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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인 소녀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6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제 국내 출간된 사와자키 탐정 시리즈는 이것으로 모두 읽어버렸다. 워낙 과작 작가라 띄엄띄엄 나오는 타이밍을 따라 잡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못다 한 숙제를 막 끝낸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 제목 때문에 공공장소에서 대놓고 읽기에는 따가운 눈총들이 부담스럽더라는 일화들이 간간이 기억났고.
초여름 점심때가 조금 지났을 무렵, 사무실로 걸려온 전화 한통을 무심코 받았다가 이렇게 일이 커질 줄은 몰랐을 것이다. 행방불명 중인 가족문제로 상담하고 싶으니 집으로 찾아와 달라는 말에 탐정 일의 특성 상 수임여부를 가려가며 결정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래서 시킨 대로 방문했더니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다가 다짜고짜 경찰서로 모셔가는데 참 황당하다.
촉망받던 바이올린 천재소녀가 돌연 실종되었고 유괴범으로부터 몸값 6천만 엔을 지불하라는 연락을 받아서 사와자키가 돈을 받으러 온 공범인 줄 알았다는 거였다. 과거 탐정 사무소에서 함께 일했던 와타나베가 각성제와 돈을 들고 잠적한 일이 있어 경찰과 야쿠자 양측한테 두고 두고 시달렸던 안 좋은 전력 때문에라도 이렇게 의심받는 게 억울하지만 또 이해가 된다.
유괴범이 콕 집어 사와자키를 이용해 경찰의 동태를 떠본 작업은 상당히 영리한 시도였으니 이후 진짜로 돈 가방 배달꾼으로 지명당하는 게 번거롭고 짜증나지. 그냥 빠지겠다고 하면 될 것을 언제나 귀찮은 일에 끼어 생고생 하는 게 다반사가 된지라 이번에도 물고 만다. 주변사람들 입장에서 본다면 하는 일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지랖 넓어 탈이라는 소릴 들을게 뻔해.
그러나 일이란 것은 이번에도 역시나 꼬인다. 경찰 수사 협력차원에서라도 꼬리를 무는 데 성공했다면 좋으련만 뒤통수와 실패는 병가지상사. 탈탈 털린 돈 가방. 사와자키는 경찰이 질색하거나 말거나 소녀 유괴사건의 진상을 단독 조사해 나간다. 소녀의 가족을 중심으로 친인척 등 이런 범죄를 저지를 만큼 경제적으로 궁핍한 이가 있을까?
최근에 읽은 요 네스뵈의 <리디머>에서도 범죄의 동기를 따라가다 보면 돈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했던가. 소녀는 교살된 시체로 발견되었으니 돈이 주목적이라면 이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발에 땀이 나도록 부지런히 조사한 결과, 진상은 멀리 내다볼게 아니라 의외로 가까이에.
그것도 안타깝고 씁쓰레하며 비정하다고 해야 할, 눈 가리고 아웅식의 선택에 달린 문제였던 것이다. 명분의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이며 인간답게 산다는 것 또한 어떤 선택의 기로
에 놓여있는지는 각자의 판단에 따르면 되는 것일까? 역지사지라면 나 또한 다른 생각을 하게
될지는 단정 지을 순 없어도 순간순간이 평생을 좌지우지하는 건 맞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