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리티 버블
지야 통 지음, 장호연 옮김 / 코쿤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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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기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보이는 모든 것들을 바꿨다. 이 변화는 급속히 일어나 모두가 알아챘지만, 우리 주변에는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들을 바꿔놓을 수 있는 수많은 것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이것들을 무엇으로 정의하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고, 더 나아가 앞으로 내가 살아갈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을 얻고 싶었다.


독서 iNG

1장. 열린 유리병

유리병이 열렸다. 나는 뛰어나갈까?


미생물은 다세포 생물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있어야 하는 산소를 생산한다. 우리는 산소가 주로 나무들이 호흡으로 내뿜는 물질이라고 배웠지만, 실제로 산소의 28%만이 우림 지대에서 나온다.

 왜 그렇게 가르쳤을까. 하찮은 미생물 따위가 우리가 숨 쉬는 산소를 생성하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걸까. 인간과 미생물이 공생이란 관점을 보고 '버블'이 뭔지 조금 알 것 같다. 

 장 속에 있는 유익한 균이 나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인간'인 내가 미생물 따위랑 공생한다는 관점을 무의식에서 받아들이지 못했나 보다.

 무의식중에 기생이라고 생각했는데, 기생이 맞았다. 그들에게 내가 기생하고 있었다. 진짜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사는구나.


오늘날 야생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은 크기가 줄어드는 반면, 인간과 가축화된 동물들은 급속히 부풀어가고 있다.

 인간 때문에 지구 온도가 올라가 야생 동물들은 크기가 줄어드는데, 인간은 부푼다. 사람들의 비만율이 높아지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야생 동물의 크기가 작아지는 건 몰랐다. 

 인간이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지구 곳곳에 민폐를 끼치고 있다.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다." 규모맹은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규모의 감각을 잃으면 느낄 수 없고, 느낄 수 없으면 적절하게 반응하는 능력을 읽기 때문이다.

 점점 사회가 파국으로 치닫는 이유를 알겠다. 무한히 작거나 무한히 큰 것에 대해 탐구하면서 그것을 우리 입맛에 맞게 사용한다. 근데 사용만 한다. 크기가 너무 터무니없이 작거나 커서 그 이상은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사용한 것에 대한 적절한 반응을 해야 하는데, 그걸 모른 척하고 있으니 세상이 엉망이 될 수밖에.



 유리병에 가뒀던 벼룩은 뚜껑을 열어도 도망을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잠시일 뿐이고 금세 뚜껑 밖으로 나가버린다. 

 반면 인간은 자기 생각이 맞았다고 확신하면 웬만해서는 그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벼룩으로 친다면 평생 유리병에 갇혀 사는 것인데, 얼마나 멍청한 짓인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않으려고 하는 데다 보여도 받아들이지 않는 이 인류가 얼마나 지속할지 의문이다.


1장. 열린 유리병 코멘트: 유리병이 열리면 뛰어나가는 벼룩, 유리병이 열려도 쳐다보지도 않는 인간


2장. 마음의 폭탄

내 살가죽은 어디서 온 것일까? 내 피는? 내 장기는?


재활용되는 것은 물만이 아니다. 우리 몸을 이루는 탄소의 대략 3분의 2는 우리가 먹는 식물과 식물이 내쉬는 이산화탄소에서 나오며, 나머지 3분의 1은 수억 년 동안 땅속에 파묻혀 있던 석유와 가스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내가 마시는 물이 단순히 지하수가 정제된 것으로 생각했지 그 지하수의 근원은 어디일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지금 샤프로 글을 쓰는데 이 탄소도 수억 년을 돌고 돌아 지금 여기 쓰이고 있다.

 '재활용'을 원소의 관점에서 보는 게 새로웠다.


우리의 두 번째 맹점은 우리가 주위의 우주와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보지 못하는 것이다. 천문학자 미셸 탈러가 말했듯이 "사실 우리는 하늘 위에 올려다보이는 죽은 별들이다."

 내 몸을 구성하는 게 어디서 왔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신기했다. 나는 죽은 별이지만, 죽은 별은 내가 아니다. 

 잠시 우주의 원자를 빌려 쓰고 죽을 때 내놓고 가야 하는데, 이런 관점에서 화장하는 장례 방식이 문득 기이하게 느껴졌다. 잠시 와서 빌려놓고 그걸 엉망으로 되돌려준다. 인간은 참 이기적인 존재다.


