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자기 열등화 전략 [중앙일보]

임기가 끝나가는 정권의 공무원 사회에서 흔히 발견되는 현상은 무사안일과 복지부동(伏地不動)이다. 새로운 일을 벌이지 않고, 책임질 일은 하지 않은 채 그저 임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눈치만 보는 것이다. 특히 임기 중에 벌인 정책의 성과가 시원치 않고, 정권의 인기가 낮을수록 이런 현상은 심해진다.

문제는 임기가 끝나려면 여전히 상당한 시간이 남아 있고, 레임덕 현상은 아직 본격화하지 않았을 때다. 아직 현직에 있는 대통령의 힘을 무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앞장서서 총대를 메자니 다음 정권에 찍힐 것 같아 부담스럽다. 이렇게 입장이 모호할 때는 무언가 일을 한다는 인상을 주면서도 나중에 꼬투리가 잡힐 만한 빌미를 주지 않는 것이 난세에 공직자가 살아가는 처신의 요체다.

그 방법의 하나가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에드워드 존스와 스티븐 버글러스가 처음 이론화한 자기 열등화 전략(self-handicapping strategy)이다. 이 전략을 택하는 사람은 자신의 업무수행 능력을 의도적으로 낮춰 잡고, 대신 외부에서 다양한 실패 원인을 찾는다. 만일 일이 잘못되면 전적으로 남의 탓이고, 잘되면 자신의 역량 이상으로 일을 잘한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으니 보신에는 그만이다. 골프나 당구 경기에서 자신의 평소 실력보다 못한 기본 점수를 제시한 뒤 경기에서 이기면 실력 이상으로 잘 친 것이고, 지면 원래 실력이 그랬다고 자위하는 식이다. 실패하더라도 심리적으로 상처받을 일도 없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질 부담도 없다.

문제는 이런 전략을 자주 쓰다 보면 역설적이게도 개인의 능력을 실제로 떨어뜨린다는 점이다. 실패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실력을 숨겼는데, 나중에는 정작 실력을 발휘하려 해도 예전 실력이 나오지 않는다. 무능을 가장했다가 정말 무능해지는 것이다.

최근 각 부처의 장관들이 자신의 평소 소신을 꺾고 대통령과 청와대에 장단을 맞추는 일이 자주 벌어지고 있다. 대통령 말투 따라하기, 청와대 국정 브리핑 복창하기, 정색하고 안면 바꾸기 등이 대표적으로 동원되는 기법이다. 자기 분야에 정통한 전문가인 장관들이 자신의 진짜 실력(?)을 감추고 비전문가인 대통령의 하명을 좇기에 바쁜 것을 보면, 이들이 자기 열등화 전략을 쓰고 있다는 의구심이 든다. 정책이 성공하면 자신의 업적으로 삼을 수 있고, 잘못되더라도 대통령 말에 따른 것뿐이니 걱정이 없다. 그러다 정말 무능해지면 어쩔지 걱정이지만.

김종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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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마루 2007-03-27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난 실패했을때 실망하지 않기 위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이다. 잘되면 기뻐하고 안되도 실망하진 않을테니까......그런데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마이너스 에너지가 방출되는지, 참. 안좋다.
 

 

[분수대] 수퍼스타 경제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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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나 TV 탤런트, 가수 등 유명 연예인들의 수입은 자세히 알기 어렵다. 그러나 간혹 언론에 드러난 금액은 가위 천문학적이다. 몇십억원은 보통이고, 한 해에 세금만 100억원 이상 낸 연예인도 있다. 스타의 위력이 어느 정돈지 실감난다. 실제로 몇몇 유명 연예인은 웬만한 중견기업의 매출액을 능가하는 수입을 올린다. 걸어다니는 기업인 셈이다. 요즘은 인기 연예인을 앞세운 기업이 증시에 상장돼 대박을 터뜨리기도 한다. 기업공개로 수백억원을 챙긴 연예인도 있다. 이들은 그냥 스타가 아니라 수퍼스타다.

그러나 수퍼스타가 아닌 대부분의 연예인은 생활이 화려하지도 않고 수입도 변변치 않다. 인기 연예인으로 발돋움한 이들의 성공담에는 곤궁했던 무명 시절의 설움이 가득하다. 수퍼스타와 보통 연예인의 수입은 천양지차(天壤之差)다. 하는 일이 비슷한데도 수입의 격차가 이토록 크게 나타나는 이유는 '수퍼스타 현상'이 연예시장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 시장에서는 소비자가 최고의 생산자가 제공하는 상품을 원하고, 이 최고의 생산자만이 모든 구입자에게 최저의 비용으로 상품을 제공할 수 있는 기술을 가졌다. 최고를 가르는 기준은 대중의 인기다. 무명 배우의 영화를 열 번 본다고 수퍼스타가 출연하는 영화에 대한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다. 대중이 원하는 것은 바로 그 특정한 수퍼스타이지, 일반적인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수퍼스타 현상은 프로스포츠도 마찬가지다. 몇몇 스타플레이어와 나머지 선수들 간의 수입 격차는 연예계 못지않다.

