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스포 킬러 - 본격 야구 미스터리
미즈하라 슈사쿠 지음, 이기웅 옮김 / 포레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4월이다. 누군가는 잔인한 달이라고도 하지만 내게는 설레임과 흥분으로 충만한 기쁨의 달이다. 그것은 내가 열렬한 야구광이라는 이유때문이고, 4월은 프로야구가 개막하는 출발점 때문이기도 하다. 프로야구 관중 700만이 목표로 설정되고 연초 승부조작 파동으로 한 바탕 홍역을 치르는 등 우여곡절이 많은 이 때에 야구를 소재로 한 미스터리 소설이 나왔다. 일본 미스터리 작가의 등용문인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에서 대상을 수상한 이 소설은 우연의 일치인지 홍보효과를 노린 마케팅 전략인지 알 수 없으나 타이밍이 절요하다. 바로 프로야구 승부조작 스캔들을 모티브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특정 팀 팬들에겐 잊고 싶은 아픈 기억을 되살려내는 이 소설은 야구와 추리의 만남을 통해 야구가 보여 줄 수 있는 다양한 이면을 끄집어내며 즐거움과 씁쓸함이 만감처럼 교차된다.

 

일본 내 최고의 인기구단 오리올스 소속의 좌완 투수 사와무라는 시합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초면의 남자에게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며 뜬금없이 폭행당한다. 차마 경찰에 신고도 못한 상태에서 선배투수의 150승 달성 기념파티에서도 다시 그 남자와 그의 패거리와 마주치면서 또 다시 당해버린다. 도무지 정체도 알 수 없고 이유로 모른 채 폭행당해 어안이 벙벙해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승부조작에 가담했다는 투서가 날아들면서 억울한 누명에 빠지게 된다. 사와무라는 의혹의 눈초릴 좀처럼 걷지 않는 세상에다 직접 결백을 증명하고자 홀로 배후를 조사하기 시작한다. 과연 선수생명과 결백을 걸고 벌이는 사투의 결말과 숨겨진 진실은?

 

이 소설 제목에서 말하는 사우스포는 좌완 투수를 일컫는 말이고 우완 투수보다 더 상대적인 희소가치를 인정받는 야구계에서 하루아침에 승부조작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여론의 뭇매 속에서 팀 내 위상도 위협받게 되었으니 이건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닌거다. 더군다나 일본 최고의 인기구단 소속이다 보니 구단고위층과 관계자는 스캔들로 인한 구단 이미지 악화차단에 우선하다보니, 장작 선수의 진심을 들어주는 것에 는 무척이나 인색하다. 진퇴양난의 위기에 옷 벗을 최악의 상황까지 내몰리는 비정한 프로의 세계가 그만큼 실감나게 그려진다.

 

자신에게 승부조작의 누명을 씌운다고 해서 누군가가 금전적인 이득도 취할 리 없거니와 어떤 대가를 노리고 이런 짓을 벌였을지 알 도리 없는 의혹 속에 도달한 진실에는 이기심과 질투 시기가 낳은 어떤 악의가 조종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바로 이 부분에서 정통 추리의 결말을 원했던 독자들에게는 많이 실망스레 받아들여질지도 모르겠다. 동기에 대해서는 야구팬들조차 깊이 공감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아니, 야구팬에 따라 다른 반응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작가도 인정했듯이 트릭은 커녕 살인조차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애초부터 일반적인 추리소설의 형식을 답습할 일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추리적 관점에서 본다면 논리와 물증 대신 심증과 정황증거에 의존한 사건해결일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어디까지나 이 소설은 야구가 주재료이고 추리는 주재료를 요리하기 위한 보조역할에 지나지 않음을 감안하여 읽어야 흥미를 붙들 수 있다. 그러니까 추리보다 야구에서 즐길 수 있는 아기자기한 요소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단 것이다, 그 중 한 가지는 사와무라의 소속구단인 오리올스가 실제 인기구단인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쉽게 연상하게 한다는 점이다. 오리올스 구단의 모기업이 신문사이며, 거대한 재력을 등에 업고 자체 유망주 육성보단 거액을 들인 FA영입, 잦은 트레이드, 성적 지상주의에 발목잡혀 우승이 아니면 감독 자리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운영방침과 횡포 등을 풍자하고 있어 실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는 이 소설을 무척이나 불쾌해했다고 한다.

