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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평점 :
최근에서야 그것도 사후 10여 년이 지나서 국내에 소개되고 있는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가 백인남성의 전유물이었던 SF문학에서 흑인여성 작가라는 위상을 인종과 젠더적인 관점에서 재창조해낸 작품이 바로 이 <킨>이 아닐까 한다. 그만큼 작가의 정체성이 가장 확실하게 응축되어 있다고 생각되기에 먼저 만났던 단편집 <블러드 차일드>와는 또 다르게 다가온 것 같다. 그런 만큼 이 소설의 주요소재인 타임 슬립은 이 장르에서 고전적이자 관습적인 답습이라는, 신선도면에서 큰 점수를 주기 힘든 것이라는 예상을 뛰어넘고 다른 변주를 선택한다.
흔히 타임 슬립을 이야기 할 때 과연 어느 시대로 접속할 것인가에 주목하게 되는데 여주인공 다나는 작가처럼 흑인여성이란 점에서 기대와 꿈, 모험요소 가득한 낭만과는 거리가 먼 특정시대를 반복적으로 접속하게 되므로 가벼운 읽을거리는 일단 아니란 의미이다. 우선 다나는 1976년을 살고 있던 스물여섯 살의 여성으로 어느 날 우연히 1815년 남부 메릴랜드 주의 숲속으로 시공간 이동을 하게 된다. 처음에는 원인도 이동한 장소의 시대적 배경도 몰랐었다. 단지 강에 빠진 남자아이를 발견해서 갑작스럽게 구했을 뿐, 하지만 소년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소리치며 위협했으며, 아버지의 총구가 들이밀 때 극적으로 현재의 공간으로 돌아왔다.
알고 보니 그 곳은 1815년이었으니 아직 노예해방이 일어나지도 않아 백인에 의한 흑인노예의 종속관계와 차별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이었다. 믿을 수 없어 남편인 잭에게 사실을 고백하고 눈앞에서 아내가 사라졌다 되돌아온 믿지 못할 광경에 경악했던 그도 타임 슬립을 따라 겪으면서 어떡하든지 아내를 보호하려 한다. 그렇게 수차례에 걸쳐 백인소년 루퍼스 와일린과 어떤 위기나 위험을 겪을 때 마다 자동적으로 그의 앞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여인 다나와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애증된 만남과 관계를 지속한다.
인류역사에 있어서 치부의 하나인 노예제도를 비록 SF적 설정으로 그리고 있지만 다나가 자유민으로 살던 현재와 달리 복장부터 말투까지 백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그 시대와 격렬히 부딪히며, 한계 없는 개인의 자유의지에 스스로 삶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은 누구에게도 내어줄 수 없다는 강력한 자기애가 생생하게 빛을 발한다. 충분히 자아성찰에 관해 돌아보라는 충고로도 해석된다,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부여되는 고유의 색깔이다.
더불어 애증의 딜레마, 그 수레바퀴를 굴리는 마부 루퍼스가 다나가 자신에게 악몽에 빠진 자신을 돕지 않고 홀연히 떠난다며 원망하는 순간은 인간애의 실천이 어디까지여야 할까라는 생각마저 들게도 한다. 그래서 인간이 가진 정신세계에 대한 또 다른 차원의 해부실습을 참관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까닭도 일반적인 SF문학의 범주와는 다른 차원을 그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고 원제인 <kindred>의 속뜻에는 동류의, 비슷한 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더욱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