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자비를 구하지 않는 여자 ㅣ 블루문클럽 Blue Moon Club
유시 아들레르 올센 지음, 서지희 옮김 / 살림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조용히 해, 널 죽이려는 게 아니니까.
오히려 너에게 상황을 더 악화시키지 않을 기회를 주는 거야.
질문에 대답만 해. 우리가 왜 널 여기에 가두고 있을까?“
이 소설의 표지를 두고 입방아를 찧는 분들이 많지만 원래 살림에서 출간되는 소설들은 원래 표지가 그러려니 하고 넘어 갑니다(헤드헌터를 떠 올린다면). 더 이상 언급하면 손만 아프니까요. 대신에 스릴러 소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일반소설에서는 손길이 가지 않는 다양한 국적의 소설들을 만날 수 있는 즐거움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덴마크를 배경으로 한 스릴러를 독일작가의 작품으로 예전에 한 번 읽은 적이 있지만 오리지널 덴마크 소설은 사실상 처음입니다.
소설은 한 여자가 손끝에 피가 맺힐 때까지 미끄러운 벽을 긁어대는 장면으로 시작되는데요. 그녀는 지제장애자인 남동생과 여객선을 타고 가다 누군가로부터 납치당해 5년째 어딘지도 모를 폐쇄된 공간에 갇혀 지내게 됩니다. 범인들은 음식과 물, 용변기까지 때마다 교체해주며 그녀, 메레테 륑고로를 감금 감시하는데 아무래도 돈이 목적이 아니라 원한에 의한 복수인 것처럼 보입니다. 메레테는 유능하고 매력적인 여성 정치인으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던 중이었기에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정적이거나 이익단체의 소행이 아닌지 의심도 해보지만 사고사로 비쳐진 그녀는 세월의 흐름 속에 세간의 관심에서 점차 멀어지며 잊혀지는 존재가 될 위기에 처합니다.
이 때 그녀의 실종에 의문을 품고 행방을 찾기 위한 수사에 돌입한 경찰조직이 등장합니다. 칼 뫼르크 경위와 시리아인 조수 아사드가 그들인데 칼은 범죄현장에 동료들과 출동했다가 범인들에게 습격 받아 동료 중 한 사람은 사망하고 한 사람은 불구가 된 상황에서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외상적 장애가 있는 문제적 형사입니다. 그 사건의 후유증으로 히스테리를 부리는 칼은 동료들로부터 왕따 당하는데 때마침 미해결 사건을 전담하는 디파트먼트 Q가 신설되면서 수장으로 임명됩니다.
그렇게 자타에 의해 조수 아사드와 함께 맡게 된 첫 수사가 메레테 실종사건이었으니 그 과정은 순탄치만은 않습니다. 동료형사들의 계속된 배척, 언론사 기자를 수사명목으로 협박했다는 악의성 보도까지 터지면서 미운 털 박힌 오리새끼로 낙인찍혀 버리는 우여곡절을 겪어가며 단서수집에 총력을 기울인 결과 마침내 사건의 배경과 배후인물을 밝혀내는데 성공합니다.
사실 범행 동기는 중반부에 이르면 무엇이고 범인들의 정체가 누구인지 알아차리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입니다. 작가는 친절하게도 독자들이 눈치 챌 수 있도록 장치를 고안해 두었으니까요. 대신 등장인물들의 캐릭터 성격을 분석하는 일이 더 재밌을 거 같네요. 칼 뫼르크 경위는 이제껏 보았던 형사들과 크게 차별화될 정도로 부각되는 면은 없는 것 같지만 아사드는 좀 다릅니다. 국적이 시리아로 나오지만 정황 상 여러 가지 의심스러운 점도 많고 머리가 비상한데다 손재주도 뛰어나고 칼이 놓치기 쉬운 소소한 단서 하나도 흘리지 않고 꼼꼼히 내조하는 매의 눈이기도 해서 두 사람이 파트너로서 상당한 궁합을 자랑합니다. 그 관계의 상호작용이 시너지효과를 불러일으키며 보여주는 재미가 쏠쏠하지요.
사실 이 소설은 독창적이라기보다 어디선가 본 듯한 설정들이 발견되는데요. 납치 감금된 여인의 모습으로 시작되는 것, 정치적 논리와 인기영합 차원에서 별도 신설된 경찰조직의 밥그릇 신경전, 주인공에게 자신을 안락사 시켜달라는 환자의 요청, 유능한 여성 정치인이 타겟이 된다든지 요소요소가 하반기에 먼저 읽은 북유럽의 모 스릴러 소설을 적잖이 연상시키죠. 두 소설 중 어느 것이 먼저 출간되었냐로 논란에 불을 지피기보다 스릴러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설정 정도로 종식하는 게 바람직 할 것 같네요.
그렇게 익숙한 설정들에도 불구하고 감압 조정을 이용하여 피해자에게 끊임없이 심리적, 육체적 고통을 가하는 범인들의 방식이 구출과정과 어우러져 스릴만점, 간장백배에 상당히 일조한 점은 탁월했습니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만들었던 스토리의 강약 전개는 불면의 밤을 달래주기에 최적화된 선택임은 분명합니다. 또한 Q가 지니는 미스테리한 상징성에 잘 어울리는 남자 아사드의 비밀과 아마게르 섬에서 칼 일행을 습격했던 빨간 체크무늬 남자 일당들에 대한 수사지속 여부도 이 시리즈가 진전되면 남겨 놓을 숙제가 아닐까 싶은데 그래서 더욱 기대되는 후속편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북유럽 스럴러의 진수를 맛볼 수 있었던 <자비를 구하지 않는 그녀>는 많은 분들에게 추천하고픈 소설이랍니다.
"잘 자. 메레테.“
그는 조용히 말했다.
“부디 지옥의 영원한 불길이 너를 집어삼키기를.”
말을 마친 그는 스피커를 껐고. 이제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