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풍론도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남희 옮김 / 박하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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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언제부터인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신작들은 연례행사의 하나처럼 되어버렸다. 계속 찾아 읽자니 크게 끌리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마냥 외면하자니 그래도 게이고인데 하는 찝찝함에 1년에 1권씩은 읽게 되는 것 같다. 출간 즉시 일본 베스트셀러 1, 매 일주일 만에 100만 부를 돌파한 경이의 기록! 에 굳이 마음이 혹하지 않더라도 찾아 읽을 셈이었는데 은색의 광활한 설원을 배경으로 가공의 생물병기를 쫓는 충격의 레이스라는 소재가 이 겨울에 잘 어울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먼저 읽은 독자들의 평은 전반적으로 임팩트가 부족하다는 실망조의 의견들이 많아 기대치를 좀 낮추기로 했다. 

 

눈이 내린 어느 스키장에 한 남자가 무엇인가 눈 속에 묻고 있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남자는 다이호대학 의과대학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이 연구소에서는 유전자 조작으로 백신이 들지 않게 된 탄저균을 ‘K-55'라는 생물병기를 비밀리에 생산하고 있었는데 승인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신을 해고한 소장에게 보복하기 위해 ‘K-55'를 몰래 훔쳐 이 스키장의 어느 곳곳에 묻어 버린 것이었다. 숨긴 곳에 있는 너도밤나무에 테디 베어를 걸어둔 뒤 소장에게 사진을 찍어 3억 엔을 요구하는 메일을 보내 협박한다. 비밀리에 개발한 생물병기를 세상에 탄로나는 것이 두려웠던 소장은 만년 선임 연구원인 구리바야시 가즈유키를 블러 대책을 논한다. 

 

섭씨 10도 이상이 되면 보관 용기가 깨어지면서 공기 중에 노출되면 탄저균에 의한 대살상이 벌어질 절대 절명의 위기, 숨겨둔 장소가 미궁에 빠지면서 구리바야시는 ‘K-55'를 회수하기 위하여, 스노보드 마니아인 중학생 아들에게 사실을 감춘 채, 함께 일본 내의 스키장을 탐문하다 어렵사리 그곳이 사토자와 온천 스키장임을 알아낸다. 그러면서 정규 코스가 아닌 활주 금지 구역만을 뒤지다 부상을 입게 된 구리바야시는 구조요원인 네즈와 프로 스노보더 치아키에게 신약을 찾는다는 거짓말로 둘러대고 대신 테디 베어를 찾아 나서도록 부탁한다. 그리고 누군가 이들의 주변을 맴돌며 생물병기를 선점하기 위한 은밀한 작전이 펼쳐지는데. 

 

사실 스키나 스노 보드에 관한 지식이 전무한, 나 같은 문외한에게 소설 속 관련 장비나 기술에 대한 용어는 생경하다 못해 동선이 쉽게 상상되지 않는 어려움이 있지만 최소한의 이해만으로도 나름 흥미진진했다. 그것은 구조요원인 네즈와 프로 스노보더 치아키의 관계가 이전에는 어떠했을지, 그리고 이후에는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궁금증을 자아내게 할 정도로 테디 베어를 찾아나서는 여정에 활력을 불어 넣기 때문이기도 하다. 치아키라는 캐릭은 확실히 매력적이었다. 분명 자기색깔을 가지고 있는 주체적인 여성인 동시에 네즈 앞에서 만큼은 다른 모습을 보이기에 양면의 색깔은 어느 경우를 보더라도 지속적인 관심을 유지하게끔 만드는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악당이라는 치명적 약점은 이야기의 전체적인 축을 느슨하게 만든다. 초반에 생물병기를 숨긴 악당이 허무하게 죽는 바람에 생긴 문제이다. 죽지 않고 계속 살아서 지속적인 압박을 가했더라면 긴장감은 러닝타임 내내 고조되었을 텐데 반사적 이익을 노리고 새로이 개입하게 된 악당은 그 동기나 존재감부터 강인한 인상을 남기질 못하고 주변을 맴돈다. 시간에 쫓기는 것이 악당이 부여한 제약이 아니라 환경적 제약일 뿐인 것이 원래의 범인이 죽고 남은 자들끼리 벌이는 각축전에 나사가 빠진 것 같은 기분이다. 그래서 짜릿하지도 스피디하지도 않다. 두뇌게임은 생각보다 작위적이고 우연의 남발에 의지하게 되니 후반부는 쉽게 쉽게 위기에서 벗어나고야 만다. 좀 더 머릴 굴리란 말이야. 상상 이하의 반전에다 결정적으로 라스트 신은 처음부터 의도했던 바인지, 벌여놓은 판의 아이디어가 고갈된 것인지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 아님 웃기는 게 진정한 의도였나,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의, 무성의한 마무리가 아니었나 싶었다. 