2장. 마음의 폭탄 코멘트: 나는 죽은 별이지만, 죽은 별은 내가 아니다. 나는 다른 것들과 긴밀히 연결된 우주의 아주 미세한 존재일 뿐이다. 그러니 내가 빌려 쓴 걸 고스란히 잘 반납하고 돌아가야한다.

3장. 눈을 맞추다


느끼고 생각하고 말할 정도의 의식을 갖춘 종은 유일할까?


지구상에 적어도 870만 종의 다른 동물들이 있고 저마다 자신만의 지각하는 방법이 있다.

 인간이 다른 종과 다르게 특별한 점은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들 말한다. 사고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악성 종양과 양성 종양을 구별해 내는 집비둘기도 사고한다. 그럼 인간과 집비둘기는 같은 사고를 하는가? 이렇게 보긴 어려울 것 같다.

 여러 가지를 할 줄 알아서 다른 종보다 나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동물들이 저마다 자신만의 지각 방법을 가졌지만 인간은 그 개별 수준에 못 미치더라도 일정 수준을 가지고 있고 부족한 부분은 기계가 다른 것들의 힘을 통해 채울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니 우리와 같이 살아가는 동물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낯설고 이질적으로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이를 열등하다고 믿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보는 게 눈앞의 사물을 인지하는 능력인데, 망막으로 할 수도, 초음파로 할 수도, 심지어는 혀를 튕겨서도 할 수 있다. 

 다름을 열등으로 인식하는 내 좁은 사고가 부끄러웠다. 다른 건 그냥 다른 거다.


우리의 맹점은 인간이 예외라는 믿음이다. 인간만이 느끼고 생각하고 말할 정도의 의식을 갖춘 유일한 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슬로보드치코프의 연구가 보여주듯이 프레리도그도 주위의 세상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

 왜 나는 그동안 인간만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하찮은 동물 따위와 인간의 지능을 비교에 두기 자체를 꺼리는 교육의 폐해일까.

 책을 읽어나갈수록 의문이다. 그럼 인간은 도대체 뭔지. 더 나아가 나는 뭐 하는 인간인지. 혼란스럽다.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하는 한 가지 기본적인 것이 있다. 우리 종이 어떻게 생존하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완전히 까막눈이다.

 나는 그냥 나인데. 그냥 생존하는 건데. 책을 읽으며 계속 사고에 충격이 가해졌다. 

 다음 장에서 작가가 어떤 충격을 던질지 기대된다. 나는 어떻게 지금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일까?


3장. 눈을 맞추다 코멘트: 다른 종에게 눈을 맞춰야 한다. 인간을 절대 개체가 우월해서 먹이사슬 꼭대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다른 동물들이 가진 능력의 평균치를 여러 개 가졌을 뿐이다. 그게 지구를 마음대로 제 것인 양 쓰고 다른 동물 위에 군림할 권리는 못 된다.


4장. 재앙을 향해 다가가다


야생의 닭 vs 양계장의 닭 vs 치킨너겟

뭐가 가장 자연스러운가요?


다양한 지리적 선호도를 충족시키고자 완벽한 '황금빛 색상'을 원하는 양계업자들은 모이에 붉은색 카로필과 노란색 카로필을 추가하기도 한다.

 기도 안 찬다. 그동안 노른자 색깔을 보면서 신선함을 판단했는데, 그게 전부 기만이었단 말인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꾸며진 건지 이제는 무서울 지경이다.


세상에는 수백만 종의 다른 종자들이 있지만 12종의 식물과 5종의 동물이 전 세계 소비 식량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것이 현실이다.

 의존도가 생각보다 더 심하다. 동물만 해도 소, 닭, 돼지, 오리, 아마도 염소...? 이렇게만 먹는다. 너무 당연한 사실인데 왜 몰랐을까. 

 심지어 품종도 가장 소비가 잘되는 단일종인 경우가 많아 식량 위기가 마냥 뜬구름 잡는 소리는 아닌 것 같다.


생물의 다양성이 사라지는 것이 우리가 식량으로 키우는 식물 때문만은 아니다. 세계자연기금에 따르면 전 세계 생물 다양성 손실의 60%는 우리가 우리 식량을 먹이기 위해 사용하는 땅에서 기인한다.

