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이동윤 옮김 / 검은숲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그녀는 무슨 일에 손을 댔던 거죠?"

  카렐라가 물었다.

 "아이스입니다."

 

범죄소설 역사상 최고의 경찰소설로 꼽히는 '87분서 시리즈' 중기걸작으로 불리는 <아이스>를 방금 읽었습니다. 먼저 출간된 <살의의 쐐기>를 무척이나 재밌게 읽었던지라 동 시리즈의 또다른 작품을 선택하는데에 있어서 일말의 주저함없이 정말 단숨에 빠져들었는데 역시나 훌륭합니다. 경찰로 재직했던 경험도 없고 경찰이 되고 싶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이 조사원의 도움을 받아 수사업무나 현장에 관해서는 누구보다도 현실성있게 소설 속 배경으로 작품을 발표해온 그였기에 경찰소설의 재미를 한 차원 끌어올린 이번 작품도 범죄를 조사하는 형사들의 애환과 활약상이 경쾌하고 날렵하게 녹아있습니다.

 

인기뮤지컬 "팻백"에 출연 중인 여자 무용수 샐리 앤더슨 극장을 나와 자신의 아파트로 귀가하다 낯선 남자로부터 얼굴에 두 방,  가슴에 한 방씩 총을 맞고 죽습니다. 그녀를 죽인 38구경의 총이 3류 마약상과 보석상의 사체에서 감식된 총기와 동일하다는 조사결과가 나오면서 수사권은 '87분서' 맡게됩니다. 3건의 사건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38구경은 단순히 미치광이의 소행인지 면식범의 소행인지.... 사건의 연관성을 밝히기 위해 스티브 카렐라 마이어 마이어 형사가 한 조를, 버트 클링 아서 브라운 형사가 한 조를 이루어 각자 수사를 진행하기 시작합니다.

 

<살의의 쐐기>에서처럼 이 작품도 한 가지 사건만을 전담하지 않고 중간중간 다른 미제사건들을 해결하는 과정들을 보여줌으로서 자칫 올인에 의한 단조로움을 피하면서 이야기의 분산을 통해 도시의 범죄를 해결하는 형사들의 팀워크가 1인 시점의 단독수사와 차별화될만한 매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검은 숯 블로그의 성분표에서도 확인 가능하듯 독자를 기만하는 대반전이나 논리정연한 해결에는 높은 점수를 매기긴 힘들 것 같네요. 범인의 정체나 범행동기에서 있어서도 의외성 대신 흔히 용의선상에 오르는 인물들 중 가장 그럴싸한 관계에 있는 자에서 출발해서 원점으로 회귀하고 있어 의심은 멀리하지 말고 가까이에 두라는 공식을 모범적으로 전개했습니다. 대신 가장 큰 즐거움은 역시나 매력적인 캐릭터들의 향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살의의 쐐기>에서의 실질적인 주인공이 스티브 카렐라 형사였다면 <아이스>에서는 버트 클링 형사가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큰 키에 핸섬한 금발로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지만 여자문제로 골머릴 썩히는 캐릭터로 설명되는 버트 클링 형사는 역시나 이번에도 여자와의 관계에서 불거진 아픔에서 상처입고 괴로워하게 됩니다. 장애인 아내 테디와 닭살돋는 애정행각으로 훈훈한 감동을 주는 카렐라와는 달리 클링은 아내의 불륜을 목격하고 이혼한 상태입니다.

 

상심이 컸던 탓인지 동료들로부터 그가 혹시 목구멍에 총구를 박아 자살하지 않을까 염려와 배려를 받을 정도로 정신줄을 좀 놓은 지경이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게 하구요. 그런 클링에게도 여형사 아일린과 새로운 로맨스가 싹 트려고 합니다. 아일린클링에게 호감이 있어 가까이하려고 하지만 아내의 배신에 충격먹은 클링은 마음의 빗장을 걸고 문을 좀처럼 열지 않는 밀당관계가 이번 작품의 주 내용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클링이 안쓰럽지요. 둘 사이가 핑크빛 무드로 본격적인 진도가 차차 진행될 조짐도 있어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제목인 <아이스><살의의 쐐기>처럼 그 의미가 중의적 표현으로 해석되고 있는 점도 여전히 이채롭습니다. 샐리의 주변사람들과 그녀의 과거 행적을 조사하던 중 흔히 공연문화에서 하나의 전통이자 관행처럼 변질되고 악용되는 어떤 거래를 은어로 "아이스"라고 한답니다. 피해자가 없는 범죄지만 엄연한 불법에 해당되기에 실제로 이 같은 일이 얼마나 자행되는지 알 방법은 없지만 암암리에 뒷거래로 검은 차익을 챙기는 세력들을 생각하면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더군요. 그것이 전통이라니요? 관행이라니요?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여기에서 사용된 은어인 "아이스"는 맥거핀에 불과하단 점이고 자칫 속아넘어 갈 뻔했던 아이디어였습니다. 진실은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이죠. 또한 "아이스"는 다른 의미에서는 범죄자와 맞닥뜨려 생명의 위협을 받는 순간 느끼게되는 공포의 순수결정체를 표현하고 있기도 합니다. 심장이 얼어붙을 것 같은 극한의 위기상황을 맞은 아일린의 마음은 얼음입니다.

 

이렇게 캐릭터와 특정단어가 주는 즐거움외에도 진짜 마약같은 대사와 상황설정에서 비롯되는 경찰서 내 형사들과 잡범들의 우스꽝스러운 대목들도 배꼽잡게 할만큼의 유머가 있어 좋습니다. 술주정뱅이와 임신한 매춘부의 활약(?)은 중반 이후 진중한 전개로 나아가기 전 워밍업 효과를 느끼게 할만큼 초반부의 일등공신들입니다. 시리즈로서 유머감각은 켄지&제나로 시리즈 이후 최고가 아닐까 합니다. 특출난 강점보다는 전주비빔밥처럼 전반적인 성분들이 골고루 양념에 배어있어 이 시리즈를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도 즐거운 독서가 되지 않을까 하는데 '87분서' 형사들의 외모, 출신, 성명, 인종 등 각자의 프로필을 이번에도 친절하고 자상하게 설명하고 있어 작가의 배려이자 패턴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

 

그렇지만 다시 설명들어도 여전히 그들에 얽힌 일화들은 쏠쏠하게 재밌습니다. <살의의 쐐기>가 맘에 들었지만 단지 적은 분량에 아쉬웠던 분들에게 불어난 두께만큼 경찰소설로서 읽는 재미도 더 만끽하게 되리라 장담하면서 작년에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가 발견의 기쁨이었다면 올해는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가 저에게 수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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