 

이렇게 재미있을 줄이야! 쓰면서 나 자신도 놀랐다. - 히가시노 게이고

 

이 말, 본인이 직접 한 말은 맞나? 어쩜 저리도 천연덕스레 자화자찬을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폄하할 정도로 형편없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재미라는 측면에서 장점과 단점이 황금비율로 구축되어 있는 범작 정도에 해당되겠기에 호평과 혹평의 중간 지점에 놓일 만하다. 그래서 그의 최근작들은 대체로 이러한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좋게 말하면 무난하고 나쁘게 말하면 고만고만하다 하겠다. 그 차이가 애매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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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저어
소네 게이스케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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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다 깊숙한 곳에 가라앉아 사는 어류. 

2. 대상국의 한 시민으로 살며 명령을 받을 때만 활동하는 공작원. 

 

기서는 2번을 의미한다지만 일본어에도 중국어에도, 우리 말 사전에도 나와 있지 않다. 면 다른 나라로 이민 가서 현지 생활을 하며 나중에 고위 공직에 올라간 다음부터 적국의 스파이 활동을 시작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침저어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현직 국회의원 가운데 중국의 침저어가 있다는 첩보가 입수된다. 암호명 맥베스라고 불리는 침저어로 지칭되는 용의자는 일본의 차기 수상 후보 아쿠타가와 겐타로가 지목된다. 경시청 외사2과의 형사들은 그를 검거하기 위한 수사에 들어가지만 정보와 증거의 불충분으로 난항에 빠지게 되고 수사관 후와는 고교 동창생이자 아쿠타가와의 비서인 이토 마리로부터 아쿠타가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 내린 결론은 침저어가 아니라는 것. 증거도 확보했다.

 

 하지만 관련 정보원과 이토 마리가 잇달아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면서 후와는 적국에게 정보를 넘긴 스파이로 몰려 의심을 받게 된다. 수사에서 배제된 후와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단독수사에 돌입하지만....침저어를 나타내는 암호명 맥베스세익스피어희곡의 주인공이자 넓은 맥락에선 인간의 본질, 즉 선과 악, 진실과 거짓, 강함과 약함 등 모순으로 결정되는 인간세계의 내면이자 가치관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맥베스절대적 판단은 섣부른 오해이자 편견임을 잘 암시한 방법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외사 2과 소속 수사관들은 일본, 중국, 미국 간에 얽힌 이해관계에 따라 수사의 향방이 갈리는 첩보전의 한 가운데 놓여 있는 동시에 내부적으로 동료 간에 정보의 취합 선택을 둘러 싼 경쟁과 파벌이라는 양상을 동시에 겪는다.독단과 공조로 구분 짓는, 이 힘겨루기는 권력암투라는 또 다른 장벽을 만나게 되면서 누구를 믿고 누구를 의심해야 할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안개정국이 형성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알아내는 기술은 이들에게는 없다. 의롭지만 외롭고, 질투하며 어두운 욕망을 발현했던 맥베스가 그랬던 것처럼 철저하게 이중적인데다 모순 그 자체를 지향하게 된다. 그 와중에 신의는 땅에 떨어지거나 맹목적 믿음이 가진 어리석음,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한 나약함 등이 있을 뿐이다.

 

일단 믿되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 가공된 정보만큼 무서운 건 없다동료를 감싸 줄 의리 같은 건 없지만 파벌싸움이라는 시궁창에 발을 담글 생각 대신 온전히 수사에 필요한 일에만 적극 가담하겠다는 후와의 결심과 함께 그의 생각처럼 국가 간의 애들 스파이게임 같은 짓에 사활을 건다는 일이 얼마나 코미디같이 유치하고 허망한 것일까?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면서 천박하고 경솔한 선택을 하는 건 이념을 올바르게 공유할 수 없는 행위인 것이다. ‘고미일파에 대한 선입견도 결국엔 자신이 믿고 싶어 하는 것만 받아들이겠다는 고집에 귀를 닫은 것이 문제였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지지고 볶고 미워했던 남자지만 내 갈 길만 가련다는 자신의 방식 대신 사람들을 인망으로 불러들이는 시원시원함은 다르다.마지막까지 가신들처럼 충성을 다하는 고미의 부하직원들은 그제 서야 막연한 맹신으로 비쳐지지 않았다. 이것이 제대로 된 인간관계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많이 뭉클했다국가 간의 외교도 그러하다. 타국에 대한 이해나 배려 없이 자국의 이익에만 치중해서 무엇이라도 빼내고 이용하려는 이기심이 불행의 전조에 해당된다.