 먹어서 없애고, 먹겠다고 없애고. 나도 같이 소비를 하는 입장인데, 육식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이 생각만 몇 년 째 인지 모르겠다. 여러 매체를 통해 육식을 폐해를 접했지만 당장 피부로 와닿는 불편함이 없고 그 맛을 잊을 수 없어서 육식을 줄이지 못한다.

 지구가 인간만의 것이 아닌 게 자명한데, 이렇게 주인인 양 쓰다 우리는 정말 멸종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부자연스러운 것을 만들기 위해 자연스러운 것을 파괴하고 있다.

 자연스러운 것과 부자연스러운 것의 의미가 뒤바뀌는 날이 언젠가 올 것 같다. 닭고기(이마저도 부자연스럽지만)보다 치킨 너겟이 자연스럽고, 나무늘보가 사는 땅보다 우리가 먹을 소를 기르는 방목지가 더 자연스러운.

 자연스러운 것은 뭘까? 원래 존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원래'는 언제를 기준으로 하는 걸까. 빅뱅을 자연스러운 기준의 시작점으로 본다면 그보다 한참 뒤에 존재하게 된 우리는 부자연스러운 존재인가? 아니면 지구에 녹아들어 살고 있으니 자연스러운 존재인가? 만약 그렇다면 치킨 너겟이 닭고기보다 더 많이 소비되는 날이 온다면 치킨너겟을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럴 것 같다. '닭'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마트에 파는 닭고기나 양계장의 닭들이 떠오른다. 이들도 원래는 야생을 뛰어다니던 짐승이었다. 닭고기에 육질을 위한 첨가제가 있어서 부자연스럽다고 하기엔 닭고기는 우리에게 너무 자연스러운 존재다.


우리는 가축 동물의 생명 활동을 유린하는 과정에서 그들로부터 자연스러운 교미를 빼앗았을 뿐 아니라 이제는 개체 수를 늘리는 방안도 손에 넣었다.

 내가 먹는 고기가 이런 식으로 오는지 몰랐다. 조그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건데. 그 한 끗이 참 어렵다. 수익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정자부터 통제하는 사실에 인간 욕망의 밑바닥을 본 것 같아 기분이 찝찝했다. 

 인간에게 이럴 권리가 없는데, 이들은 무엇을 명분으로 이런 행동을 행하는 걸까.


한때 남부럽지 않게 풍부한 어장을 끼고 살았던 서아프리카인들은 이제 자신들의 바다에서 나는 생선을 먹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그들의 물고기가 우리의 닭을 살찌우기 위해 해외로 수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항공기를 띄워 물고기를 잡는 건 알고 있었다. 그냥 그렇게 많이 잡는다고만 생각했다. 잡으면 분명히 상품성이 떨어지는 것들이 나올 텐데 그것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 조차 없었다. 닭 사료로 가다니...

 그 지역 사람들은 굶고, 물고기는 바다를 건너 닭과 다른 지역 인간들의 배를 채운다. 세상이 너무 이상하다. 자본주의에 미쳐 나머지 모든 것들이 다 등한시되는데, 그 정도가 심하다.

 재앙이 머지않았음을 느낀다.


영국의 저술가 조지 몽비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자손들이 혐오스럽게 여길 우리 시대의 광기에는 무엇이 있을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고기나 알, 젖을 얻으려고 동물을 대규모로 가둬둔 것이 틀림없이 포함될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동물 애호가라고 여기며 개와 고양이에게 친절을 베풀면서도, 마찬가지로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수십억 마리의 다른 동물들에는 잔혹한 박탈을 가한다. 추악한 위선이다. 미래 세대는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보지 못했는지 알고는 경악할 것이다."

 귀여우면 살아남고 맛있으면 살해되고. 추악한 위선이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안 본 것이겠지. 음식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보는데 아보카도, 꿀, 생선과 같이 평소 내가 먹지 않는 음식 편은 잘만 봤다. 그러다 닭이 나왔는데, 그 부분을 볼 수가 없어서(보기 싫어서) 건너뛰었다.

 또한 식품 업계에서도 신선한 육류 뒤 비도덕적인 피비린내 나는 과정이 밝혀지는 것을 기를 쓰고 막고 있다. 그렇게 나는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시대에 산다.