 

그리고 라커룸에서 벌어지는 뒷이야기, 투수교체 타이밍, 볼 배합, 타자의 수 싸움, 2군 강등 등 실제 야구시즌 중 발생하는 일들이 해박한 야구지식과 생생한 현장감으로 인해 책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들만큼 흥미롭게 전개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백미는 후반부에 사와무라가 선수생명을 걸고 등판한 블레이저스와의 시합이다. 결과에 따라 마지막 등판이 될지도 모를 이 중요한 시합에서 사와무라는 부상과 거대한 중압감을 정신력으로 극복하고 11구 혼신의 힘을 다한 일생 최고의 투구를 하는데 끊임없는 위기상황을 아슬아슬하게 넘기는 긴박감 속에서 한 남자의 자존심과 명예를 건 분투의 땀방울이 진정 뜨겁다 못해 울컥해진다. 야구팬이라면 박수를 보낼 명장면으로 기억될 순간이 아니겠는가.

 

그래, <사우스포 킬러>2004년 제3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대상 수상작답게 충분히 대중적인 야구소설이다. 야구에 대한 열정과 누명을 벗고자하는 과정들이 정직한 직구로 스트라이크를 던지듯 시종 호쾌하면서도 쓸쓸한 것에서 야구에 관심 없는 사람들에겐 흥미가 다소 반감될 수 있겠지만 야구를 진정 아끼고 사랑하는 팬들이라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행복한 선물이겠다. 더러운 세상 속에서도 700만 팬들을 위한 야구는 계속될 것이기 때문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암보스 문도스 밀리언셀러 클럽 62
기리노 나쓰오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이 단편집 참 요상한 것이 책을 덮고 나서 천정을 보고 누워 있으면 알 수 없는 망상들이 찰싹 달라붙어 흐물흐물 오르락 내리락 하는 기분이 든다. <얼굴에 흩날리는 비>는 솔직히 별다른 감흥도 없이 평범하게 넘어갔었는데 이 책은 기리노 나쓰오 여사의 작품 스타일에 대한 세간의 평이 그냥 허언이 아니었음을 제대로 실감하게 한다. 여자가 쓴 글 같지 않다는 둥, 같은 여자를 비하한다는 둥, 어딘가 불편하고 께름칙하다는 둥 그동안 들어왔던 말들은 다 맞는 말이었네.

 

<식림>, <루비>, <괴물들의 야회>, <사랑의 섬>,<부도의 숲>, <독동>,<암보스 문도스>까지 총 7편의 단편들이 실려 있는데, 어느 것 하나 범상치 않은 포스를 내뿜어주신다. 역시 <사랑의 섬>이 가장 후끈하다. 회사에서 여직원 셋이서 해외여행을 간다는 줄거리는 얼핏 봐선 흔한 일로 볼 수 있다. 여자들끼리의 여행은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별다른 차이는 없겠지.... 그런데 쓰루코, 요시에, 나오코 세 여자가 상하이로 여행을 떠나는데, 각각 나이 차도 좀 있고 이전에는 별달리 친하지도 않았는데도 여행가자고 의기투합하는 걸 보면 여자들끼리는 가능한 교류인가 보다. 단지 그 점만 좀 특이하다.

 

그렇게 상하이에 도착해서 쓰루코, 요시에만 따로 에스테틱 숍에 가서 얼굴 마사지를 받으러 간다. ! 그런데 이게 뭐람. 얼굴 마사지만 받기로 했는데 뜻밖에도 은밀하면서 야릇한 마사지를 받게 되면서 일순 당황, 그리고 아찔한 체험을 온 몸으로 즐기는 두 사람, 내가 다 민망하여 혼자 있는 방에서 주위를 괜시리 잠시 의식했다가 순간 강력한 몰입에 빠져버렸다. 예상치 못한 서비스체험을 계기로 세 여자는 자신들이 이제껏 겪었던 은밀한 성적 경험담을 털어놓는다. 이건 뭐라고 해야 하나, 엽기와 변태가 상호 경쟁하는 노골적인 이야기들이 여자들의 솔직한 욕망으로 대입되는데 방 안 공기가 열기로 상승하는 것 같았다. , 덥군 더워!!! 마치 여탕을 훔쳐보는 사춘기 소년의 심정이 이러할까? 암튼 표현수위가 파격적인 것이 야설이 따로 없다.

