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거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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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가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한 것은 1996년 6월이었다. 당대 최고의 첼리스트를 만날 기회를 놓칠세라 장안의 음악 애호가들이 객석을 가득 메웠다. 당시 69세의 대가는 연륜에 걸맞은 완숙의 경지를 펼쳐보였다. 관객이 또 한번 감동의 물결에 휩싸인 것은 앙코르 연주를 위해 그가 다시 무대에 나타났을 때였다. 무대 뒤편의 합창석을 향해 돌아앉아 연주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가장 값싼 입장료를 내고 들어와 공연 내내 자신의 뒷모습만 바라봤을 관객들을 위한 배려였다. 앙코르 곡은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의 한 소절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20세기 전반에 파블로 카잘스라는 걸출한 첼로의 대가가 있었던 것처럼 지난 세기의 후반에는 로스트로포비치가 있었다. 세기를 대표하는 거장도 음악에 대해서는 겸허했다. 바흐의 무반주 조곡 전곡을 환갑을 넘긴 뒤에야 비로소 녹음했다는 사실이 그의 겸허함을 입증한다. 치밀한 해석과 고도의 기량을 요구하는 바흐의 무반주 조곡은 첼리스트라면 누구나 한번은 올라서기를 꿈꾸는 봉우리와 같다. 첼리스트의 원점이자 목표점이며 '첼로의 성서'로 불리는 곡이다. 남들처럼 빨리 발표해 인정을 받겠다는 유혹도 있었을 법하지만 로스트로포비치는 서두르지 않았다. 스스로 자신의 연주를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린 것이다.

로스트로포비치는 또한 신념과 용기의 소유자였다. 소련의 반체제 작가 솔제니친을 자신의 별장에 4년간 숨겨준 일로 정부의 박해를 받고 16년간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그는 현장에서 기념 연주를 했다. 91년 반동 쿠데타를 일으킨 옛 소련 군부가 러시아 정부 청사를 둘러쌌을 때도 그는 현장에 나타났다. 탱크 위에 뛰어올라 맨주먹으로 쿠데타를 저지한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의 원군을 자처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당시의 동지 옐친이 숨진 지 나흘 만인 27일 80세의 로스트로포비치도 그 뒤를 따랐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지만 그는 예술과 인생 모두 굵은 족적을 남겼다. 고고한 정신의 표출인 예술세계는 물론이요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용기에다 낮은 곳을 살피는 도량까지 두루 갖춘 인물이었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밝힌 그의 인생관이 한 점 부끄럼 없이 삶을 마감할 수 있었던 이유를 말해준다. "사람은 언젠가 양심이라는 재판관과 만나게 된다. 고난을 모르는 사람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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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마루 2007-05-01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남선이랑 비교된다. 정확히는 대조된다.
 

 

[분수대] 와인 스트레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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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총 수십만 권이 팔린 일본 만화책 시리즈 '신(神)의 물방울'의 인터넷 한자 표기가 원작과 달라 궁금해하는 독자들이 있다. 포털 사이트를 검색해 보면 물방울을 뜻하는 '滴(적)'자가 떠돌아다니지만 원제는 '(놔)'다. 우리 옥편에서 찾기 힘든 일본식 한자여서 네티즌들이 대신 '滴'을 쓰는 듯하지만 어쨌든 이로 인해 '말 맛'이 뚝 떨어졌다. '滴'은 빗방울 같은 밋밋한 물체의 개념이다. 반면 ''는 감각적인 시어(詩語)에 가깝다. '꽃이 물방울처럼 흩어진다'든가 '별빛이 물방울처럼 뚝뚝 떨어진다'는 '花の' '星の' 같은 용례가 그것이다. 원작의 '신의 물방울'은 '현존하는 최고의 명품 와인'을 뜻한다. '滴'이 담아내기엔 다소 벅찬 느낌이다.

만화책 제목만 놓고도 '어' 다르고 '아' 다를 정도로 와인은 뭔가 까다롭고 범상치 않은 느낌을 주는 술이다. 우리나라에 '와사모(와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유난히 많은 것도 극성스러운 한국 애주가들의 도전 정신의 발로일 것이다.

'신이 내린 최고의 선물'이라는 와인이 문화와 세련미의 동의어처럼 쓰인 역사는 오랜 기원을 자랑한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와인을 마시면서 토론하는 습성이 야만인과 다른 점이라고 자부했다. 심포지엄(symposium)의 어원은 '함께 마신다'는 뜻이다. 포도 경작지가 늘고 대량 생산 기술이 발달해 노예까지 와인을 마시게 되자 귀족들은 빈티지(포도 수확 연도)를 중시하기 시작했다. 이걸로도 차별화가 힘들어지자 와인 마시는 태도를 따졌다. (톰 스탠디지 '여섯 잔에 담은 세계사')

와인을 모르면 고급스러운 비즈니스를 하는 데 불편을 느끼는 시대가 됐다. 기업 총수나 최고경영자(CEO) 가운데 와인 전문가 뺨치는 이들이 늘어난 이유다. 일찍이 카를 마르크스는 흥미롭게도 자본가가 아니라 '와인을 마시지 않는 사람'을 쉽사리 믿지 말라고 했다.