 

후와고미를 보는 관점이 뒤늦게 일부 달라졌던 것처럼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시각에서 그려지는, 소리 없는 전쟁을 읽는 대한민국 국민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넋 놓는 동안 고래싸움에 등터지는 비극이 생기지 않도록 철저한 국력배양에 힘써야 한다는 경각심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을 편들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점을 차지하고서라도 승자도, 패자도 없는 첩보전의 비정함을 드라마틱하게 다룬 흡입력 있는 스토리야말로 정말 인정해야겠다. 데뷔작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밀도 있는 전개와 구성은 실로 놀랍기만 했으니. 이번이 2번째로 만난 소네 케이스케의 이름은 분명히 각인시켜야 할 것만 같다.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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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사라지다 모중석 스릴러 클럽 13
할런 코벤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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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애를 써도 악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윌 클라인에겐 거리의 아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코브넌트의 자선사업처럼 그 자신이사랑을 필요로 했다. 한없이 평범하고 나약한 우리 주인공 윌은 믿음과 존경, 가족과 연인이면 충분했는데 언제부터인가 하나둘씩 그의 곁을 떠나며 작별을 고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11년 전, 윌이 사랑했던 여자가 죽었다. 유망한 전국구 테니스 선수이자 유일한 영웅이었던 형, 켄 클라인이 그녈 처참하게 살해한 용의자로 몰렸다. 형은 아슬아슬하게 포위망을 뚫고 어디론가 사라져서 지금까지 도피 중이다.

 

당시의 충격은 고통의 무게를 고스란히 담으면서 윌의 가족들을 주저앉게 만들었는데 살인자의 가족들은 세간의 저주와 냉대에 기진맥진해버렸으니까.  11년 전, 그가 사랑했던 여자의 죽음이라는 비극에서 완전 회복되기도 전에, 이번에는 지금 그가 사랑하는 여인이 사라졌다. 과거의 비극은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이었다. 사랑을 잃고 영웅을 잃어버린 윌에게 상처를 보듬어 줄 새로운 사랑마저 실종되어 버리니 모든 정황은 윌을 궁지로 내 몰 수밖에 없다. 살인자 형의 도주를 돕고 현재의 연인 실러마저 살해한 용감한 형제가 되어버린 윌에게 행방불명되었던 형, 켄이 살아있단 소식이 전해진다. 그리고 주변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자꾸 일어나는데 살인이 연이어 발생하며 혼돈의 중심에서 진실은 잔인한 현실 뒤에 숨어 그에게 찾으라 한다.

 

목숨을 걸고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그가 원했던 건 마음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사랑에 대한 갈구였다. 모든 것을 되돌려 시련의 늪에서 빠져나와 사랑할 수만 있다면야. 누구에게나 각자만의 영웅이 있듯 그의 영웅이었던 형이 살아있다는 소식 앞에서 우리 가족들이 알고 있는 형이라는 남자는 결코 손에 피를 묻힐 사람이 아니라고 믿고 있다. 아니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남겨진 사람들에게 치명적 상처는 독약이 될 것이니 상상만 해도 몸서리 쳐진다. 나 또한 그렇게 믿고 윌을 응원했다. 차라리 그가 죽었다면 누명을 벗을 작은 불씨마저 꺼뜨리는 게 속 편할지도 모른다. 이제 내려놓고 싶었는데 어쩌면 형이 살인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은 윌로 하여금 어떻게든 자신의 사랑과, 자신의 영웅을 동시에 찾아 나서도록 만든다.

