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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그리고 축복 - 장영희 영미시 산책 ㅣ 장영희의 영미시산책
장영희 지음, 김점선 그림 / 비채 / 2017년 2월
평점 :
어렸을 때 본 만화 중에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만화가 있다.
노처녀가 오빠한테 시집 보내달라고 했더니
며칠 후 집으로 시집 한권이
배달되더라는 내용이다.
어찌나 배 아프게 웃었던지
여태껏 잊지 못하고 있는
첫사랑 같은 만화로 남아 있다.
시란 그런 것 같다.
마음속에서 미처 꺼내지 못한 말을
언어라는 색을 입히고
이미지화해서 숨결을 불어넣는
작업이라고 정리하고 싶다는.
그렇게 정리된 시 한편을
가슴으로 이해할 정도가 되면
시집갈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 있다.
여기 교수이자 시인이었던
장영희 선생이 생전에 칼럼에
쓴 영미 시들을 모아 펴낸
<생일 그리고 축복>은 본인도
고백했듯이 사랑해서
다시 세상에 태어난 기분을 또 다른
의미의 생일로 명명하여 살며
사랑하는 순간들을
축복하고자 한다.
어떤 스무 살의 젊은이는
70 인생에
이제 남은 봄은 50번 밖에
없음을 한탄하는 시도
썼는데 이미 더 많은 봄을 소진한 나를
발끈하게도, 질투하게도 만든다.
또 어떤 시에서는 내내 기다리던
손님 3월을 님 만난 마냥 반가워하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가 하면
떠나가는 사랑에 매달리지 않고
짙은 생채기를 남기지 말라며 흔적 없이
사라져 줄 것을 부탁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늘이 그만큼 두려운 것.
하루하루 바쁘지만 하늘의 푸르름을
쳐다볼 여유가 없다면 사는 게 무슨 죄냐고
조근 조근 타박하는 시 앞에서 좀 뜨끔해진다.
이제 이 시집을 다 읽었다.
이 책을 읽으며 주말에
서울 볼 일 있어 갔다가
돌아갈 버스에 몸을 싣고
출발을 기다리고 있자니
저 멀리 젊은 남녀 한 쌍이
포옹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자꾸 밟혔다.
이제는 떨어지겠지 싶었는데 자석이다.
남자는 겸연쩍은 듯 주변을
힐끔 거리는 모습인데
반해 여자는 절대 놓지 않겠다고 각오했는지
완전 밀착 상태였다.
이제 둘이 갈라서는 모습은
볼 기대를 접어버렸다.
지금 이 순간 가장 행복한 그 커플을 보면서
그들이 미친 듯이 사랑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게 무슨 죄인가? 미워하며 사는 게 죄지.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