4장. 재앙을 향해 다가가다 코멘트: 재앙에 다 왔다. 다른 생물들이 죽어간다. 그런데 먹이사슬 너무 밑이라 아직 꼭대기에 영향이 미미하다. 그래서 아무도 관심이 없다. 우리는 재앙행 열차에 탑승했고 최고 속도로 달리고 있다.


5장. 검은색황금


지금 보고 있는 휴대폰. 충전할 때 그 전기는 어디서 온 것일까요?


그레첸 베크가 '그리드'에서 밝히고 있듯이 우리가 휴대폰을 충전할 때 사용하는 전기는 "만든 지 1분도 채 안 된 새것이다. (중략) 수자원이 풍부한 나라에 사는 사람에게는 거대한 콘크리트 벽에 가둬놓은 물이 흘러 내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바로 지금 사용하는 전기는 1초 전에는 물방울이었다."

 전기를 만들어뒀다 필요하면 사용하는 줄 알았는데, 실시간으로 만들어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나는 내가 쓰고 있는 것들이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 하나도 모른다. 살면서 한 번쯤 궁금했을 법도 한데 왜 여태 궁금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태양은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지 않을 때, 비춘다.

 쨍쨍한 낮보다는 추운 겨울밤 전기가 필요한데, 태양이 없으니 춥고 에너지도 얻을 수 없는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물고기 대포'는 물고기를 댐 위로 옮기는 수송 수단으로 현재 연구 중이다. 압축 공기로 물건을 운반하는 공기 수송관과 비슷한 원리의 거대한 튜브다. 댐 아래에서 진공 튜브가 물고기를 빨아들여 시속 35㎞의 속도로 100피트 이상 끌고 올라가 댐 위쪽에 던져놓는다.

 네가 지금 사는 집에 내 별장을 좀 지으려고 해. 너희 집 허물게. 대신 근처에 천막을 설치해서 비나 바람을 피할 수 있게 해줄게. 뭐 어차피 집이나 천막이나 몸만 보호할 수 있으면 되는 거 아니야?

 인간으로 따지면 이런 상황 아닌가.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생활에 필수가 아닌 별장을 위해 누군가에게 생활의 필수인 집을 허물고 자기 마음대로 집을 천막과 동일시한다. 이토록 이기적일 수가 있는가. 형편없고 끔찍하다.


5장. 검은색 황금 코멘트: 검은색 황금은 눈에 띄지 않는다. 에너지가 우리에게 오는 과정, 쓰는 과정, 쓰고 난 후의 부작용 역시 보이지 않는 것이 큰 맹점이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고 무자비하게 사용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합쳐져 어떤 결과를 낼지 두렵다.


6장. 쓰레기와 보물


보물이 쓰레기가 될 수 있을까요?


 똥을 비료로 쓰는 것과 같은 우리가 내보내는 쓰레기에서 연료를 얻을 방법을 더 찾아봐야겠다. 쓰레기는 더 갈 곳이 없다. 

 튼튼하고 오래 쓰라고 만든 플라스틱, 토양에 적당한 거름을 주기 위해 개발된, 비료. 시작은 좋았다. 다만, 인간은 절제를 몰랐고 눈앞에 그 현상이 보이지 않는 경우는 특히 더 그렇다. 

 지금 획기적인 '발명(혹은 발견)'으로 보이는 것 중에도 시간이 흘러 분명 우리의 발목을 잡을 것이 있을 것이다.


6장. 쓰레기와 보물 코멘트: 쓰레기와 보물은 한 끗 차이다.


7장. 시간의 지배자


아점, 점저. 이상하지 않으세요?


사회학자 대니얼 벨은 "산업화는 공장이 들어서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노동의 측정을 통해 일어났다."라고 예리하게 간파했다. 달리 말하면 세상을 바꾼 것은 증기기관이나 다축 방적기의 발명보다는 시간에 대한 우리의 태도라는 것이다.

 시계로 시간을 측정하는 게 왜 당연하다고 생각했을까. 해 뜰 때 일어나고 해 질 때 자는 게 시간에 대한 우리의 태도였다면 지금과 같이 산업화한 사회는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배고프면 밥을 먹는 건데 시계가 측정하는 보편적인 시간에 어긋나는 식사를 아점이나 점저라고 부르는 게 이상하게 보인다.