 

그러면서 사건의 주변을 맴도는 유령과 어떤 배경은 선과 악이 왜 공존하기 어려운지를, 불분명한 실체로 다가와서는 원인과 과정, 결말에 이르는 동안 거짓과 조작은 없었는지, 우연의 일치일 가능성을 하나씩 짚어보게 만든다. 그리고 살인사건의 연결고리에는 어떠한 복선들이 숨어 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벌어질 수 있을까?의혹은 연인에게 향하면서 사랑을 잃는다는 것과 처음부터 그녀는 날 사랑하지 않았음을 뒤늦게 깨닫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끔찍한 일인지 두렵게 한다. 결코 두 사람 모두 놓치고 싶지 않았던 윌의 바람과는 달리 폭력에 한 번 물들게 된다면 희망과 경외심과 신뢰는 어디에서 보상받을 수 있을까?

 

결국 진실의 문이 열리며 드러나는 비밀은 예상 밖으로 순수하지 않다. 거짓말, 배신, 사랑 등 예측을 불허하는 각종 시나리오로 코벤의 주특기인 반전으로 이끌 때 그토록 믿고 싶었던 마음 한 구석을 잔인하게 짓밟으며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시작하여 종결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줬다. 이것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누구보다도 아프고 배신당한 쓰라림은 믿음에 대한 근본적 기준과 원칙을 깨 부수어서 나 자신이 너무도 안일한 결말을 예상하지 않았나 반성하게도 된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지르게 만든 반전의 묘미와 등장인물의 심층적 심리묘사는 하고 싶었던 말들을 놓치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나간다. 그래, 타고난 천성은 근본적으로 개선되기 어렵다. 그렇게 쉽게 변한다면 과거의 상처로만 잊혀질 일이지 다시 한 번 폭력이 범죄를 낳고, 범죄가 또 다른 폭력으로 연계될 리가 없다. 유령의 존재는 그런 만큼 특별했다. 개성강한 만큼 흥미와 속도 면에서 가속도를 높이며 사람은 양파껍질 까 듯 벗겨 봐도 그 바닥을 알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강하고 날렵하게 증명해 보인다. 그가 이번 소설의 재미를 이끈 일등공신인 셈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코벤의 작품은 읽고 나면 그 미묘함이 가슴을 싹 휘두른다. 그 여운이 길고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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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 종말의 날
더스틴 토머슨 지음, 권도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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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마야인들에 의하면 은하계의 정렬이 25천년에 한번 일어나며 20121221일에 지구, 태양계, 은하계의 중심이 일직선으로 정렬되는데 이때 지구는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고 했다. 자기장 흐름이 어쩌고 저쩌고 엄청난 압력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천문학쪽으로는 당췌 지식이 전무한 나로서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기 힘들지만 어쨌든 지구에 닥친 대재앙, 그것이 종말이라는 핵심에만 도달할 수 있었다. 그것이 더스틴 토머슨의 <12.21: 종말의 날>을 최소한이라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인터넷으로 사전검색해본 12.21.에 대한 정의였다.

 

 

세상에는 갖가지 종말론이 판을 치는 가운데 이 책을 읽게 되는 시점에서 12.21은 이미 경과된 뒤라 시의적절진 않았지만 연말연시에 세기말적 기운을 느끼기엔 부족함이 없다. 우리 문명의 위태로운 현실을 현시한다는 빈스 플린의 추천사에 인류는 언제까지 영원불멸할 것인지 대한 의문에서 출발하여 인류가 이룩해 놓은 역사와 문명이 후계구도도 없이 한순간에 몰락하게 된다면 어떤 형태로 진행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이 궁금해졌던 까닭이다. 어차피 상상의 산물이겠지만 지금도 파괴의 과정을 거쳐 공멸이라는 댓가를 져야만 하는 인류만 없어진다면.....

 

 

광우병 전문가인 게이브리얼 스탠튼은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인 CDC에 근무하고 있다. 그는 0121211LA의 한 병원에서 전화를 받는데 치명적 가족성 불면증이라고 불리는 FFI에 걸린 한 남자가 먹은 소고기와 우유 등에 어떠한 치명적인 문제점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처음엔 알코올 중독자인 줄 알았던 그 남자에게는 유전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이 화근이라도 된 것일까? 신종 전염병이 급속하게 퍼지면서 LA가 봉쇄된다. 이대로 원인을 찾기 전까지는 어떤 치료약도 없고 속수무책으로 희생자가 늘어나는 것을 방관할 수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이 닥친 것이다.

