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미스터 최 - 사노 요코가 한국의 벗에게 보낸 40년간의 편지
사노 요코.최정호 지음, 요시카와 나기 옮김 / 남해의봄날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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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국적도 성별도 다른 두 사람이 장장 40여 년 간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기 그지없다. 요즘 같았다면 SNS가 그 자리를 대신 채웠겠지만 그때는 편지교환이 현실이었고 친필 편지 자체가 아날로그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면서 나도 예전에 펜팔을 잠시 했었던 추억을 소환할 수 있었다. 좋아하는 해외 록밴드 이름을 잡지 투고란에 올렸더니 자신도 좋아하는 밴드라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과감히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먼저 편지를 보냈다던 그녀가 있었다. 우리는 한동안 그렇게 음악 이야기를 편지에 재잘거렸었다.

 

 

이름과 사는 동네 정도만 알지 나이는 서로가 몰랐던 우리는 점차 편지교환에 시들해버렸다. 먼저 마음이 식은 건 나였지만. 귀찮은데다 더 이상 쓸 말이 없었다는 게 당시 나의 변명이자 속마음. 그래서 최정호 교수와 사노 요코 작가가 30대부터 70대까지 그렇게 오랜 세월을 편지로 쏟아낼 말들이 무궁무진 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고 요즘같이 한일 관계가 부쩍 불편해진 요즘을 돌아보면 러브레터가 아닌 순수한 우정으로 맺어진 두 사람의 사이가 문득 부럽기도 하다.

 

 

최정호 교수가 사노 요코 작가를 처음 만나서 한국 국가대표가 되어 일본을 잘근잘근 씹어댔더니 사노 요코 작가는 그냥 하이, 하이 하면서 아무런 반박도 못한 채 듣고만 있었다거나, 자신은 착한 일본인이라며 한국이 일본을 침몰시킨다면 자신과 남편만은 살려달라는 말 등 혐한을 토해내는 다른 일본 지식인들과는 다른 자기성찰이 엿보여 호감이 상승하더라는.

 

 

특히 기억에 더 남는 이야기라면 남자가 오줌으로 땅위에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에 시적이고 우주적으로 멋진 일이라고 하는 대목이다. 방심하고 읽다가 빵 터졌는데 처음에는 참 독특한 사고방식을 가졌구나, 라고 생각했다가 뒷이야기를 마저 읽고 나서 그녀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 것도 아닌 잡설 같은데도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훅하고 숨결을 불어 넣는 기분이라서 그녀의 편지는 늘 읽는 사람의 마음을 이완시킨다. 참 기분 좋은 편지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출산 때는 섹스에 복수당하는 것 같아 이를 갈았는데 막상 아이를 낳고 나니까 그때까지의 모든 원망과 증오가 눈독 듯 사라지면서 즉시 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들이 여든 살이 되면 자신은 이 세상에 없을 테니 외로움을 어떻게 달랠지 걱정이 되어 울었다고 한다. 이미 내 눈가도 붉어져있던 순간이었다. 늘 인정하게 되지만 모성애의 숭고함을 다시 한 번 일깨운 감동적인 글이기도 했다.

 

 

이렇듯 두 사람은 허물없이 언어유희로 웃기고 울리면서 격의 없는 우정을 나누었고 사노 요코 작가는 최정호 교수를 존경한다고까지 했다. 서로의 인생에 응원과 공감은 희노애락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잘 버무려진 무척 감동적인 편지들이어서 흐뭇했고 진정 아름다웠다. 반복해서 읽으면 새로운 매력이 샘물처럼 쏟아지는 사노 요코 작가의 편지를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해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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