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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이 영원히 계속되면
누마타 마호카루 지음, 민경욱 옮김 / 블루엘리펀트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주중에 출장을 갔다가 KTX 타고 부산으로 내려와서 개인적인 일을 좀 본 뒤 오랜만에 서점엘 들렀다. 집에 가는 동안 심심한 나를 달래 줄 소일거리가 필요했던 것인데 마지막 서점 방문일이 언제였는지 까마득할 정도로 낯설다. 무슨 소설을 살까? <악당들의 섬>?, <61시간>?, <수차관 살인사건>? 한참을 고민 끝에 선택한 소설은 누마타 마호카루의 <9월이 영원히 계속되면>이다. 요즘 이 작가는 <유리 고코로>와 함께 2종이 출간되면서 만만치 않은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듯하다. 솔직히 처음엔 이 작가의 두 작품 다 관심 밖이어서 염두에 두지 않았는데 이 소설은 호평과 더불어 막장 논란까지 가열되는지라 저급한 호기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마냥 호평 일색이거나 마냥 혹평 일색이었다면 나랑 인연은 없었겠지만 이렇게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소설을 보면 과연 나는 어느 쪽에 서게 될지 확인하고픈 맘이 절로 드는거다.
잘못 잡았다는 생각이 바로 들기 시작한다. 최대 이슈였던 막장에 대한 논란에 불을 지폈던 단초가 무엇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원래 일미들은 어느 정도의 막장을 밑밥으로 깔고 있는데 “인간 내면의 깊은 어둠을 상당히 선정적이고 그로테스크하게 묘사해 일본 추리소설계를 발칵 뒤집은 충격의 베스트셀러"라는 홍보문구에 전혀 공감이 되지 않는다. 막장 오브 막장-선정적이고 그로테스크하다는 점에서는 아비코 다케마루의 <살육에 이르는 병>이 진정한 지존이 아니던가? 읽어본 사람들은 공감하겠지만 읽던 도중에 지하철에서 뛰어내리고 싶게끔 할 정도라든지, 유해도서로 분류해 도서관에서 과감히 퇴출해야한다는 등의 극강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막장의 선두주자인 <살육에 이르는 병>에 비하면 이 소설은 그야말로 갓난아기 수준에 불과하단거다. 자! 막장을 보여주시오! 난 막장이 보고 싶었건 거다.
주인공들을 살펴보자. 전 남편의 현재 부인이 데리고 온 딸이 사귄다는 젊은 강사와 육체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사치코는 비도덕적인 행태로 비난받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이혼녀인 그녀의 남자관계는 불륜도 아닌 그냥 개인의지에 따른 이성관계일 뿐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여자 주인공 아사미는 어떨까? 과거에 오빠가 보는 앞에서 뭇 남자들부터 성폭행을 당한 끔찍한 상처에 고통 받는 가련한 여자이다. 물론 ‘남자를 광견으로 만드는 여자, 스스로 만들어낸 광견의 이빨에 수없이 자신의 몸을 물어뜯기는 여자’로 대변되는 복잡한 내면이 꽈리틀고 있는 그녀는 동정과 연민을 벗어난 이해불가적인 측면도 분명 있다. 사치코의 전 남편인 안자이 유이치로 외에도 배다른 남매간의 사랑 등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인간관계가 얽히고 섥혀있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까지이다. 이 소설에는 진정한 악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욕망에 충실하고 싶어하는 보통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오히려 TV드라마에서 막장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이 정도 전개나 설정은 그동안 일본 소설에서 충분히 체험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전형적이고 예측 가능한 이러한 패턴은 익숙하다 못해 진부하기까지 하다. 나를 불쾌하게 할 막장이 곧 나오겠지, 아니면 충격적인 반전이 결말에? 내내 고대했지만 마지막까지 나의 기대감에 배신을 때리고야 만다. 내내 안개 속으로 몰고 가다가 결정적인 한 방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냥 속 터질 정도로 모호하고 미련하다.
그래서하는 말이지만 흔히 일본소설의 특징은 극단적이라고 한다. 이 소설은 한 남고생의 실종에 큼직한 미스터리를 심고 그 이면을 추적추적 들추어 나가지만 결국 집착이 가져온 자학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질질 끌더니 별다른 대안도 못 내놓고 허무하게 마무리하고 만다. 가독성도 물론 별로이다. 그러면서 텐도 아라타의 소설들을 읽었을 때의 유사한 질감이 어렴풋이 느껴지기도 한다. 집착과 자학, 설교적인 그런 느낌들 말이다. <애도하는 사람들>의 경우 집착과 자학 속에서도 일말의 슬픔과 인생이라는 배에 올라탄 사람들의 자기성찰도 확인할 수 있고 <영원의 아이>에서는 어두운 상처를 가진 이들이 늪 속에서 빠져 나오려다 힘에 부쳐 익사하고 마는 광기 속에서 처절한 아픔도 느낄 수 있었지만 <9월이 영원히 계속되면>은 집착과 자학에 대한 고통만이 있을 뿐 여운이 없다. 새롭지 않은 식상함으로 56세의 늦깎이 나이에 문단에 데뷔한 솜씨가 이 정도라면 후속작에서 한층 발전된 필력을 발견할 수 있을지 심히 의문스럽다.
예상했던, 기대했던 것만큼의 막장도 없고 재미는 더욱 발견하기 힘든 이 소설은 일본 소설을 읽을 때의 각자의 지향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는 작품일수도 있겠다. 나는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범인을 밝혀내어 검거하는 과정을 가진 범죄물을 확실히 선호한다. 거기에는 최소한 감정이입에 따른 몰입과 권선징악이라는 두 마리 토끼는 잡을 수 있다. 불안한 심리만을 묘사하고 있는 이 소설은 나를 허탈하게 한다. 그렇게 호들갑떨만한 케이스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엔돌핀이 팍팍 돌만한 소설이 그리워진다. 그렇다면 누쿠이 도쿠로의 <진실과 후회의 빛> 만큼은 기대치를 충족해줄 것만 같다. 출간이 임박해서 냉큼 신청해서 곧 수중에 들어올 테니 나의 빈속은 그때 채워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