 

 

이 때 새로운 돌파구가 발견된다. 게티 박물관의 큐레이터 첼 마누는 고대 마야인들의 문서를 입수하게 되는데 그 문서에는 마야인들의 고대도시의 위치에 대한 단서가 들어있고 그곳에서 인류멸망을 막을 어떤 방편을 찾아내야만 한다. 스탠튼과 첼은 그 남자환자가 그 문서를 과테말라에서 몰래 들여왔었다는 걸 알게 된다. 모든 단서는 과테말라에서 찾아야 한다, 어떻게든 문서를 해독하여야만 하는데 그렇게 생존을 건 사투가 10일동안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마야인들의 역법대로라면 신봉자들은 인류역사를 크게 5단계로 나눈다. 지금의 인류를 4단계로 구분하여 지구상의 과학문명은 몰락하고 5단계의 인류가 나타나면서 현 인류는 멸망하게 될 거라는 이론을 펼친다.. 마치 생로병사의 단계처럼 인류는 탄생과 죽음이라는 윤회과정을 단순히 순환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노아의 방주처럼 싸그리 쓸어버리고 새로운 판으로 재창조되는 거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래서 눈을 통해 전염되는 바이러스는 타인과의 접촉만으로도 치명적인 위협이다. LA만이 아닌 전 인류의 생존과도 직결된 거대한 재앙은 현재진행형인 종말이 마침표가 되려고 하는 시점이다. 생존경쟁을 일거에 정지시킬 이 무시무시한 악몽은 흡사 헐리웃 재난영화를 보는 것 같은 속도감 있는 전개가 일품이다. 그리고 과거 번영을 누렸던 마야문명의 잃어버린 도시야말로 안식과 구원을 가져다줄 영적공간이자 신들의 분노와 저주가 함께 시작되는 공존의 공간이기도 하다. 날로 강력해지는 병원균과의 싸움에서 면역체계를 마련하는 동안 예고된 종말대로 착착 진행되지만 결국은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점이다.

 

 

이번에는 운명 앞에서 체념하지 않고 마야인들의 몰락에 담긴 비밀로 인해 확대된 공포 속에서 이성의 힘을 놓지 않았던 공로가 크다. 그러기에 고고학과 전염성 질병에 관한 의학 분야는 읽는 맛을 제대로 북돋운다. 나름 흥미진진했다. 과학 스릴러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을까? 일부 신봉자들이 마야인등의 역법을 종말이론과 결부시켰다지만 세상에 종말은 닥치지 않았다. 난 지금 잘 살고 있다. 아직 죽을 타이밍은 아닌가보다. 잠시 절박함은 일시적인 즐거움으로 남겨둘 뿐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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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엘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폴리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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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이브, 시내 중심가에서 눈꽃축제가 성황리에 열리는 현장을 뉴스로 지켜보았다. 하늘에서는 눈꽃이 흩날리고 아이들은 빙판에서 썰매를 신나게 타느라 여념이 없으며, 연인, 친구들과 포토존에서 이쁜 추억을 담기 위해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이브의 정취를 맘껏 누리고 있었다. 특정한 날이 가져다주는 행복한 순간을 즐기는 데에는 종교적 의미는 이미 퇴색되어 있지만 모두의 마음에 따듯한 외투를 둘러준다. 그렇다면 크리스마스를 뜻하는 프랑스어이자 탄생을 의미하는 <노엘>을 지금 읽는다면 그 분위기에 동참하게 될 것 같다. 미치오 슈스케라면. 그는 이미 동화풍의 소설도 낸 적이 있으니 미스터리가 아니라도 선뜻 손에 들어보게 될 것이다.

 

 

게이스케는 14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바로 동창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는데 어려서부터 글쓰기가 특기이자 취미였던 게이스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나름 유명한 동화작가 되어있다. 동창생들을 기다리던 게이스케는 야요이의 참석여부가 문득 궁금해진다. 중학생 시절 게이스케는 지독한 가난 때문에 아이들의 멸시와 학대를 당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일 때문에 늦으시는 엄마, 춥디추운 방에서 루돌프 사슴 코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이 동화창작의 출발이었다. 아이들의 구타 속에서 점차 지켜가던 그에게 한 소녀가 다가온다. 야요이라는 이름의 소녀와 친해지면서 두 사람은 이성의 감정을 조금씩 느끼게 되는데 게이스케는 글을 쓰고 야요이는 그림을 그리는 협업을 통해 둘만의 동화책으로 위안과 동질감을 나누던 두 사람은 또 다른 여자아이까지 휘말린 어떤 불행한 사건에서 오해가 발생하여 그만 절교하고 만다. 그리고 지금, 그녀 생각에 호텔 문을 나선 게이스케는 갑작스레 택시에 치어 쓰러진다.

