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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
기리노 나쓰오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개인적으로 가장, 아니 유일하게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여성작가는 기리노 나쓰오밖에 없습니다.
다른 여성작가들과는 뭔가 특별한 포스가 그녀에게는 느껴집니다. 결코 달달하지도 않고 어둠 속에서 빛 조차 들어오지 않는 구원없는 세상을 집요하리만큼 악의적으로 묘사하는 작품세계가 편할리가 없음에도 괘념치 않고 끊임없이 찾아 읽게 만드는 마력의 실체를 여전히 깨닫지 못한 채 오늘도 읽었습니다. <다크>는 <얼굴에 흩날리는 비>로 시작되는 무라노 미로 시리즈의 세번째 작품입니다. 두번째 작품인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은 어쩌다 못 읽고 건너뛰었지만 이 시리즈를 계속해서 읽을지는 이번 작품에 달려있습니다. <얼굴에...>는 읽은지가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미로의 남편은 인도네시아에서 자살했고 다음 남자인 나루세는 미로의 밀고로 살해죄로 구속 수감되었다가 감방에서 목 매달아 자살한 적이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녀에 대한 첫인상은 연약하고 무엇인가 소심한 둣한 평범한 여성이었다가 탐정으로 활동하면서 나름 강인한 모습으로 변모했고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관도 나름 정립된 똑부러진 면모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그동안의 공백은 미로에 대한 새로운 인식전환을 필요로 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다시 만난 미로 시리즈 3편 <다크>은 이제껏 은연중에 가지고 있던 미로를 비롯한 주요 등장인물들간의 관계에 철퇴를 내리는 듯한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무엇보다 미로와 아버지 무라노 젠조와의 상극의 관계가 고정관념을 들고 요동을 칩니다. 의붓 부녀지간이라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미로가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그야말로 적의에 가득 찬 시한폭탄이었습니다. 어릴적 친부가 죽고 의부가 된 젠조를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모녀지간을 갈라놓은 원흉으로 미워하더니 지금에 와서는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 나루세의 자살을 숨겼다는 이유로 아버지를 죽이려 갑니다. 그 자리에서 애꿎은 개를 죽이고 지병이 있는 젠조가 약을 못 먹게해서 죽도록 만드는 악행을 저지릅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애정과 존경으로 이어져있을거라는 상식이 통렬히 산산조각납니다. 미로라는 여자를 어떻게 이해해야할지요, 선과 악이라는 단순한 척도로는 그녀를 가늠하기란 불가능해졌어요.
이제 미로는 의붓아버지 젠조의 동거녀였던 맹인 마사지사 히사에와 자신에게 돈을 빌려준 게이 도모베, 아버지의 동료였던 대만계 야쿠자 데이, 3명의 추적을 받게되면서 우연히 만난 한국남자 서진호를 만나 위조여권을 받아 한국으로 밀입국합니다. 그녀를 쫓아 한국까지 온 히사에와 도모베를 피해 서진호와 동거하면서 짝퉁 명품을 파는 일을 돕게됩니다. 낯선나라 한국에서의 제2의 서막!!! 이 책을 선택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한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부산, 광주, 서울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한국에서의 여정은 한국독자라면 주목할만합니다. 서진호가 과거 겪었던 80년대 광주 민주화항쟁, 부산의 산동네 마을 등은 한국사람이라면 살면서 잊지못할 기억들인데 그 점들을 작가는 일본인의 관점에서 충실히 재현내었다고 여겨집니다. 한국을 배경으로 창작한 이유는 어떤 것인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후속 시리즈에서 이것 이상은 못 만날 것 같은 지옥같은 현실과 내면의 혼돈 속에서 끈이 툭하게 잘려나간 것같은 미로를 지켜봅니다(더군다나 성 폭행당해 아이까지 낳아버린). 최악의 상황에서 일본으로 귀국한 그녀는 아버지와의 관계는 단절되어 고원무립의 처지가 되었습니다. 탐정이 아닌 하드보일드한 여성으로 세상에서 살아남기가 그녀에 주어진 과제이자 숙명이 된 것 같네요. 앞으로는 더 어둡고 살기 힘든 세상이 될 거라며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사회라고 자기 딸에게도 말했다는 기리노 나쓰오의 잠재의식 속에는 싸구려 감동에 좌지우지 되지말라는 냉정함이 가득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희망을 쥐똥만큼 흘렸을지도 모를 무라노 미로 시리즈에서 이제 더 이상 구원은 없다면 철저히 안면몰수하고 돌아서는 분기점이 이번 작품에서 드러났다고 판단됩니다. 무라노 젠조의 죽음 이후 무라노 미로의 남은 삶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미지수겠네요. 그것을 써내려갈 기리노 나쓰오는 흉포합니다.
그 점에서 여전히 매료되고 중독됩니다.
이 불량식품같은 여자의 소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