 

각자의 경험담에서 도출된 결론은 당당한 즐기기를 벗어나 피학적인 성적 욕구와 호기심이 분출되는 것으로 결말지으면서 손가락질하면서도 맛보고 또 맛보고 결국 중독되고 싶은 성인여성들의 욕망을 판타지화 했다. 물론 도덕적 판단은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란 교훈도 남기지 않는다. 요 단편만큼은 여자들만 읽어야 해! 누가 너 뭐 읽고 있냐고 물으면서 페이지의 내용을 확인한다면 화들짝 놀라 내 얼굴은 홍당무가 되어 고갤 숙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 밖의 다른 단편들에서도 공통적으로 찌질한 여자 주인공들이 나와 왕따, 노숙, 불륜, 살인 등 어두운 소재를 바탕으로 죄의식도, 양심도, 자존심도, 체면도 내팽개치고 남자에 의존적이면서 비루한 인생을 보내고 있어 그야말로 여자 루저들의 퍼레이드라고 할 수 있다. 하나같이 어딘가 나사 빠진 모습에 제대로 된 여자들이 단 한 명도 없고 나쓰오 여사의 괴이한 정신세계와 한데 어울려 별나긴 하다. 한 편으론 안쓰럽기도 하고.

 

같은 여자들을 비하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를 통해 나쓰오 여사가 말하고 싶었던 화두는 속마음이 썩어 문드러진 그녀들을 맘껏 조롱하며 내숭떨지 말라고 가차없이 채찍이라도 휘두르고 싶었던 것인지... 어쨌든 상식으론 판단할 수 없으며, 한계를 초월한 스토리에 항시 매료되는 내게 그래서 별미같은 소설이었던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실종 - 사라진 릴리를 찾아서,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4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헨리 피어스는 분자회로와 분자메모리 분야에서 여러 개의 특허를 갖고 있으며, 최근 분자컴퓨터 개발경쟁에 가장 먼저 뛰어든 애미디오 테크놀리지라는 회사의 CED이자 천재과학자이다. 최근 서먹해진 연인 니콜과 결별하고 호텔에서 아파트로 이사한 첫 날 자꾸 이상한 전화가 계속해서 걸려온다.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모두 남자들로 웹사이트에 나와있는 번호로 걸었다며 릴리라는 여자를 찾는 것이다. 전화를 새로 설치한 지 겨우 15분밖에 안 되었는데 잘못 걸린 전화가 왜 이리도 많이 오는 걸까? 계속되는 전화에 짜증도 나지만 차츰 호기심이 발동한다.

 

  

릴리라는 여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예전에 이 전화번호를 사용했음이 분명했다. 아마도 릴리라는 여자는 전화를 건 남자들로 봐선 에스코트이거나 매춘부일 것이라며 추측할 뿐. 무시하고 전화번호를 변경하는 것으로 끝낼 수도 있었건만 그녀 릴리의 정체를 조사하러 나서게 되면서 그녀가 짐작대로 에스코트 걸이었음을 알게 된다. 조금만 더 알아보자며 이 미지의 여인에 대해 더 깊이 파고 들어가던 헨리 피어스는 정체불명의 세력들로부터 폭행을 당하는 봉변을 겪는다. 이제 지속적인 생명의 위협으로 이어지고 회사의 프로젝트와 웹사이트, 살인· 폭력 같은 범죄와 숨겨진 비밀에 얽힌 이야기에는 모종의 상관관계가 있음을 알게 되는데... 이 뜬금없는 위험의 정체는 무엇일까? 릴리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실종: 사라진 릴리를 찾아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흔히 쉽게 겪을 수 있는 경험담을 소재로 그려내고 있다. ? 다들 한 번 이상은 겪지 않나? 잘못 걸려온 전화 말이다. ‘아닙니다. 잘못 거셨어요.’ 요즘엔 보이스 피싱 사기도 극성이라 피해자도 종종 발생하는데 단지 귀찮다는 이유만으로도 우린 대체로 그냥 수화기를 내려놓고 만다. 헨리 피어스만은 달랐다. 호기심이 창의의 원천이라도 되는 듯 묘령의 여인에 대한 불필요한 관심이 화근이 되는 것이다. 적당히 끝냈으면 될 일을 위험한 수렁 속으로 깊이 발을 담그면서 인간의 못 말리는 호기심이 어디까지 악용될 수 있는지 리얼하게 보여준다.

