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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일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3년 8월
평점 :
<허삼관
매혈기>는
나에게 중국 현대소설의 신선한 재미와 감동을 가슴에 새겨준 잊지 못할 작품이었고 웃음과 짠한 눈물이 교차하는 경험이라 기회만 된다면 그의 다른
작품을 다시 만나고 싶다는 염원을 항상 담고 있었다.
그래서
신작 장편소설 <제7일>은
그의 작품세계를 기억하는 팬들에게는 오랜만의 재회선물이거나 처음 그의 작품을 읽고자 하는 이에게 입문작으로 손색이 없어서 역시
“위화구나.”하는
감탄이 든다.
작가
스스로도 ‘30년
문학 인생의 결정판’으로
꼽는 작품이라고 하니 팬이라면 결코 놓쳐선 안 될 것이며 어느덧 우리 한국인이 가장 사랑한 중국 작가로 꼽힐 정도가 되었음은 영향력 면에서도 그
스펙트럼은 광대하다.
그런데
왜 소설의 제목이 <제7일>일까?
그것은
주인공 “양페이”가
불의의 사고로 죽고 난 뒤 “이승”에서
“저승”으로
완전히 넘어가지 못하고 떠도는 "7일"
동안에 벌어지는 사후기를 의미한다.
구약성서의
<창세기>에는
조물주가 엿새 날까지 일을 마치고 다음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었다고 되어있고 거기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그리하여
종교적 의미를 인간의 사후에 시간적,
공간적
의미로 변환함으로서 인생을 숙연한 시선으로 재해석하도록 하는 것이다.
시작과
끝이라는 시간적 경계와 인간이 자신의 삶을 마감한 이후(천수를
누렸거나,
병사를
했거나,
불의의
사고로 죽었거나 죽음의 형태와 살아온 기간은 상관없이)
묘지에
안정되어 완전히 "저승"으로 넘어가기 전에 대기하는 공간인 것이다.
살아서는
각자의 처지가 달랐던 인간들이 생전의 시간들에 대하여 추억을 되새기고 삶이라는 형태에 대한 해석을 거쳐 영원한 안식을 찾아가게 하는
셈이다.
또한
“7일”이라는
공간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쌓일 수밖에 없는 회한과 오해와 앙금을 털고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 화합의 한마당이 될 수 있는
마지막 자리이다.
묵은
때를 씻어내고 마음의 빚을 청산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주인공
“양페이”는
자신을 임신한 어머니가 출산을 앞두고 진통을 못 견뎌 화장실로 달려갔다가 그만 구멍으로 빠뜨려 이산가족이 된 아픔이 있었다.
철도원이
된 양아버지가 아이를 발견해 지극정성으로 키워냈고 나중에는 친어머니와 재회하지만 양아버지를 못 잊어 돌아온 “양페이”. 어릴
적에는 부양이 힘들어 일시적으로 자신을 버린 적도 있었던 양아버지였지만 너무나도 사랑해주셨던 그 분이 병에 걸려 시한부 삶을 살게 되자
“양페이”에게
짐이 되기 싫어 집을 나갔고 그 분을 찾아 온 세상을 뒤지고 다녀야했던 그 기억은
“양페이”에게
평생의 한으로 남았었다.
그렇게
살아서는 만날 수 없었던 두 부자가 “7일”이라는
공간에서 상봉하게 되는 일은 어떠한 극적인 장치를 심지 않고도 은연중에 떨리는 슬픔과 기쁨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그
순간의 뭉클함이란!!!
그
밖에 “양페이”는
“7일”동안
많은 여러 사람을 그들의 사연을 듣게 된다.
생전에
자신의 옷깃을 스쳐갔던 인연들이 여기에 와서 재구성되는 걸 보면 특별한 관계가 아니라도 인간의 관계라는 연줄은 어떤 식으로도 연결되어 있다는 게
진기했다.
“두
사람의 원한은 생사의 경계를 넘지 않았다.
원한은
저지당한 채 그 떠나간 세계에 남았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지지고 볶았던 악연들이 사후에는 아무런 쓸모없이 순백의 심성으로 어떤 편견이나 조건 없이도 상대를 재평가하는 공간이기에 죽어서
다시 만나는 그 곳은 욕심에 찌들려 아등바등 살아온 "이승"에서의 시간들이 얼마나 허망하고 부질없는지 깊숙이
깨닫게 된다.
분명
이들에게 생전의 삶은 사회주의 체제에다 자본주의를 부분적으로 받아들인 중국의 시장경제체제와 여전히 부패하고 경직된 관료라는 벽으로 인해
고달펐으리라.
그렇게
빈부의 격차에 시달렸던 이들은 인간다운 대접은 고사하고 억울한 죽음에도 세간의 관심도 못 받고 쓸쓸히 뒤안길로 사라져야
했다.
그런데
죽어서는 만인이 평등할 줄 알았는데...
적어도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논리는 죽어서도 꼬리처럼 따라다닌다.
돈이
없으면 누울 묘지도 없거나 슬퍼해 줄 유족도 없는 상황이라면 번호표를 뽑고 자신의 화장터에 가기 위한 채비를 한동안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비통한가!
돈
많은 부자는 VIP로
대접받고 좋은 관에서 많은 이들의 애도 속에서 화장되는 호사를 누리지만 “양페이”같은
이들은 마냥 떠돌다가 부패해서 해골이 되는 시점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차별은 비참하지만 “저승”에
도달하기까지의 여정은 인간이라는 의미,
인간으로서
존재해야 하는 의의를 다시 찾는 순간들과 깨달음이 있다는 점에서 위안을 받는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작가는 부자들의 삶을 결코 반추하고 있지는 않다.
가난에
찌들었던 이들이 살아있는 동안 물질적인 성공과 행복에 매진하며 선택의 기로에 놓을 수밖에 없어 결정해야했던 판단에 결코 옳고 그름이라는 무게를
두지 않는다.
인생이란
과정은 섣불리 어떠한 기준으로 재단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에 각자가 최선을 다해 살았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말한다.
단지
이것을 뒷받침해주지 못한 체제에 대한 은근한 비판을 이번에도 유머와 눈물이 절묘하게 교배되는 구성으로 찔러댈 뿐이다.
그래,
슬픔도
없고 고통도 없고,
원수도
없고 원망도 없는.
죽은
사람들 모두 평등하기를 바라는 세상을 염원하며 떠나가고 있구나.
이제
작가의 한국방문 소식도 들리고 <허삼관
매혈기>가
배우 "하정우"의 연출로 2014년에
한국영화로 개봉한다고 하니 여러모로 기쁘고 반갑다.
영화는
영상으로 어떻게 재해석될까?
문화혁명기의
중국을 그대로 옮기지는 못할 테니 분명 어떠한 변화가 있겠지.
부디
원작의 감동을 훼손하지 말고 최대한 가깝게 잘 살려내기를 바란다.
물론
이 소설도 영화로 만든다면 더 바랄게 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