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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관의 피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0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5년 3월
평점 :
三代(삼대)
정말 한번쯤은 반드시 읽고 싶었던 사사키 조의 <경관의 피>가 이번에 합본 소장판으로 출간되는 바람에 드디어 그 명성을 확인해 볼 기회가 생겼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패전국이 되지만 도약을 꿈꾸던 일본의 1948년부터 2007년까지를 배경으로,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다시 손자까지 3대로 이어지는 경찰집안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총 3부작으로 그려지는 대하드라마입니다.
전쟁에 참전했다 돌아온 “안조 세이시”는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순사에 지원하여 경찰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습니다. 훈련소에서 만난 동기생 “가토리 모이치”, “구보타 가쓰토시”, “하야세 유조”와 함께 훈련을 마친 그들은 각자의 포부를 가진 채 근무지로 배속 받아 흩어집니다. 이후 틈틈이 셋이 여건이 될 때 마다 만나 회포를 푸는 식이었죠.
“세이시”는 우에노 경찰서 인근지역에서 본격적으로 근무하기 시작하는데 관할 내에 있는 공원에서 평소 안면이 있던 청년 “미도리”가 시체로 발견됩니다. 그 청년은 남창이었어요. 종전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길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이 밀집해 있던 공원이었으며, 그중에는 남창무리도 섞여있었지요. 그 와중에 우연히 “미도리”를 찾던 경찰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어딘가 미심쩍다는 의심을 하게 되는 “세이시.”
5년 후에는 철도원 직원이 살해된 사건이 발생합니다. 사회의 무관심 속에 흐지부지 되어 미결사건으로 잊혀가는 두 사건의 연관성을 찾으려했지만 “세이시”는 성과를 못 내고 경시청 주재 ‘덴노지’ 주재소 경관으로 배속 받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일어난 화재 속에서 “세이시”는 뜻하지 않은 죽음을 맞는데요, 그를 경찰에서 자살로 처리하면서 순직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이렇게 여덟 살에 아버지를 잃은 “다미오”도 뒤를 이어 경찰이 됩니다. 아버지의 동기들이자 삼촌들인 세 사람의 도움을 받아 경찰대학에 진학하려 했다가 경시청 소속의 누군가로부터의 제안을 수락하여 훗카이도 대학에 진학, 공안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혁혁한 전공을 올리지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후유증에 시달리다 아내를 폭행하기까지 하지요.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사람에게서 아버지 죽음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나선 그 진실을 조사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아버지처럼 ‘덴노지’ 주재소로 배속 받는데 인질극에 뛰어들다 그만 순직하고 맙니다.
할아버지는 자살, 아버지는 순직... 참으로 남자들의 운명이 거짓말처럼 기구하네요. 할머니와 엄마는 줄줄이 미망인이 되어버렸으니 손주 “가즈야”마저 설마 같은 길을 걷게 될지는 누구도 예상 못했을 겁니다. 오히려 “가즈야”는 생전에 아버지가 엄마를 폭행하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던지라 경멸과 애증 정도가 남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얄궂은 운명은 3대를 모두 경찰관이라는 직업으로 엮어버렸으니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캐내고 싶다는 본능이 자리하게 되는군요. 같은 길을 걷는 “가즈야”.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관련이 있는 특정인물은 누구이며 현재 맡게 된 임무와 어떻게 조율하여 해결해 나갈까요?
경찰이란 조직은 시대에 따라 그 역할과 임무가 다르게 가중치가 부여되며 직업관도 근무여건도 달라졌습니다. 조직 안과 밖 모두에서 일등이 되어야했던 이들 삼부자의 모습에서 범인을 쫓아 범죄를 해결하는 사냥꾼이 아니라 한 사람의 남편이자 아버지, 아들이었기에 피가 흐르는 인간 그 자체로 대면할 수 있는 것이지요.
아들은 아버지의 등을 보고 자란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백점짜리 아버지로서의 역할이 기대치에 못 미쳤다고 하나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혈연마저 잘라낼 수는 없었던 겁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선대의 진실을 밝혀내는 3대째의 승리에 묵직한 감동이 전해와요. 더불어 아들에게 자랑스럽고 듬직한 아버지의 위상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어느 아버지나 마찬가지일터, 그 기나긴 터널 밖으로 빠져 나오기까지의 강한 생존력을 장대하면서 유려하게 써내려간 필력 앞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경찰소설의 또 다른 최고봉이 여기에 있음을 무력시위하는 것 같은 걸작이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