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페스트』, 민음사(김화영 譯), 2011.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만 29년, 짧고도 긴 생애 속에서 유년시절부터 책을 사랑하고 독서 중독자였던 나도 책을 ‘일’로서 만나니, 정말 읽기 싫더라.
역시 독서란 ‘자발적 선택’과 ‘의지’에서 야기될 때 가장 효용성이 좋다는 것을 , ‘자발성’이 ‘능동적 독자’를 만든다는 그 진리를 새삼 실감했다.
(학교교육에서 수동적인 독자로서 성장해 온 대다수의 아이들에게 왜인지 미안함을 전하며...흠흠)
여튼 ‘독서퀴즈’를 출제해야 하는 마감 기일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아, 책을 읽기 시작한 지 약 사흘만에 책을 완독했고, 완독 후에 2020년 3월 11일, TVN에서 방영된 설민석의 <책 읽어드립니다> 페스트편 강독을 시청했다.
완독 후 해당 편을 보니 더욱 정리가 잘 되어 퀴즈문항 출제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정기 고사는 아니지만 퀴즈가 9월 초 예정되어있다보니 출제 문항은 추후 공유하겠습니다. 한국 문학은 출제를 많이 해보았지만 서양 고전을 시험 형식의 독서퀴즈로 출제하려니 힘들었어요 ㅠ-ㅠ)
사설은 이쯤하고, 이제 본격적인 나의 알베르 카뮈가 7년에 걸쳐 쓴 그의 역작 『페스트』에 대한 간단한 단평을 하고자 한다.
우선 페스트가 지배하는 오랑 시의 시민들이 ‘수인(囚人)’으로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다는 비유에는 정말 그 자체로 깊은 공감이 되어 명문장이로다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의사 리유부터 랑베르, 장 타루, 조제프 그랑, 파늘루 신부, 카스텔(노의사), 코타르 등등 정말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나는 결국 카뮈의 이 작품에서 발견한 주요 메시지가
‘일상적 영웅’의 존재와 ‘공감과 연대의식’을 통한 공동체 구축, 그리고 여기에서 한발짝 더 나아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를 통한 도덕적 각성과 부조리에 대한 저항이라고 여겼다.
세상의 찬사와 존경, 명예를 바란 것이 아니라 그저 이 시대에 의사로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매일같이 페스트로 사망하는 환자들을 보면서 소명을 다한 의사 리유(이자 중요한 깨달음을 얻고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작품의 서술자), 시청의 말단 서기이지만 페스트 시대에도 예술을 놓지 않았고, 보건대에서 자신이 할 일을 묵묵히 듬직하게 수행했던 조제프 그랑, 처음에는 오랑 시의 이방인으로서 어떻게든 아내와 재회하기 위해 오랑에서 빠져나가고자 했지만 리유의 사정을 이해하고 보건대에 합류하고, 심지어 그로서는 가장 중요한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오랑에 남는 선택을 했던 신문기자 ‘랑베르’, 그리고 그 누구보다 가장 질병으로서의 페스트 뿐 아니라 내면에, 그리고 외부 세계에 도처해 있는 가해자로서의 페스트의 위치를 간파하고 페스트의 피해자들에게 ‘공감’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모색해 나간 타루. 그들 하나하나가 분명히 ‘성실성’을 갖추고 묵묵히 나아가는, ‘일상성을 갖춘 영웅’이라 여긴다.
세월호 때 주저없이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물속으로 들어간 민간 잠수사분들, 메르스사태때와 코비드 시대에 자신의 소명을 다하는 의료진, 시시각각 변하는 코로나 단계를 주시하고 교육 현장에서 학생 지도와 상담, 온라인 수업을 준비하는 교사들........ 그들 모두가 한국 사회에, 우리 주변에 늘 함께하고 있는 존재인 것처럼 말이다. 작은 선이 모여 큰 힘을 낳을 수 있다는 데 깊이 동감한다.
