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프랑수아 가르드 지음, 성귀수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놀랍게도 이것은 실화이다. 무인도에 버려진 한 남자의 생존기는 자연스럽게 대니얼 디포의 <로빈스 크루소>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로빈스 크루소>에게는 야만에 대한 서구문명의 우월함을 역설하는 치명적 문제를 지닌 작품이라는 지적이 꼬리표처럼 따라 다닌다. 반면 프랑수아 가르도의 이 작품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는 외견상 <로빈슨 크루소>와 여러모로 궤를 같이 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 나르시스 펠티에가 로빈슨 크루소와 동일선상에 놓일 만한 출발선이 굉장히 유사하다. 프랑스 보르도를 출발하여 아프리카 희망봉을 거쳐 오스트레일리아에 생폴호가 도착하게 된 것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는 걸 알기 전 까지는.

 

계속 발생하는 환자, 궁극적으로 사망자... 치료도 필요했지만 무엇보다 마실 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서 군도의 한 섬에 상륙했던 것이 시작이었다. 아직 어린 선원이었던 나르시스 펠티에는 동료들과 구역을 나누어 물을 찾다가 그만 복귀신호를 감지 못하고 그만이 혼자 섬에 남겨진다. 선장과 동료선원들은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이미 뱃머리를 돌려 떠난 뒤였다. 조난신호 표식을 남기면 자신을 찾는 일은 시간문제일 것이라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지만 그는 그 섬에서 무려 17년을 보내게 되리라고는 미처 예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는 고립 속에서 탈진 상태에 빠졌다가 어느 날, 한 흑인 원주민 노파를 만나게 된다. 도무지 의사소통도 안 되는 상태에서 노파를 따라 다니다가 나중에는 흑인 원주민 무리에 엉겁결에 합류하지만 이들 종족에 동화되기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서구 문명으로 대변되는 흰둥이와 야만인으로 대변되는 흑인 원주민 종족은 처음부터 이질적인 만남이었으니 태어나면서 야생으로 길들여진 정글북의 소년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문명vs야만, 이성vs본능, 백인vs흑인. 이 모든 것이 무지와 충돌을 빚다가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융합되기 시작하는 순간, 철저히 이방인 취급을 받았던 나르시스 펠티에는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흰둥이 야만인으로 변모해간다. 그래서 그들 무리 속에 섞여 일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17년 후 유럽의 한 상선에 나르시스 펠티에의 존재가 발견된다. 섬에 상륙했던 선원들이 원주민 무리 속에서 발견한 백인 남자를 시드니로 데려왔던 것.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이미 사망처리 되어 있었고 게다가 모국어인 프랑스어도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프랑스어를 사용할 일도, 들을 일도 없는 상태에서 그의 언어는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말이었고 모든 서구문화에 대한 규범과 예절 등은 기억 속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던 것이다. 모든 것이 퇴화되었으며 흰둥이 야만인은 자칭 문명인으로 자부하는 유럽인들에게는 충격이자 색다른 호기심의 도구로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당시 시대적 배경인 19세기 중반 유럽이 그러했다. 3세계 진출을 통한 식민지 쟁탈전 속에 피지배 종족들을 야만인으로 간주하면서 착취, 수탈이 만연하던 시기였으니 피부색이 자신들과 같은 야만인의 출현은 이해불가의 넌센스 였을 것이고 사르키 바트만 같은 인종 전시장의 유물로 같은 취급을 당하게 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르시스 펠티에를 다시 문명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 위한 주변사람들의 시도는 문명속에 있다가 이탈했던 사람에게 다시 문명을 주입시키는 것으로 흡사 어린 아이를 가르치는 학습효과와 유사한 형태가 된다. 그나마 그에게는 본능이 잠재되어 있다. 백지 상태애서 출발한 상태가 아니기에 언어부터 예절, 규범 같은 문화 재 습득 과정을 겪게 되면서 다시 이 세계로 편입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정작 나르시스 펠티에의 마음의 고향은 언제나 야만족들에게 가 있었다. 자신의 친 어머니 대신에 야만족의 노파를 먼저 생각한다. 이미 죽었지만 말이다.

 

나르시스 펠티에는 많은 이들을 감화시켜 나간다. 그래서 정작 가르침을 받은 것은 나르시스 펠티에가 아니라 자신들이었다는 자기고백이 흘러나올 때면 그렇게 마음이 짠할 수가 없더란 말이지. 이것은 결코 서구문명의 자아도취가 아니라 자연 그대로 돌아가라, 야만이라는 편견 속에 진정한 이상이 살아 숨 쉬는 곳으로 말이다. 어설픈 편견과 얄팍한 신화로는 재단할 수 없어 감동적인 인류학적 고찰 앞에서 실존과 자아라는 정체성은 고전적인 기록으로 빛을 발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읽어 볼 가치가 분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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