 

단지 한 여인의 실종에 그치지 않고 이면에 놓인 진짜 덫을 생각하면 인간만큼 사악하고 무서운 존재가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불안한 심리를 부추겨 계획된 음모와 배신을 절체절명의 기지로 돌파하는 한 남자의 사투가 짜릿한 서스펜스와 스릴로 긴장감 있게 잘 그려진다. 마이클 코넬리가 언제 우리를 실망시킨 적이 있던가! 한 방에 빵 터뜨려주는 센스있는 반전은 당연지사이며, 마이클 코넬리의 여전한 저력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수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지막 증언 1
존 카첸바크 지음, 김진석 옮김 / 뿔(웅진)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2011 <하트의 전쟁><애널리스트>에 열광했던 나에게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이라 불리는 이 책의 출간소식은 그야말로 쌍수 들고 반길만한 빅 뉴스였다. 그것도 내 생애 최초의 스릴러 분권 구입예정으로 염두에 두었다면 말이다. 근데 다 읽고 나면 모두가 거짓말을 한다.’는 문구가 출간을 앞둔 마이클 코넬리의 <The Brass Verdict>에서만 통용되는 말이 아니란 사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존 박의 신간에서도 마찬가지로 통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미국 남부 플로리다에 소재해 있는 <마이애미 저널>의 기자 매슈 코워트는 주립 교도소의 한 죄수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열한 살 된 여자아이를 납치 살해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은 흑인 대학생 로버트 얼 퍼거슨의 편지로 자신이 흑인이라는 인종차별적 시각과 강요된 자백에 의한 엉터리 재판에 의하여 누명을 썼다는 주장이었다.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코워트와의 면담을 요청하는 퍼거슨을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기려다 맘을 바꿔 교도소로 그를 만나러 간다.

 

퍼거슨을 면담하는 자리에서 결백을 호소하는 그의 논리에 점점 잠식당하게 되는 코워트, 결정적으로 같은 교도소 내에 수감 중인 또 다른 사형수가 본인이 저지른 범행이었음을 실토했다는 말을 듣고 당사자를 만나 취재한 끝에 퍼거슨의 무죄와 진범을 밝혀낸다. 그것을 기사로 써서 퓰리처상까지 받게 되는 코워트. 그로 인해 정의는 실현되고 언론인으로서 성공이라는 장밋빛 미래에 취해 있을 그때, 진범의 부모가 살해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이제 그동안 믿었던 진실이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에 코워트는 경악하게 된다. 혼란을 바로 잡기 위하여 코워트는 태니 브라운 반장과 여형사 셰퍼와 함께 석방된 퍼거슨을 재조사하기 시작하는데 과연 무엇이 진실일까?

 

이 소설을 관통하는 큰 흐름은 진범여부와 결백을 둘러싼 진실게임을 통해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끊임없는 혼선으로 흔들린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결말을 미리 예상할 수 없는 미궁으로 빠지게 된다는 점이다. 언론은 끈질긴 취재로 무고한 목숨을 구명하고 진실을 밝혀냈다는 명예로움이 거짓과 기만에 의해 역공 받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경찰은 오로지 직감만 믿고 얻어낸 자백이 오류일 리가 없다는 완고함 때문에 세상에 떳떳하지 못하게 된다. 반면 피해자는 미국사회에 뿌리 깊은 인종차별의 폐해와 미국 형사 사법제도의 구조적 결함을 조롱하며, 결백이라는 단단한 껍질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며 세상 앞에서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상반된 입장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최소한 누군가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세상에 까발려진다면 돌이킬 수 없는 후폭풍을 맞게 되리라는 점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렇듯 우리가 평소 무의식적로 신봉하는 고정관념이 진실이 될 수도, 거짓도 될 수 있고 선과 악은 처음부터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믿음에 대한 미세한 균열이 보이기 시작한다. 결백이라는 단단한 껍질 속에 들어간 피해자를 망치로 깨어질 때까지 줄기차게 두드리는 코워트와 브라운 반장, 셰퍼 형사의 시도는 이제 창과 방패로 대변되기 시작한다. 정교한 심리묘사와 두뇌게임, 논리와 심증이 상호 충돌하는 대화를 통해 진실에 대한 공방전이 흡입력 있게 전개되면서 과연 결백이란 껍질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을지 궁금증이 증폭될 수밖에 없다. 과연 그 속은 깨끗하게 비어있을 것인가? 아니면 함정이라는 노른자가 들어 있을까? 마지막까지 가서야 진실은 공개된다.