그렇다. 인간이 소위 영웅이라는 것의 전례와 본보기를 세워 놓고 싶어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반드시 이 이야기 속에 한 사람의 영웅이 있어야 한다면, 서술자는 바로 이 보잘것없고 존재도 없는 영웅, 가진 것이라고는 약간의 선량한 마음과 아무리 봐도 우스꽝스럽기만 한 이상밖에는 없는 이 영웅을 여기에 제시하고자 한다(민음사, 184쪽.).
“즉,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성실성의 문제입니다. 아마 비웃음을 자아낼 만한 생각일지도 모르나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성실성이 대체 뭐지요?” 하고 랑베르는 돌연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일반적인 면에서는 모르겠지만, 내 경우로 말하면, 그것은 자기가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민음사, 216쪽.)
“그렇지만 말입니다. 나는 성인들보다는 패배자들에게 더 연대 의식을 느낍니다. 아마 나는 영웅주의라든가 성자 같은 것에는 취미가 없는 것 같아요.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그저 인간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민음사, 332쪽.)
실제로 소설 『페스트』는 알베르 카뮈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의 프랑스 점령 사태를 겪으며 경험한 내용을 글로 옮긴 것으로부터 세상에 나올 수 있었는데, 결국 페스트가 카뮈가 처음 의도했던 ‘전쟁’으로 읽히건, 코비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생명’을 위태롭게 하고 자유를 앗아가는 ‘코로나’로 읽히건, 중요한 지점은 우리가 우리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우리를 살인하려고 애쓰는 부조리한 폭력의 ‘가해자’들에게 맞서기 위해서는, (인물들이 ‘어린아이의 고통스런 죽음’을 보고 깨달았듯이) 현실에서 무리하게 도피하거나 부정하지 않으며 각성을 통해 현실문제를 수용하고 일상을 살아가는 개개인 간의 연대를 통해 함께 공동선을 추구해야 한다는 지점이다.
카뮈가 경험했던 나치의 폭력이 만연했던 그 시대, 많은 사람들이 연대하지 못했기에 함께 깊은 절망과 인류가 파괴되는 결과가 있었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좋지 않을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괴벨스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같은 존재가 되지 않아야 하겠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전략)그래서 나는 인간의 모든 불행은 그들이 정확한 언어를 쓰지 않는 데서 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정도를 걸어가기 위해 정확하게 말하고행동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재앙과 희생자가 있다고만 말할 뿐, 그 이상은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중략) 그래서 나는 어느 경우에는 희생자들 편에 서서 그 피해를 되도록 줄이기로 마음먹는 것입니다. 희생자들 가운데서 나는 적어도 어떻게 하면 제3의 범주, 즉 마음의 평화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탐구할 수는 있습니다.”
타루는 이야기를 맺으면서, 다리 한쪽을 흔들다가 테라스 바닥을 가볍게 탁탁 치는 것이었다. 잠시 동안 묵묵히 있던 의사는 몸을 약간 일으키면서 타루에게, 마음의 평화에 도달하기 위해서 걸어야 할 길이 어떤 것일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물론 그건 공감이죠.” (민음사, 330-331쪽.)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서 참으로 아름다웠던 장면으로, 장 타루와 리유가 함께 밤에 몰래 해수욕을 즐기던 묘사부분을 꼽고 싶은데, 잠시나마 ‘해수욕이 금지된’ 억압과 구속의 현실 속에서 그들이 함께 해수욕을 즐기며 ‘우정’을 나누고 진심어린 연대가 가능했던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자유’이자 ‘저항’이 아닐까.