한 경제연구소가 최근 기업체 대표 등 국내 경영자 400여 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다. 다섯 중 네 명 이상(84%)은 와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있다는 대답이었다. 식탁에서 '좋은 술 골라 보라'는 권유를 받는다든가, 와인 화제에 끼지 못하는 것 등 때문이었다. '고급 와인 한 잔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미래는 장밋빛으로 물든다'고 한 나폴레옹이 되살아난다면 뭐라고 할까. '격식도 좋지만 일단 와인 맛부터 즐기면서 슬슬 여유 있게 배워 가시길'이라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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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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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를 하라'는 TV 광고가 요즘 눈길을 끈다. 자신을 한껏 드러내 보이라는 권유로 들린다. 늘 머뭇거리면서 남 앞에 나서기 어려워하던 과거 한국인의 습성은 요즘 많이 바뀌었다. 광고에서 거침없이 "나를 드러내라"고 외치는 것을 보면.

요즘의 중국인들도 쇼에 민감하다. 유명 정치인 등이 뻔히 속내가 내비치는 행동을 하면 "저 사람 쇼한다(作秀)"고 냉소한다. '쇼'라는 외래어를 발음이 비슷한 '슈(秀)'로 옮겼다.

쇼를 한다는 표현은 그 연원이 제법 깊은 중국의 고사에도 나타난다. 한번 놀아보자는 뜻의 '작희(作戱)'다. "평상심이 곧 도"라고 얘기했던 당대 마조(馬祖) 선사에 얽힌 얘기다.

그의 제자 은봉이 길을 떠나고 있다. "어딜 가느냐"고 마조가 물으니 제자는 "돌머리(石頭) 대사에게 갑니다"고 답한다. "돌 길이 미끄러울 텐데?" 제자는 거침없이 답한다. "막대기 들고 가니(竿木隨身), 때맞춰 한번 잘 놀아 볼 작정입니다(逢場作戱)."

내용인즉 은봉이 이름 높은 석두 대사와 선문답으로 한번 맞짱을 뜨겠다는 것이다. 선에 관한 것이라서 이해가 쉽지 않다. 그러나 내 맘에 깨달음이 있으면 어느 상황, 어느 조건에도 얽매이지 않을 수 있다는 뜻으로 이 성어를 읽으면 된다.

길거리에서 자신의 재주를 팔아먹고 사는 과거의 예인(藝人)들이 즐겨 썼을 법한 얘기다. 한 판 만들어지면 걸지게 놀아 본다는 뜻으로 말이다. 결국은 쇼를 한다는 얘긴데, 요즘의 중국에서는 엉뚱하게 바람 피우는 남성의 경우를 일컬을 때 자주 쓰인다.

우리 정치인들이 판을 북한으로 옮겨 쇼를 해 볼 작정인가 보다. 여권의 내로라하는 의원들이 줄줄이 방북해 행사를 벌인다고 한다. 그 의도를 두고 여론의 비판이 만만치 않다. 대선용으로 우려먹을 요량이면 안 된다는 지적이다.

하기야 대남 문제에 관해서는 전략과 전술로 속을 가득 채운 북한 관리들에게 어설픈 동포애로 접근하는 것은 위험하다. 어디까지나 큰 전략적인 구도 아래에서 그들을 대해야 한다. 쇼 좋아하는 정치인들이 북한 문제를 쇼 판으로 끌어들인다면 우리의 대북 정책 근간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라면 그 판을 거두는 게 좋겠다.

참, 석두 대사와 한번 붙어 보겠다는 야심이 앞섰던 은봉은 결국 참패하고 만다. 쇼 정신으로 무장은 했지만 역시 당대 선종의 거봉이었던 석두 대사의 벽을 넘지 못했다. 쇼는 정말이지, 그냥 쇼에 지나지 않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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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결선투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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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통령 선거는 다음달 6일 결선투표를 해야 한다. 22일 1차 투표에서 과반수를 얻은 후보가 없기 때문이다. 1차 투표 결과로는 최종 결과를 알 수 없다. 과거 결선투표가 일곱 번 치러졌지만 세 번을 1차 투표에서 2위 득표한 후보가 이겼다.

결선투표는 단순다수결을 채택한 우리에게 생소하다. 하지만 수학자들은 단순다수결 방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노스웨스턴대의 도널드 사리 교수도 "역설의 가능성이 가장 높은 제도"라고 했다 (K C 콜, '아름다운, 너무나 아름다운 수학'). 다수가 싫어하는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어떤 후보들이 몇 명이나 출마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전혀 다를 수 있다.

