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송이 백합과 13일간의 살인 율리아 뒤랑 시리즈
안드레아스 프란츠 지음, 서지희 옮김 / 예문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그는 그녀를 품에 꽉 끌어나고 몸의 경련이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

 

한동안 그렇게 그녀를 세게 안고 있던 그는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오 빌어먹을!" 율리아는 분노한 나머지 두 손을 꽉 쥐었다.

 

"열두 번째 백합이야." 

 

 

 

독일 미스터리 스릴러의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추앙받고 있는 안드레아스 프란츠는 율리아 뒤랑 시리즈를 총 12편을 남겼고 <12송이 백합과 13일간의 살인>은 시리즈의 두 번째 케이스에 해당된다. 1편부터 순차적으로 국내출간 되었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유작부터 먼저 선을 보인 점은 뜬금없기는 했지만 이제라도 차례차례 나와 준다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던가. 보고 싶어도 1편만 선보이고 자취를 감춘 어느 인기 시리즈물이 복귀에 제동이 걸려 기약이 없다는 사례를 감안하면 고인이 된 안드레아스 프란츠는 사후에 비로소 빛을 보고 있는 셈이다. 읽어가면서 나도 모르게 빠져드는 범죄의 향연이 신묘하기만 하다. 이 시리즈는 그러하다.

 

 

 

 

열두 살 소녀 카를라는 한 달 전 처음 시작한 생리로 성장통을 겪고 있던 평범한 아이였다. 우연히 친구의 꾐에 빠져 파티에 초대받아 갔던 그날 밤에 어떤 일을 겪는다. 순진해서 세상 물정을 몰랐던 어린 소녀를 음흉한 무리들이 가만히 내 버려둘 리 만무한 것. 후회할 때는 이미 늦은 법이고 카를라의 인생은 지옥으로 추락한다. 그리고 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프랑크푸르트 경찰청의 율리아 뒤랑에게 12송이 백합과 성경 구절을 인용한 편지 한 통이 배달된다. 율리아는 혼란스러워한다. 도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편지를 보낸 것일까에 골몰하고 있을 때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이제야 알아차린다. 범인은 율리아에게 어떤 힌트를 남기면서 살인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범인은 율리아와 일면식이 있는 듯한데 그녀는 종잡을 수 없었다. 그녀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듬뿍 담긴 살인예고장은 잡을 테면 잡아보라는 식의 전면적인 도발은 들어 있지 않지만 인용된 성경구절은 계속된 살인을 막기 위해 율리아에게 주어진 도전장이자 숙제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두통거리였기도 하고.

 

 

 

 

살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달아 발생하고 살인예고장에 담긴 의미를 밝혀내지 못한 율리아 뒤랑은 언제나 한발 늦게 범인의 그림자를 따라 가기에 급급하게 되는데 살해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부와 권력, 명성을 가진 저명인사들이었던 것도 특징이다. 율리아만 모를 뿐 독자들은 범인의 심리와 범행동기 그리고 범행실행을 빠뜨림 없이 확인하게 되는데 범인의 시점과 율리아 뒤랑의 시점이 교차로 진행되면서 어떻게 하나의 뿌리로 다시 만나게 될지에 촉각을 곤두세워가며 읽는 재미에 흠뻑 빠지게 될 것이다. 8년 전의 사건이 불러온 비극은 가해자에 대한 피해자 측의 지극히 사적인 복수극이다. 공권력에 의지하고서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만들어 낼 수 없었던 것이 이유이다. 인간이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사연에는 생계 유지적 측면과 우발적인 측면, 원한, 돈 등이 대표적이겠지만 남부러울 것 없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위치에 있는 상류층에서의 범죄는 또 다른 접근이 필요할 것 같다 

 

 

 

 

 

겉으로는 화려한 성공에 풍족한 생활, 공인으로써 사회적 모범이란 가면을 쓰고 있지만 가면 뒤에 가려진 얼굴은 악마의 미소를 지으며 상상 조차 하기 힘든 추악한 욕망 충족을 위해 위선적인 작태를 저지르고 있기에 평범한 소시민들은 그 실태를 상상 조차 하기 힘든 실정이다. 그 점을 노리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자행되는 이들의 범죄는 실로 거대한 조직을 이루고 있으며 범인은 마치 도장 깨기를 하는 것처럼 순서대로 몸통과 머리를 분리하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어 처절한 피의 복수를 시도할 수밖에 없는 살인자의 눈물겹고 안타까운 사연들은 누구도 그를 비난하기는커녕 두 손 모아 응원하게 되는 심정이 된다.

 

 

 

비록 범인이 원수를 상대하는 방법이 패턴화 되어 있다는 점이 우려할 만하나 의심을 피해 성공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만큼 악이라는 나무가 수많은 가지치기를 하고 있기에 가능했다고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이 계통의 소설에서 범인이 범죄행위에 관한 힌트를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성경 구절의 속 뜻이 이런 용도로 재해석되기도 한다는 것은 자칫 식상할 수 있는 선입견을 통렬히 와해시키면서 효과적으로 재생산해낸 아이디어라는 점에서는 대단히 창의적인 발상이기에 최고의 칭찬을 해 주고 싶은 결정적인 대목이다.

 

 

 

 

12송이 백합에 담긴 의미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숫자의 범위에 산정되지 않고 은밀히 숨은 그림 찾기 하는 방식은 얼마나 우아하고 산뜻한가. 틀에서 벗어나 관점을 확대시키는 그 시도가, 그 결말이 물 흐르듯 자연스런 전개가 참 좋다. 무수한 상징과 은유들이 무리 없이 소설 전반에 잘 융화되니까 마지막 장을 덮고도 여운이 남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실화를 바탕으로 사전에 꼼꼼한 조사를 통해 완성해 낸 결과물은 단지 일회성으로 즐기고 망각해버리는 가벼움이 아니라 인간의 어두운 심연에 대한 묵직한 통찰을 담아내면서 왜 안드레아스 프란츠가 독일 미스터리 스릴러의 간판이 될 수밖에 없는지 세상에 고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 의의가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빛을 발하는 프란츠의 작품세계는 당당히 전진한다. 여전히 훌륭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