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매혹당한 사람들
토머스 컬리넌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7년 9월
평점 :
절판
막상 영화가 개봉되었으나 미처 보지 못했다. 어떤 영화인지 가늠할 수 없는 상태에서 원작이 최상의 선택이 될 것이라는 어떤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시대적 배경은 미국 남북전쟁이 한참 벌어지던 1864년으로 남부의 어느 숲에서 버섯을 따러가던 어린 소녀가 쓰러진 젊은 남자를 발견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죽지는 않았으나 부상을 입은 남자, 북군 소속의 존 맥버니 상병을 소녀가 부축해 자신이 속해 있는 여자 신학교로 데려온다.
교장 마사 판즈워스 부터 여교사 한 명 그리고 여학생 다섯, 여자 흑인노예 한 명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이 학교에 머물며 치료받게 되는 존 맥버니 상병에게도 그랬겠지만 여자들만 사는 공간에 남자가 들어오니까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눈빛부터가 초롱초롱, 선뜻 만나기 힘들었던 낯선 이성에 대한 왕성한 성적인 끌림이 생겨난다. 나이를 불문하고 모든 여자들이 맥버니 상병에게 열화와 같은 반응과 관심을 보였고 그도 여자들을 각각 대할 때 마다 끊임없이 이쁘다고 칭찬하면서 달콤한 말로 꼬드기니 안 넘어가는 여자들이 없었다.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
처음엔 거부반응을 보이던 여자들도 차례차례 반하게 되면서 여자들은 모두 그에게 이뻐 보이려고 광분하기에 그녀들만의 경쟁심과 질투심은 한 남자를 얻고 싶은 욕망으로 싹 다 불타오른다. 제목 그대로 매혹당한 사람들이었다. 이것은 마치 물에 검은 잉크를 풀어 놓은 것 같은 이치다. 그 과정들이 관찰자의 시점이 아닌 여자들 개개인의 화자 시점으로 번갈아 가며 나오는지라 그 생생한 밀도가 무척 숨 막힌다.
언제까지나 핑크빛 로맨스로 끝맺음 했다면 좋았으련만. 그는 다정하고 미워할 수 없는 매력으로 철철 넘쳐났으나 그 이면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하였던 천박하고 교활함이 있다는 것을 진작 깨달았어야 했다. 원래 낯선 이방인은 본성이 선한지 악한지는 첫눈에 알 수는 없는 법이다. 시간을 두고 겪어봐야 드러나는 사람의 본성이 선하지 않다고 깨닫는 순간, 이미 늦었는지도 모른다. 그랬으면 또 이야기의 흐름이 달라졌겠지만.
우선 그는 이빨을 드러내었다. 여자들의 마음을 훔쳤고 농락했으며 거친 성정이 폭발하면서 그녀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제 그녀들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 걸까? 그냥 여기서 나가라고 내쫓는 것만으로는 안심하기에 이른데, 불의의 사고로 다리를 절단당해 버린 존 맥버니 상병의 상태는 어떤 결단을 필요로 하게 되어 버렸다.
1971년에 개봉했던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의 영화는 존 맥버니 상병의 입장에서 그려지고 있어 영화 포스터에서도 마치 미저리에나 나올 법한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위기일발에 빠진 한 남자의 스릴러 같이 느껴지는데 실상은 고립된 공간에서 위협을 당하는 것은 오히려 여자들 쪽이라는 점에서 영화를 누가 만드느냐에 따라 그 성격이 확연히 달라지는 것 같다.
그렇게 결말에 이르러서야 소설의 시작과 끝은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합집산 하며 개인의 욕망에만 충실하려 했던 그녀들이 공동의 위협에 대처하는 결집력과 최후의 선택은 재미를 폭발시키고야 만다. 그런 차원에서 남성작가가 쓸 수 있는 여성 심리소설의 최고작이 아닐까 하며, 여성들이 좇는 남성이라는 신기루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