6월 항쟁의 결과로 치러진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양 김씨는 과반(김영삼 28.0%, 김대중 27.0%)을 얻고도 36.6%를 얻은 노태우 후보에게 지고 말았다. 양 김씨 중 한 명이 몰아갈 수 있는 표였다. 2002년 미국 대선에서 고어가 패배한 것도 녹색당 네이더가 플로리다주에서 9만5000표를 뺏어간 것이 치명적이었다. 네이더가 없었다면 고어 지지표였다.

수학자들은 이런 약점을 보완하는 방법을 궁리했다. '보다의 셈법'은 투표자가 후보마다 순위를 매기고, 순위별로 다른 가중치를 주어 합산하는 방식이다. '1위는 3점, 2위는 2점, 3위는 1점' 하는 식이다. 이렇게 하면 단순다수결보다 1000배 이상 역설적 결과를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아일랜드에서는 '순위투표'를 한다. 국민이 1순위 후보와 2순위 후보를 찍어 1순위 투표만으로 과반수 득표자가 없을 경우 2순위 표를 합산한다. 그와 비슷한 '선호투표'는 1, 2, 3순위로 투표하게 하고, 1차에서 탈락한 후보의 표는 2순위 후보의 표로 다시 계산한다. '결선투표'는 1차 투표에서 일정 득표수나 일정 순위에 들지 못한 후보를 제외하고 다시 투표하는 방법. 각 투표자가 후보마다 찬반 여부를 밝히는 '승인투표'도 있다. 유엔 사무총장을 선출하는 방법이다.

한국에서도 '소수파 대통령'을 많이 보아 왔다. 찍은 사람보다 안 찍은 사람이 많은 대통령이다. 강원택 교수는 "포퓰리스트(대중영합주의자)가 적은 득표로 집권할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결선투표제를 도입하자"고 했다('한국의 정치개혁과 민주주의'). 그렇게 되면 자기들 마음대로 젓가락도 가지 않는 음식을 늘어놓고 먹으라고 강요하는 일이 없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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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아버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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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극장가의 코드는 아버지다. 감동적인 부성애 영화들이 쏟아진다. 대부분 가정의 달인 5월 특수를 노렸다. '아들'은 15년 만에 휴가 나온 무기수 아버지가 얼굴도 모르는 아들과 보내는 하루를 그렸다. '날아라 허동구'와 '파란 자전거'는 각각 지능이 떨어지거나 장애인 아들을 감싸 안는 아버지 얘기다. '눈부신 날에'의 주인공 건달은 갑자기 나타난 어린 딸로 인해 새 삶을 찾는다.

가족영화는 아니지만 '우아한 세계'는 조폭 가장의 분투를 그렸다. 자식을 조기유학 보내느라 손에 피 묻히는 조폭 직장생활을 하는 기러기 아빠가 주인공이다. 유괴를 소재로 한 '그놈 목소리'에서도 아이의 아버지에게 초점이 맞춰졌다. 올 상반기 코드가 아버지라 할 만하다.

아버지 영화는 앞으로도 이어질 전망이다. 해외 입양아가 사형수 친아버지를 찾아오는 '마이 파더', 조창인의 베스트셀러 '가시고기'가 원작인 '귀휴' 등이 준비 중이다.

아버지 영화가 봇물을 이루는 것은 급증하는 가족영화 수요 때문이다. 가족단위 관람이 많아지면서 시장이 커졌다. 적은 제작비에 한국인이 좋아하는 '감동 코드'라 실패 위험이 낮다는 것도 이유다.

한국영화에서 아버지는 꽤 오랫동안 부재했다. 가정의 중심은 어머니였고, 부재하는 아버지의 역할은 장남이 대신했다. 유괴당한 자녀의 복수도 강한 어머니가 했다('친절한 금자씨' '오로라공주'). 충무로 뉴웨이브를 이끈 386 감독들의 '살부의식'은 아예 한국영화의 주제가 됐다. 추락한 아버지들이란 TV 시트콤 속 희화화된 캐릭터로 각광받을 뿐이었다.

한국영화에서 아버지의 이미지가 달라진 것은 지난해 '괴물'이 기점이 됐다. 평소 무기력한 아버지는 딸이 괴물에게 잡혀간 뒤 투사처럼 일어선다. 딸을 살려내지는 못하지만, 딸이 죽기 전 구한 소년을 아들로 품어 낸다. 송강호가 연기한, 고군분투하는 서민적 아버지는 미워할 수 없는 따뜻한 아버지의 전형으로 남았다.

최근 아버지 영화에서도 아버지들은 잃어 버린 위치를 되찾으려 애쓴다. 하필이면 무기수에 사형수.양아치.조폭 등 모두 죄 많은 아버지들이다. 이들은 자식과 화해하며 가정으로 돌아오고 구원받는다.

그러나 영화는 역시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법. 한 대기업 회장의 '심야 복수 활극'만 한 부성애 드라마가 없다. '눈에는 눈, 귀에는 귀' 보복 수준이 거의 조폭영화 급이다. 최고 흥행과 논란을 함께 거머쥔 아버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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