 

하지만 과연 존 박! 이라며 감탄을 하다가도 서술에 있어서 부분적으로 엉성하고 진부한 느낌도 들고, 흡입력 있게 전개되던 이야기가 골인지점에 가까워질수록 명쾌함 대신 논리의 비약과 감정을 앞세운 치기로 건너뛰며 성급하게 마무리되는 결말 또한 공든 탑의 한축이 무너지는 것 같은 아쉬움이 든다. 읽는 동안 방대한 페이지를 전혀 의식할 수 없었던 <하트의 전쟁>의 그 짜릿한 재미를 생각하면 좀 그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면책특권
프레드릭 포사이드 지음, 이한수 옮김 / 큰나무 / 2011년 7월
평점 :
판매중지


내가 지금 근무하고 있는 이 곳은 작은 읍으로 거주 인구도 그리 많지 않은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다. 업무도 바쁘지 않아 시간은 충분한 편이라서 여유시간은 주로 독서를 하며 보내는 편이다. 아마 연고지로 복귀하게 된다면 지금처럼 업무 중에 독서나 하는 호사는 두 번 다시 누리기 힘들겠지. 퇴근 후도 사정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숙소에 틀어박혀 TV대신 오로지 책만 붙드는 여유 만만한 생활인데 그런 내게 군민 도서관은 얼마나 반가운 존재인지...

 

이 곳에 부임한 후 방문한 도서관은 시골 도서관이라 도시 도서관처럼 소장하고 있는 책의 권수도 훨씬 적으며, 당연히 실시간 신간 업데이트는 기대하기 힘든 게 현실이다. 대신 그간 신간에 밀려 외면했던 구간들을 찬찬히 둘러볼 기회가 생겼으니 회원 가입 후 처음으로 빌린 책이 프레드릭 포사이스의 단편집 <마지막 에이스>이다.

 

<증거>, <목격자>, <광고번호H331>, <면책특권>, <아일랜드에는 뱀이 없다>,<황홀한 죽음>,<제왕>, <재수 없는 날>까지 총 9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역시 거장답게 고퀄의 수준을 자랑한다. 그리고 이 책을 전반적으로 관통하는 유머와 위트는 깨알 같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참 멋진 읽을거리로 추천한다고 누군가 얘기했었지. 그 중 한 편만 우선 소개!!

 

<목격자>: 권태에 빠진 바람둥이이자 런던 실업계의 거물 마크 샌더슨은 맘에 드는 여인을 만나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한다. 그의 소망과는 달리 진정한 사랑을 찾을 수 없었고 자기에게는 가망 없는 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방글라데시의 난민 돕기 자선파티에서 운명의 여인을 드디어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유부녀였으며 그의 구애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부부를 갈라놓을 때까지는 남편의 곁을 결코 떠나지 않겠노라고 천명하자 샌더슨의 마음은 시커멓게 타들어 가면서 여자에 빠져버린 남자의 욕망은 미치게 타오를 수밖에 없게 된다. 이제 그에게는 선택과 결정이 필요하다.

 

결국 그는 킬러를 고용해 여자의 남편 암살을 사주함으로서 완전범죄를 통해 경찰의 수사도 피하고 홀로 남겨진 여자를 차지하려고 한다. 그런데 말이지 인생이란 아이러니와 예기치 못한 변수가 꼭 끼어들게 마련이란 말씀. 킬러의 뒤처리가 너무나도 꼼꼼해서 일은 제대로 해냈는데 시키지도 않은 일까지 깔끔하게 정리해버린단 말이지. 결말은 아! 웃어야하나, 원하지도 않았던 결과에 망연자실할 그의 넋 나간 얼굴이 상상되어서 그에게는 불행이지만 내게는 폭소로 다가와 한참을 배꼽잡고 헐떡거렸다. 자고로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호색한들을 보며 같은 수컷으로 느끼는 민망함과 여자보기를 돌같이 하든지. 진실된 마음과 수완으로 여자의 사랑을 갈구하든지 양자택일하라는 절실한 교훈을 남겨주기에 공감이 간다. 낮술에 취해 낯선 여자에게 껄떡대다 망신당한다는 한국 영화 <낮술>이 오버랩 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또 다른 단편 <목격자>에서는 살인사건을 피해갈 수 없는 운명으로 결론 내어 디테일하게 마무리하고 있고, <면책특권>에서는 거대권력을 등에 업은 언론사의 횡포로 무기력하게 침해당하는 개인의 권리와 보도의 진실성 문제 등을 풍자적으로 다룸으로서 공명정대한 언론의 자세를 보여주지 못하는 작금의 현실을 어떤 것인지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 밖에 현대 첩보소설의 거장답게 리얼리티가 뙤어난 묘사, 빠른 사건 전개와 기발한 구성, 그리고 생동감 넘치는 인물묘사가 작품 전반에 걸쳐 돋보인다. 서스펜스가 강렬하며 허를 찌르는 반전까지, 프레드릭 포사이스의 작품에 대한 본격적인 입문작으로 정녕 손색이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