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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숙청의 문을
구로타케 요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12월 겨울
어느날, 케이크를 사서 집으로 돌아가던 소녀는 폭주족을 피해 달아나다 그들의 오토바이에 치어 사망한다. 한순간 생명이 빠져나간 냉기만이 남고
딸을 잃은 엄마의 비통한 심정과 결연한 각오, 이것은 피비린내는 비극으로 시작된다. 그래서 40대 중반의 여교사 곤도
아야코는 D반
아이들의 출석을 부른뒤 일종의 선전포고를 한다. "여러분은
인질입니다. 반항하면 죽이겠습니다."
스물아홉명의 반 아이들은 일제히 코웃음을
친다. 평소 학교에서 무시당하는 존재였던 곤도
아야코의 말 한마디가 우습게 들렸지만 한 녀석이 겁없이 대들었다가 총에 무참히 사살당하는 걸 보고 이것은 결코 꿈이
아닌 현실임을 깨닫는다. 그것은 발단이었을 뿐이다. 인질극이 시작되고 경찰과 언론, 학부모, 학교 관계자까지 나서 사태의 해결을 위한 집압시도를
하지만 그녀는 아마추어가 아니다. 이제 곤도 아야코에게 조금이라도 불응하는 아이들은 차례차례 죽어나간다. 그녀에게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총이나 칼 무기는 기본으로, 일대일로도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호신술까지 내부의 인질은 물론, 외부의 침투로 부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감시시스템, 대인살상용 지뢰 같은 것도 구비함으로서 인질극은 장기전으로 이어질 조짐이 보였다.
곤도 아야코는 돈을 요구하지만 프롤로그에서 보여준
상황들이 그것이 진짜 목적이 아님을, 담보로 잡은 돈은 또 다른 계획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하필이면 극악무도한 문제아들만 D반에다
몽땅 집결시켜둔 설정은 작위적일수도 있겠지만 학교라는 시스템은 우등과 열등으로 분리해서 격리수용하는 방식이다. 같은 부류끼리 편성하여 순백을
물들이는 오류를 범하지 말라는 것. 취지는 알겠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인질극에 당위성이 충분히 성립된다고 본다. 물질적인 보상이나 정치적
요구를 하는 일반적인 인질극과는 달리 교사가 학생들을 인질로 삼는다는 설정은 딸을 잃은 모정이 강 건너에 있는 복수를 만나기 위한 임시가설교였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1회용으로 소모되면 그것으로 끝일뿐. 여기에는 자비도 없다. 눈에 거슬리면 바로 즉결처분.
그래서일까? 계속해서 인질로 잡힌 아이들이
죽어나가는데도 안타까움이 들지 않는다. 이 녀석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후안무치한 존재들이라
휴대폰으로 외부의 친구들에게 사태를 자랑하기도 하는가하면 머리에 총구를 겨누며 자신이 저지른 죄악이 낱낱이 까발려져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냥 눈만 껌뻑할 뿐. 시간이 흐르면서 곤도 아야코가 펼치는 논리에 점차 감화되고 명쾌함에 설득당하는데 부패를 촉진시키는
해충은 박멸만이 정답이니 착하고 힘없는 선량한 약자들이 우는 얼굴을 조금이나마 덜 볼 수 있는 밝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소망은 사법제도의
테두리에서는 결코 실현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렇다면 곤도
아야코가 당기는 방아쇠마다 싹수가 노란 녀석들이 미리미리 제거되어 미래의 더 큰 불행을 차단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후련함은 없을 것 같다. 어찌 청소년 범죄에만 해당되겠는가? 사회에도 필연적으로 집행되었으면 한다. 평소 마음 속에 꾹꾹 눌러뒀던 억압된 울분을
해소시키는 폭발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기에 진정한 가독성이 존재한다.
그러면서 인질극이 영원히 진행될수도 없으니
어떻게 종결지을까 궁금했었다. 평범하고 무기력했던 곤도
아야코가 단시일내에
초인적 능력을 발휘하도록 도움을 준 조력자의 정체도 뜻밖이었거니와 인질 중에 어떤 의미를 짊어지고 있었던 어느
아이(본인은 전혀 짐작도 못했겠지만)가 어쩌면 사소한 행동으로 인하여 용서받을 줄 알았는데 죽음의 순서만 늦춰진 이유가 결국 악행의 고리를
잘라내지 못한 자업자득 때문이었다는 설정도 인상적이다. 그랬다. 인질극이라는 공간적 특수성으로 끊임없이
서스펜스가 불꽃을 튀기고 만일의 상황에 대비한 아야코와 경찰 간의 치밀한 심리전도 일품이라 읽는 내내 기분이 쫄깃했다.
한마디로 장르소설에서 독자가 원하는 쾌감을
제대로 구현했다고 볼 수 있는데 유쾌, 상쾌하지는 않지만 통쾌했다는 것. 그리고 아야코가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그 돈으로 잘
먹고 잘 살려는 추악한 욕망이 아니었기에) 피끊는 모정에 대한 안타까움에다 인질로 잡혔다가 죽은 아이들의 부모 중 일부가 족쇄에서 해방된 기분을
느끼는 대목에서 자식이 부모에게 때론 희망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우울한 현실을 수용해야만 했고. 문득 그저께인가,
TV에서 방영되었던 한 청소년 프로그램이 오버랩된다.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된 어느 학부모는 자식에게 위해를 가한 아이들 중 주범에 대해서는
강력한 처벌을 반드시 원한다고 절규하는 장면이 있었다. 이 순간 곤도 아야코의
심정이 저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과
함께 소설 속 주요 대목들이 머리 속을 헤집고 다니며 말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