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네 시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사람은 스스로가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한다.

 

자기 자신에게 익숙해진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이다.

 

세월이 갈수록 인간이란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그 인물을 점점 이해할 수 없게 된다. <P.9>

 

 

 

황혼기에 접어든 에밀과 쥘리에트 부부는 올해 예순 다섯 살의 동갑내기 부부이다.

법적으로는 43, 하지만 실제로는 유치원에서 같은 반으로 만나 사랑을 키워 왔기 때문에 사실상 60년을 부부로 지낸 셈이다. 에밀은 고등학교에서 라틴어와 그리스를 가르쳤고 정년퇴직 이후 도시를 벗어나 조용한 시골에서 아내와 함께 전원생활을 꿈꾸고 싶었다. 때마침 마음에 드는 집을 구했는데 근처에는 똑같은 모양의 집이 한 채 있고 의사가 살고 있다 들었을 뿐인지라 기쁨과 평화가 오래 가리라 믿는다.

 

어느 날 오후 4.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문을 열어줬더니 에밀보다 나이 많아 보이는, 그러니까 일흔 정도는 됨직한 뚱뚱한 사내가 서있었다. 이웃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게 다반사인 도시의 삭막함과는 달리 거주인구가 백여 명 정도 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에서 이웃끼리 방문하고 교류하는 일은 당연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베르나르댕이라는 이 남자는 처음부터 괴팍했다. 에밀이 아무리 이런 저런 대화를 시도해도 돌아오는 반응은 그렇소.” 아니면 아니오.” 단답형이다. 무표정하게 앉아 있다가 한번 씩 인상을 찌푸리는 정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예상과는 달리 에밀 부부의 일상은 악몽으로 돌변한다. 이날 이후 매일 오후 4시에 방문해 여전히 단답형의 무미건조하고 무뚝뚝한 대답 말고는 자신의 주도로 먼저 대화를 시작하는 일 없이 저녁 6시가 되면 돌아간다. 왜 그러는지? 무슨 의도로 계속 정해진 시간에 방문하는 것인지 도통 속을 알 수 없어 점차 이 남자의 방문은 고통스러운 일이 된다. 인내도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어떡하든 이 남자의 방문을 기피할 요량으로 일부러 외출도 나갔다가 집에 없는 척도 해보지만 베르나르댕의 방문은 피할 도리가 없다. 그랬다간 문을 부수고 들어올지도 모른데다 불같이 화를 낼 테니까.

 

어디까지가 예의이고 무례는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아무 의미가 없다. 베르나르댕의 침묵은 분통터지게 만드니까. 나라면 이런 상황을 겪으면 십중팔구 불면에 두통, 소화 장애, 불안 초조, 분노 조절 장애 등등 갖가지 증세에 시달려 히스테리컬 해버릴 것 같다. 에밀의 훈련받은 이성 대신 막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본성은 자신도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부분이라 아내의 능청스런 보조만 아니었다면 어떻게든 폭발해 버렸을 것이다. 점점 우화 같은 첫 분위기가 블랙 코미디로, 다시 괴담으로 변화무쌍한 단계를 밟는 동안 베르나르댕의 아내가 등장한다.

 

에밀과 베르나르댕의 숨 막히는 심리전은 결국 타인을 자신의 울타리 안으로 들여놓는 대신 관계 맺기를 거부한 것에 대한 응징을 취함으로서 극단적인 선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베르나르댕의 아내 또한 원인제공자의 입장에서 자유롭지 않다. 설득과 타협에 지쳐가는 자아는 침몰하는 배나 마찬가지였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서 나는 누구인가로 끝맺는 대화는 간결하면서도 속사포 같은 논리를 쏟아내고 전개는 지속적으로 흥미진진하다. 철학적이지만 결코 진중하지도 가볍지도 않은 구성 때문에 아멜리 노통브작풍의 독특한 매력에 흠뻑 빠져버렸다. 다음에도 만나고 싶은 작가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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