 

 

내내 그랬던가. 게이스케와 야요이는 부모의 부재에 따른 무관심에 방치되어 있어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게이스케야 뻔한 것이고 야요이의 아버지는 엄마를 폭행하고 딸의 알몸사진을 찍는 등의 인면수심에 파렴치한이니 애초에 두 사람 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러니 다른 친구들이 외면하는 게이스케에 눈길이 자꾸 가는 야요이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자신이 행복하지 않으니 타인의 불행에 자연스런 연민이 생기 수밖에. 그렇게 둘 만의 공통 관심사로 동화책을 만들며 풋풋한 사랑을 키워나가기를 응원하고 싶었는데 인생이란 게 원래 그런 것이고 슈스케가 그냥 이쁜 사랑 하세요, 라고 배려할 사람이 아니지.

 

 

입만 놀리면서. 늘 내게 마음을 쓴다고, 배려한다면서 아무 것도 해주는 게 없다며 엄마를 원망하는 야요이의 말 한마디가 나비효과라도 불러오기라도 한 것일까? 그날의 불행한 사건에도 엄마의 무관심이 한 몫 했거니와 결과적으로 자신을 진정 믿어주지 않는 게이스케에 대한 원망이 포함된 것인지도 모른다. 야요이에게 등 돌려 절교하는 게이스케를 그저 고개만 숙인 채, 이별을 받아들여야 하는 마음은 쓰라리다. 네가 힘들 때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어 준 건 바로 나였어. 수업 중 게이스케를 깊은 눈길로 내내 응시하는 야요이의 모습은 가슴속에서 지워지지 않아 계속 맴맴 돌 듯 반복해서 읽고 또 읽어 내려갔다. 진실을 알고서는 가책을 받고 대신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었는데 너무 잔인한 설정에 심한 몰입에 빠져 버렸나 보다.

 

 

저기다. 야요이는 여전히 게이스케에게 눈길을 주고 있었다. 표정은 조금 전과 다를 바 없었다. 게이스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다른 여자애들처럼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경멸이 담기거나 야윈 개를 동정하는 듯한 어두운 눈이 아니라 야요이는 그저 차분하게 게이스케를 시야 중심에 잡아두고 있었다. - p.29 -

 

 

 

 

그래서 나는 이야기의 향방이 14년 후에 재회하게 된 그와 그녀의 용서와 화해로만 전개되지 않을까 성급한 예상을 해봤는데 그건 아니었다. 다리가 굽혀 지지 않는 장애와 엄마의 임신으로 짙은 소외감을 느끼다가 게이스케가 쓴 동화를 읽으며 상처를 극복한 리코, 은퇴 후 아내를 잃고 삶의 의욕을 잃어버려 자살을 계획하는 요자와도 게이스케의 동화에서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구원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야기가 가지 의미에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힐링이 된다는 가슴 따듯한 의도는 분명 나쁘지 않다.

 

 

그러면서 시한부 삶을 살며 투병 중인 리코의 할머니에게서는 오랜 전 돌아가신 외할머니 생각을 떠올리며 간병에 지친 자녀들의 한숨은 크리스마스는 누군가에겐 기쁨이지만 누군가에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절망이라는 현실을 직시한다. 비록 힘없고 보잘 것 없는 존재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 희망의 빛이 되고 구원의 손길이 될 수도 있다는 메시지는 잘 알겠다. 루돌프 사슴 코 이야기는 대중에게 친숙한 캐롤을 대상으로 삼아 편하고 훈훈하게 다가오지만 그 후의 동화들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따라간 것처럼 쉽사리 동화되기 어려웠다. 와 닿지 않는 이야기들을 배제하고 계속 더 몰입할만한 구도는 없었을까? 중반까지의 몰입과 상반되는 중반 이후의 이탈은 그래서 불확실한 감상만을 남긴다. 등장인물들의 사연에는 공감이 가나 해법을 이해하지 못한 아쉬움 때문에 진정한 힐링 스토리가 되기엔 많이 역부족이었다. , 뿜겠네. 그래도 올만에 읽은 슈스케의 소설인데 이러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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