화장실 문제는 사소해 보일 수 있겠지만, 시간이 본인의 것이 아닐 때 인간이 어떻게 품위를 잃게 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나도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 바쁜 날은 일부러 물을 마시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화장실에 다녀올 시간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별로 이상하다고 생각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너무 이상하다.

 그들은 나에게 시간만큼의 '노동'을 산 것인데, 왜 나는 그게 시간만큼의 '인격'을 산 것처럼 보일까.


우리가 시계를 발명하고 자체의 주기를 만들어 현실 거품 속에서 우리 행동을 통제하면서 자연의 시간 주기가 망가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낸 시간의 인위적인 박동에 속박되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식물과 동물 종들도 이런 불화를 느끼도록 만들었다.

 어쩌면 기온에 따라 결정되는 계절이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3월에 피우던 꽃이 2월에 피고, 그렇게 그 꽃과 연결된 촘촘한 먹이 사슬이 천천히 망가지고 있다. 자연과 인간 모두 시간에 통제당하고 있다.

 여기서 이득을 보는 건 극소수의 돈을 가진 사람들인데, 지구가 이런 식으로 망가진다면 저들조차 피해 대상으로 전락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7장. 시간의 지배자 코멘트: 지배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은 확실히 피지배자이다.


8장. 공간의 침입자

침입자 = 약탈자들: 자연에는 인간, 아프리카 거주자들에게는 유럽


오늘날 부동산은 공간을 사고팔고 거래하는 사업이다. 그러나 땅이 '우리의 것'일 수 있다는 생각 역시 측정, 국경, 민족 국가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발명품이다.

 인간이 '인간'으로 지구에 군림하기 위해 참 많은 가상의 것을 약속하고 있다. 가상의 것을 약속하는 것 자체가 나쁘다는 생각은 안 드는데, 지금 인간이 만들어낸 결과가 형편없어서 그런지 약속 자체에 대한 회의가 든다.

 체제가 성립되면 필연적으로 이득을 보는 자와 손해를 보는 자가 나오고 대체로 이득을 보는 자가 이긴다. 대부분 체제는 그들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공간을 지배하는 것이 인위적이며 자신을 가두는 체계를 만들어 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오늘날 부유한 사람들은 비어있는 유령 맨션을 소유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관에서 산다.

 '우리'가 아니라 자본주의 관점에서 돈을 가진 부유한 자들이다. 토지 소유자였던 영주들이 더 많은 토지 소유를 위해 만든 법을 지금 돈 있는 자들이 따르고 있는 것뿐이다. 제일 무서운 건 그 체제가 우리 삶에 스며들어 아무도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맹점이라는 말이 이제 뭔지 알겠다. 얼마나 많은 보이지 않는 속박에 나는 묶여있을까.


8장. 공간의 침입자 코멘트: 내가 공간을 소유한 것이 아니다. 공간이 나를 여기 묶어두고 있다.


9장. 인간 로봇


나는 인간일까요? 로봇일까요?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우리 위에, 우리 주위에, 우리 마음에, 우리 몸에 대체 왜 감시하는 눈들이 있을까? 사회를 이뤄 살아가는 우리는 왜 이토록 면밀하게 감시를 받을까?

 그러니까. 상업성, 보안성 때문일까? 정말 그게 다인지 궁금하다. 왜 저렇게 개인에 대해 데이터를 모으고 그걸 분류화하려는지 납득이 잘 안 간다.


중국 무슬림 위구르족의 고향인 신장 자치구에서 1,88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2017년 '모두를 위한 신체검사'를 받도록 독려 되었다. 이 검사에서 주민들로부터 수집된 생체 데이터에는 DNA 샘플, 혈액 샘플, 지문, 홍채 스캔이 포함되었다. 이 모든 데이터는 감시 자료와 함께 처리되어 사람들을 '안전', '정상', '위험'으로 보류했다.

 답을 찾았네. 가진 자들이 더 가지기 위해 발악하는 꼴을 언제까지 봐야 할지.

 돈이 그렇게 좋을까. 나도 돈이 좋긴 한데, 저렇게 추잡스럽게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벌고 싶진 않다. 사회가 미쳐 돌아간다.