스타가 되기 위해서는 타고난 재능과 노력도 필요하지만 운도 따라야 한다. 어쩌다 찾아온 기회를 잡지 못하면 스타가 되는 길은 영영 멀어지고 만다. 수퍼스타의 수입이 아무리 많아도 그 수퍼스타가 될 확률이 낮으면 기대소득은 적을 수밖에 없다. 수퍼스타의 연간소득이 100억원이 될 확률이 0.1%라면 기대소득은 연간 1000만원에 불과하다. 대다수 무명 연예인이 궁핍한 이유다. 수퍼스타의 지위를 유지하는 기간이 짧다는 점을 감안하면 생애 통산 기대소득은 더 줄어든다.

수퍼스타가 돼도 최고의 자리를 지키는 데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다 조폭의 위협에 시달리기까지 한다니 그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을 것 같다. 그런데도 요즘 청소년들의 최고 희망 직종이 연예인이라니 딱하다. 평균적으로 보면 성실하게 일해 월급받는 일반 직장이 훨씬 성공 확률이 높고 기대소득도 많은데 말이다.

김종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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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탄소를 위한 변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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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미경으로 보면 그물을 원통처럼 말아놓은 듯한 형상이다. 다이아몬드보다 강하고 구리보다 전기가 잘 통한다. '21세기 꿈의 신소재'라는 탄소나노튜브다. 가느다란 것의 지름은 머리카락 굵기의 수만 분의 1에 불과해 '나노(nano) 과학'의 총아로 대접받는다.

일본 NEC의 한 연구원이 1991년 흑연 실험 도중 이 소재를 발견했을 때만 해도 그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늠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이후 반도체와 평판 TV, 초강력 섬유, 생체 센서 같은 차세대 첨단 장치들의 토대가 됐다. 반세기 동안 '산업의 쌀'로 군림한 반도체의 위광을 빼앗을지 모른다. 탄소나노튜브를 발견한 이지마 스미오 박사는 노벨상 단골 후보로 오르내린다.

원소기호 C, 원자번호 6인 탄소(炭素)는 영어로 carbon이다. 숯을 뜻하는 라틴어의 carbo라는 어원만큼이나 칙칙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하지만 화학자들 사이에 탄소는 '밝은 성격의 팔방미인'으로 통한다. 우선 다른 원소와 쉽사리 반응한다. 사슬.고리형을 가리지 않고 수십만 가지 화합물을 만들어 낸다. 탄소끼리 똘똘 뭉치는 데에도 능하다. 다이아몬드가 바로 탄소의 결정체다. 사람으로 치면 가정.사회 생활을 두루 잘하는 모범생이다. 그뿐인가. 단백질.탄수화물 같은 탄소 화합물을 빼고 생명의 신비를 다루는 생화학이나 유기화학을 논할 수 없다. 나일론.아스피린.페놀처럼 인류의 경제생활을 뒤바꾼 혁명적 물질도 대개 탄소 화합물이다.

뭐니 뭐니 해도 탄소의 가장 큰 소임의 하나는 광합성을 통한 지구 생태계 순환일 것이다. 이산화탄소(CO2)가 물과 빛을 만나 포도당과 산소를 만들고 동식물의 생로병사를 통해 탄소 성분이 대지로 되돌아오는 과정이다. 문제는 온실가스의 일종인 이산화탄소가 과다할 때 생기는 지구온난화 현상이다.

지난해 영국 정부는 '탄소 카드'라는 이색 구상을 내놨다. 휘발유 주유량까지 마일리지로 누적해 탄소 과소비자에게 불이익을 주자는 것이다. 환경론자들은 화석연료 위주의 '탄소경제'시대를 보내고 청정에너지 위주의 '수소경제'시대를 앞당겨야 한다고 재촉한다. 탄소나노튜브 연구자들이 머쓱해질지 모르겠다. 지난주 보도된 우리나라의 '탄소 펀드' 구상도 천덕꾸러기 이름이 된 탄소의 자화상이다. 자연은 그대로인데 이를 훼손한 인간들의 적반하장이라 문득 탄소를 위한 변명을 하고 싶어졌다.

