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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가족놀이 ㅣ 스토리콜렉터 6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로드 / 2017년 2월
평점 :
(R.P.G(2011년 출간)의 개정판입니다)
한참 온라인 게임에 빠져있을 땐 길드도 만들고, 유저들과 채팅도 하면서 게임 안 또 다른 사회의 매력에 빠져있었던 적이 있었다. 마냥 즐거웠다고는 할 수 없는 게, 게임이라는 하나의 공통점으로 모이긴 했지만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은 당연히 있다. 그로 인해 사소한 다툼도 일어나고, 종종 욕설이 오가는 채팅창을 보기도 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가상의 사회이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점점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을 때, 발을 빼고 그 사회에 작별을 고했었다.(다른 게임으로 갈아탔지) '게임'이라는 가상공간에서 파생되어 나온 또 다른 작은 사회는, '게임'이 없어지거나 유저가 관두면 대부분 끝이 난다. 하지만 그 작던 사회가 '게임'이라는 틀보다 커졌을 땐 가볍게 넘길 수 없어진다.
미미 여사의 「가상 가족놀이 R.P.G」에서도 채팅 공간에서 만들어진 가상 가족이 등장한다. 도코로다 료스케라는 40대 남자가 신축빌라 공사 현장에서 살해된 채 발견된다. 그리고 그보다 며칠 일찍 변사체로 발견된 여대생 이마이 나오코도 그와 관련된 인물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그는 평범한 회사원이자 세 가족의 가장이었지만, 인터넷상에서 '아버지'라는 닉네임으로 가상의 가족을 만들어 채팅도 하고 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그의 가상 가족은 '어머니', 아들 '미노루', 딸 '가즈미' 이렇게 3명이다. 경찰이 그들을 취조실로 불러 심문하는 동안 그곳을 볼 수 있는 매직미러를 통해 그의 친딸 도코로다 가즈미가 그 상황을 지켜보게 된다.
가상의 세계에선, 현실세계에서 할 수 없는 말과 글로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요즘은 꼭 채팅이 아니더라도 SNS 등의 활동을 하며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런 가상 세계의 장점은 잘 이용하면 삶의 활력소가 될 수 있지만, 반대로 단점이 커지게 되면 그 악영향은 현실에 반영되어 최악의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범죄같은....) 도코다로 료스케 역시 현실에서 만족하지 못한 점들을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사회에서 찾아 나섰고, 그것이 가상 가족을 만들게 된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모든 것에 만족하며 살진 않는다. 가상 현실은 그것에 대한 보충은 해줄 수 있지만 어느 정도 선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가상 가족'은 그 선을 훨씬 뛰어넘는 소재이기에 충격적이다. '가상 가족'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현실의 가족에 대한 불만족을 의미하는 것이다. 게다가 '가상'의 공간이기 때문에 나 자신의 실제 모습이 아닌 가짜 내 모습을 쉽게 보여줄 수도 있고, 그런 행동과 돌아오는 반응에 대해 매력을 느끼고 빠져들 수도 있다. 선을 넘어선다면 어떤 위험으로 변할지 모르는 그런 세계에서 실제 가족에선 얻지 못하는 가족애를 느꼈다고 한다면, 소름끼친다. ('실제 가족에선 얻지 못하는'이라는 말 자체에 엄청난 위화감ㄷㄷ)
원래는 일본에서 2001년에 출간된 책이라서, 읽기 전에는 PC 채팅이라는 구식 소재에 약간 거부감을 느꼈다. 메일보단 스마트폰 채팅 앱에 익숙해져 있는 요즘, 젊은 세대가 보면 (특히 학생들) 더더욱 올드함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믿고 보는 미미 여사이고, 재미도 없는데 개정판으로 나왔을 리 없다는 내 생각은 적절했던 것 같다. (ㅋㅋ)
각설하고, 시대가 변해도 달라지지 않는 것은 가족 간의 갈등이다. 2001년에는 나 역시 사춘기 소녀였고,(아련) 아버지와의 갈등이 빈번하던 시기이다. 그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한 인물에 대해서만 공감하는 바가 컸을 것이다. 16년이 지난 2017년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의 나는, 이 책의 모든 인물들의 생각에 공감할 수 있을 만큼 자란 것 같다. 가상현실에 대한 지식은 물론 지금껏 살아온 삶에 대한 지식도 나름 쌓였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덜 큰 30대 ㅜ)
세상이 내 중심으로 돌던 10대에서, 모든 사람은 저만의 세상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지금, 이 책은 단순하지 않은 굵은 통뼈가 있는 사회파 미스터리이다. 가장 작은 단위의 사회이지만 가장 중요한 사회인 '가족'과 그 구성원들 하나하나에 대해 나름 되새겨보게 한다. 가상 가족의 등장이 흥미로웠고, 심문 과정에서 그들의 모습이 애처로웠다. 실제 나의 모습을 감춘 채 거짓된 모습을 만들어내어 대리 만족을 하는 우리의 모습이 애처로웠다.
p.95
"난 이제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그냥 너무 화가 나요. 어머니나 내게 불만이 있겠지만, 그런 불만은 우리도 있었고, 우리 몰래 그런 짓을 하면서 우리가 어떤 심정일지 생각해본 적은 없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