9장. 인간 로봇 코멘트: 인간 로봇은 가진 자들이 더 가지기 위해 만들어낸 규율에 구겨 넣어진 인간이다. 심각한 건 자신이 규율속에 처박혀 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10장. 제국은 옷을 입지 않는다.


돈을 주고 사는 공허함. 그 기저에 깔린 수많은 검은 손


가계에서 저금한 돈을 은행이 예금으로 받아서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대출 은행이 예금을 만들어낸다.

 아직도 왜 은행에 돈을 찍어낼 권리를 줬는지 모르겠다. 사회가 감당할 수 없는 만큼의 빚이 사회를 무너뜨리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시민들의 몫이다.

 실제로 2009년 미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고 10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그 체제가 견고한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기업은 법적 허구이며 양심, 지능, 인식을 갖지 않는다. 기업 변호사들이 생태계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던 일들, 가령 법정에서 증언하는 것 같은 일은 기업도 하지 못한다.

 웃기네. 

 내가 사는 현실이 정말 허구 속에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규칙은 특정 집단에 의해 정해지고 그 집단이 원하는 방향으로 행해진다. 어처구니가 없다. 

 근데 더 황당한 건 이런 현실이 너무 자연스러워 단 한 번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내 자신이다.


 소유 자체가 아니라 소유를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부가 가치(예를 들면 타인의 시선, 본인의 만족감)에 소비의 근본적인 원인임을 알았다. 그럼 해결책을 소유를 소유 그 자체로 인정하고 부가적인 시선은 덧붙이지 않는 것인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우리는 평생 공허함을 쫓다 내가 무엇을 쫓았는지조차 모르고 죽을 것이다.


10장. 제국은 옷을 입지 않는다 코멘트: 벌거벗은 제국은 돈다발 위에 세워진다.


11장. 사고혁명


거품에서 나올 시간!


'싸우거나 도주하는' 반응과 관련된, 편도체가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의 믿음을 고수하는 데는 인지적 비용이 드는 셈이다. 합의에 반기를 든다는 것은 갈등을 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같은 사회적 동물에게 그것은 불안과 고통을 야기한다. 결국, 다수에 반기를 드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쉽게 반기를 들지 못하는데 이런 과학적 근거가 있을 줄 몰랐다.


'현실' 세계를 지배하는 시계의 시간, 주 5일 근무, 출퇴근 시간은 우주의 시간 질서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것을 만들어 냈고, 우리가 그것을 유지하며, 우리가 매달리는 현실이 되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누가 만들었을까. 시계의 시간, 주 5일 근무, 출퇴근 시간 모두 사용자, 노동자와 깊게 관련되어 있다. 사회의 모든 부분이 '효율' 특히 효율적인 노동에 맞춰진 것 같다. 

 다르게 말하면 저비용 고부가가치. 다른 무엇보다도 효율이 우선시되어 놓치는 게 너무 많아지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자연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지 못하면, 그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대다수 제품이 자연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치킨 너겟은 닭처럼 보이지 않고, 석탄은 고대의 숲처럼 보이지 않으며, 비료는 공기와 닮은 점이 전혀 없다. 자연은 제품으로 탈바꿈되었다.

 우리가 자연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 못 하는데 기업과 단체들의 방해가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심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자연이 빠르게 제품으로 생산되고, 제품은 빠르게 쓰레기가 되고, 쓰레기는 빠르게 우리 눈앞에서 사라진다. 나는 세 과정 중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저 모든 과정의 가속화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가담 중이다.

 이쯤 되면 의도적으로 보지 않았음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내 인생이 조금 편해지자고 그동안 너무나 많은 경고를 무시하고 살았다. 더는 무시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11장. 사고혁명 코멘트: 작가는 보여줄 수 있는 만큼 보여줬다. 거품을 부수고 나올지 아니면 거품 안에서 현실을 바라보며 그대로 있을지는 독자인 나의 몫이다.


행동 방향

 육식을 줄이는 게 제일 시급한 문제 같다. 주 3회 정도 육식을 하지 않는 날을 만들어야겠다.

 페트병을 옷으로 탈바꿈하는 프로젝트를 본 적 있는데 이것에 대해서도 더 자세히 알아보고 내가 보탤 힘을 보태야겠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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