌓은 사회적 지위가 가지는 권위를 악용하여 정치적인 폭력을 휘둘렀다. 과학자라는 가치중립적인 전문가 타이틀을 팔아먹으며 우생학이 마치 생물학이 밝혀낸 비밀스러운 진리인 것처럼 만들어 사람들을 선동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입김과 정치적 힘으로 인해 제정된 법 때문에 수많은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들이 생명을 잃거나 불임화를 당하게 된다. 게다가 그는 그를 어렵게 만들었던 한 사람을 죽게 만들기도 했다. 사고사를 가장한 살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살인 혐의로 끝내 피소되지 않는다. 

추앙했던 사람이 희대의 악마 같은 사기꾼이자 경도된 이념주의자로 전락하는 과정 (혹은 처음부터 그의 내면에 있던 악마가 점점 더 발현되어 결국 그를 삼키는 과정)을 옆에서 목도하는 기분은 과연 어떤 맛일까?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밖의 분기학적인 과학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여정만큼 충격적이진 않았을까? 

이 책의 두 축은 물고기 (어류)에서 모인다. 저자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게 가하는 복수는 치명적인 외통수다. 두 축의 접점의 존재 자체를 거짓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 그것은, 적어도 내게는, 데이비드의 인생 전체를 거세시킨 효과를 내는 것 같았다. 아마도 이 부분에서 짜릿함을 느낀 독자는 나밖에 없진 않았을 것이다.

책을 덮고 생각한다. 같은 과학자로서 과학자의 기본 자세를 다시 떠올려본다. 인간의 본성과 심리를 떠올려본다. 사람이 얼마나 쉽게 이념 혹은 신념에 경도될 수 있는지 생각해본다. 상당히 의미 있는 책을 읽었다는 생각이다. 다시 한 번 끝까지 이 책을 읽게 조언해준 친구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그리고 우생학이 여전히 잠재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모든 곳에 정의가 실현되고 소수자와 약자들이 복원되는 역사가 있길 기원한다.

#곰출판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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