“그들은 옷을 벗었다. 리유가 먼저 물에 몸을 던졌다. 처음에는 차갑던 물이, 다시 떠올랐을 때는 미지근하게 느껴졌다. 몇번 평영을 하고 나니, 그날 저녁 바다는 여러 달을 두고 축적된 열을 대지로부터 옮겨 받아 아직도 가을 바다의 따뜻한 온도를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규칙적으로 헤엄을 쳤다. 발을 풍덩거릴 때마다 그의 뒤에는 하얀 물거품이 남고, 두 팔을 따라 흘러내린 물이 다리로 흘렀다. 무겁게 풍덩 하는 소리로 타루가 뛰어든 것을 알았다. 리유는 물 위에 드러누워서 움직이지 않고 달과 별들로 가득 찬 하늘을 바라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쉬었다. 그러자 밤의 침묵과 고유 속에서 물 튀기는 소리가 신기하게도 점점 뚜렷하게 들려왔다. 타루가 가까이 오자, 이윽고 그의 숨소리까지 들렸다. 리유는 몸을 뒤집어서 자기 친구와 나란히 같은 리듬으로 헤엄을 쳤다. 타루는 그보다 더 힘차게 전진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좀 더 속력을 내야 했다. 몇 분동안 그들은 같은 리듬, 같은 힘으로 세상을 멀리 떠나, 단둘이서 마침내 도시와 페스트에서 해방이 되어서 전진했다. 리유가 먼저 멈추었다. 그리고 그들은 천천히 되돌아왔다. 다만 도중에 한순간, 그들은 얼음처럼 싸늘한 물결을 만났다. 그들 두 사람 다 그러한 바다의 기습에 겁을 먹은 듯 아무 말도 없이 서둘러 헤엄쳤다.
그들은 다시 옷을 주워 입고, 말 한마디 입 밖에 내지 않은 채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그들은 똑같은 심정이었고, 그날 밤의 추억은 달콤한 것이었다. 멀리 페스트의 보초병이 보일 때 리유는, 타루도 역시 자기처럼, 페스트가 조금 아까 잠시 동안이나마 우리들을 잊고 있어서 좋았는데 이제 또다시 시작이군, 하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민음사, 334-335쪽.)
특히 작품의 마지막 문장은 깊이 있는 각성을 독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바로 우리가 이러한 불의와 폭력의 세계에 대한 비판을 망각하고 다시금 그저 우리가 누리는 이 ‘평화의 상태’가 언제고 지속되는 불편하는 세계라고 여기며 그 가치를 망각하고 경계를 느슨히 할 때, 그 오만과 방종으로 인해 다시 어떤 형태로든 ‘페스트’가 도래할 수 있다는 지점이다. 지금 전세계에 그것이 바로 ‘코로나19’로 왔지만 지금 한국사회의 저 반대편에 아프간이나 중동지역에는 끊임없는 전쟁과 폭력이 일어나고 있듯이. 우리 사회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페스트>는 지구 전 세계에 어떤 형태로든 다시 나타나며, 함께 이 거대한 불의와 폭력에 맞서기 위해 지구촌 공동체가 연대해야 한다고 여긴다.
재독때는 다른 판본을 읽어봐야겠다.
“입 다물고 침묵하는 사람들의 무리에 속하지 않기 위하여, 페스트에 희생된 그 사람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기 위하여, 아니 적어도 그들에게 가해진 불의와 폭력에 대해 추억만이라도 남겨놓기 위하여, 그리고 재앙의 소용돌이 속에서 배운 것만이라도, 즉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는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사실만이라도 말해두기 위하여, 지금 여기서 끝맺으려고 하는 이야기를 글로 쓸 결심을 했다.”
그래도 그는 이 연대기가 결정적인 승리의 기록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기록은 다만 공포와 그 공포가 지니고 있는 악착같은 무기에 대항하여 수행해 나가야 했던 것, 그리고 성자가 될 수도 없고 재앙을 용납할 수도 없기에 그 대신 의사가 되겠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개인적인 고통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수행해 나가야 할 것에 대한 증언일 뿐이다.
시내에서 올라오는 환희의 외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리유는 그러한 환희가 항상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기쁨에 들떠 있는 군중이 모르는 사실 즉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그 균은 수십 년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있다가 아마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서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음사 401-402쪽.)
<침묵이라는 폭력 >
마르틴 니묄러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