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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도시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13 ㅣ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3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해리 보슈는 잠자리에 들지 않고 어둠 속에 앉아 색소폰 연주를 듣고 있던 중이었다. 자정에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살인사건이라고 했다. 특수살인사건 전담반인 해리 보슈에게 사건이 넘겨졌는데 이상했다. 피해자는 마치 사형을 집행당한 것처럼 뒤 통수에 총을 맞아 죽었다고 한다. 요즘시대에 처형이라니, 일단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해리 보슈는 새 파트너에게 전화를 건 뒤 먼저 현장에 출동한다.
에코파크 사건 이후 5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 그의 나이 56세. 당시 사건은 좋은 방향으로 무마되어 정리되었고 그 와중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두 여인과의 결별이었다. 우선 파트너였던 키즈민 라이더는 부상에서 회복된 후 행정업무로 직종을 바꾸며 보슈와 결별했으며 FBI 요원 레이첼 월링에게 사건 수사의 도움을 청하면서 둘 사이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뻔 했으나 갈등만 빚으며 안 좋게 헤어졌었다. 특히 레이첼 월링과는 로맨스가 시작되려나 싶더니 수면 아래로 가라앉으며 가능성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는데 뜻밖에도 이번 살인사건 현장에 레이첼 월링이 다시 나타나자 해리 보슈의 마음은 많이 흔들린다.
혹시나? 하지만 그녀는 말수도 줄여가며 고개 돌려 그를 의도적으로 외면하는데 앙금이 상당하다. 그동안 한시라도 그녈 잊은 적이 없는데 냉랭한 그녀를 대하는 것이 해리 보슈는 어색하기도 하고 심기도 불편하다. 하지만 공조수사라니... FBI는 왜 한 남자가 살해된 사건에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그것은 스탠리 켄트라는 이름의 피해자가 의학물리학자로서 방사능물질에 접근할 권한이 있었던 것 때문이다. 스탠리 켄트와 그의 아내는 괴한으로부터 협박을 받았으며 세슘이라는 위험한 물질을 무단 반출해 사라졌던 스탠리 켄트는 시체로 발견되었지만 세슘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행방을 알길 없다.
단서나 징후는 이제 대규모 테러를 의심하고 있다. 이제 레이첼 월링과 FBI는 세슘을 찾으려고 동분서주하는데 해리 보슈의 촉은 살인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해리 보슈는 직감에 수사를 내맡겨서 공식절차나 규칙 등을 무시해가며 밀고 나가기 때문에 불협화음을 빚으며 수시로 충돌하고 때론 위험천만한 상황에 빠지기에 역시 해리 보슈란 생각이 든다. 안 그래도 경찰과 FBI는 수사공조에서 영역과 권한에 따른 자존심문제로 원만한 관계가 아닌데 해리 보슈는 보란 듯이 누가 뭐래도 자신의 사명감에 투철할 뿐이다. 이런 점 때문에 레이첼 월링은 해리 보슈와 더욱 삐걱거렸으며 과거는 추억으로 사라지나 했다. 제발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깨달으라며 다그치는 레이첼 월링의 엄중한 경고에 해리 보슈도 이번만큼은 자신이 잘못 판단했다고 시인한다.
그 순간만큼은 아쉬웠다. 독불 장군 같은 해리 보슈의 신념이 언제나 옳다고 믿었었는데 결국에는 백기를 들고 마나 싶어 인정하기 싫은 마음이 꿈틀했으니까. 그런데 해리 보슈는 역시나 옳았다. 인간이 가진 마음의 심연을 들여다보는데 성공했다. 911테러 이후 신경과민에 빠진 미국 전체가 대동단결하여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을 때 그만은 숨겨진 진실을 밝혀낸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었다. 노련한 형사라면 사건 현장에 남겨진 흔적들에서 보이는 것들 못지않게 보이지 않는 그 무엇도 발견해낼 수 있어야만 한다. 첨단기기와 문명이 동원된 디지털 세계와는 동 떨어진 삶을 살고 있는 해리 보슈라 때때로 무안한 경우도 많이 겪게 되지만 인간이 개입된 아날로그적 세계에서만큼은 결코 사소한 틈이라도 놓치는 법이 없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제목대로 간과한 단서를 밝혀내는 그 예리함이란,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할 수 있었을까? 번번이 감탄한다. 동기 없는 범죄란 있을 수 없다는 믿음, 예외로 남을 뻔 했던 이번 살인사건의 동기에 처음엔 곤혹스러워했던 해리 보슈가 결국 손바닥에 그 동기를 올려놓고 범인을 밝혀내는 과정들이 생동감 있는데다 단단하고 저돌적인 느낌이어서 통쾌했다.
그러면서 향후 해리 보슈의 인간관계가 어떻게 그려질지가 궁금해진다. 잠깐 목소리만으로 출연한 전 파트너 키즈민 라이더는 그것만으로도 무척이나 반갑고 다시는 못 보는 것일까 노심초사하게 만들며 벌써부터 그립다. 야무지게 똑 부러진 라이더에 반해 새 파트너 이그나시오 페라스는 이 정글 같은 현장에서 제대로 버텨낼지 걱정될 정도로 아직 어설프고 고지식해서 해리 보슈와 파트너를 유지하는 동안에는 많이 시끄러울 것 같다. 그 점을 의식한 것인지 마이클 코넬리는 이 햇병아리 신참에게 인생경험과 수사경험을 제대로 가르칠 스승의 역할을 해리 보슈에게 맡길 의향임을 작가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어서 향후 시리즈에서 눈여겨볼만한 잔재미가 되지 않을까 기대된다.
아울러 이번 작품으로 세 번째 등장해 해리 보슈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레이첼 월링은 지금까지 만남과 헤어짐을 몇 차례 반복했던 해리 보슈의 연애사에 있어서도 별거 중인 엘레노어 위시 이후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토닥거리다가도 어느 순간 알 듯 모를 듯 분홍빛 기류를 살포시 띄우기에 도저히 안 맞는 사이 같아 보이다가 어느 순간은 예측할 수 없는 사이로 달리 보인다. 그래서 두 사람의 관계는 종착역이 어디쯤일지 미스터리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이클 코넬리의 의중에 달려있다고 보아야겠는데 작가 인터뷰를 보면 본인도 잘 모르겠다고 하니 상상만으로 가늠해보아야겠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해리 보슈를 노리는 공격도 분명 있을 것 같은데, 가령 전 경찰국장 어빙이라든지.... 때문에 만사불여 튼튼이라고 했는데 해리 보슈는 과연 위기상황이 닥쳐서도 지금처럼 무사히 벗어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