홍승일 경제부문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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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숫자 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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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6은 일반적으로 좋은 의미다. 우선 생물이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물에서도 숫자 6이 등장한다. 물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맛과 기능 면에서 상반된 것들도 있다.

인체에 가장 좋은 물은 보통 육각형 구조를 띤다고 한다. 이른바 육각수(六角水)다. 자연에 존재하는 물의 분자 형태를 말하는 것인데, 오각형 구조의 물에 비해 육각형 구조의 물이 기능과 맛 등에서 훨씬 낫다고 한다.

분자 형태에서의 물은 오각형 고리 구조와 사슬 구조, 육각형 고리 구조 등 세 가지 모습이다. 물 분자 하나하나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고 사슬 또는 고리 구조로 서로 손을 맞잡고 있는 형태를 띤다는 것이다.

인체는 보통 60~70%의 수분을 지니고 있다. 인체에 들어 있는 수분 가운데 62% 정도는 육각 구조로 돼 있다. 나머지 중 24%는 오각 구조, 즉 오각수로 구성돼 있다고 한다. 암과 피부병 등 질환이 있는 곳의 수분은 이 오각수로 구성돼 있다고 하니 맛과 기능이 좋은 육각수와는 정반대의 기능을 가진 셈이다.

중국에서도 숫자 6이 지니는 의미는 남다르다. 일이 순탄하게 잘 풀려나가는 뜻의 '류(溜)'와 발음이 같다. 두 글자를 겹친 뒤에다가 다시 '다순(大順:크게 순조롭다)'이라는 말을 붙여 사람에게 행운과 함께 사업 번창을 가져다주는 용어로 쓰인다. 하늘과 땅, 사람이라는 세계 구성의 3원(元)적 요인이 두 개 겹쳐 이루는 안정감에도 주목한다. 흔들리지 않고 안정적으로 일이 진행되면서 사람에게 흉(凶)보다는 길(吉)을 가져다주는 숫자로 보는 것이다.

좋은 물을 이루는 구조, 세계를 이루는 안정감의 표징으로 6이라는 숫자가 쓰이는 셈이다. 하지만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를 목표로 추진된 6자회담의 경우 그 숫자가 담은 좋은 뜻을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는 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6자회담에선 좋은 소식이 나왔다. 매번 여러 가지 조건을 걸고 회담에 적극적이지 않던 북한의 자세 변환이 큰 배경이다. 6자회담은 이로써 좀 더 안정적이면서 좋은 내용을 담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기존에 개발한 북한 핵을 어떻게 할 것이냐가 진짜 문제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남북한과 주변 4강의 안정적 육각형 구조를 이루기 위해서는 기존의 핵무기와 물질을 제대로 없애야 한다. 플루토늄이 섞여 있는 한 제 아무리 좋은 육각수라 해도 인체에 유해한 물에 불과할 것이므로.

유광종 국제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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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대통령 전용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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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이 곤욕을 치렀다. 전임 데니스 해스터트 의장의 쌍발엔진 C-20을 C-32 급으로 바꿔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공화당에서는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 원'에 빗대 "'펠로시 원'을 달라는 거냐"고 비난했다. C-20은 승무원 5명, 승객 12명이 타는 소형 군용기. C-32는 승무원 16명, 승객 45명이 탈 수 있다.

펠로시 의장 측은 지역구가 해스터트 의장의 시카고보다 네 배나 먼 샌프란시스코라고 항변한다. C-20으로는 한 번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하원의장은 부통령에 이어 권력승계 2인자. 그런데 부통령.장관들이 타는 C-32를 같이 이용하는 게 지나치냐고 억울해한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도 비행기로 구설에 오른 경우다. 전용기를 도입하려다 '블레어 포스 원'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그는 왕실 전용기를 여왕보다 10배나 자주 쓴다. 노동당 행사는 물론 해외 휴가 때도 이용한다. 그 바람에 "개인 택시냐"는 핀잔까지 들었다. 이름만 왕실 전용기지 사실은 장관들도 타는 정부 공용기다. 그것도 1967년에 도입한 낡은 VC-10기. 여왕은 외국에 갈 때 브리티시 에어웨이의 보잉 777을 즐겨 탄다. 블레어 총리는 다른 비행기를 타려 해도 경호팀이 반대다.

이승만 대통령은 6인승 L-26을 이용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66년 C-54를 들여왔다. 현재 공군 1호기는 85년 전두환 대통령이 들여온 보잉 737-3Z8. 이제 일본 정도만 이용하고, 다른 곳은 민항 전세기로 간다. 항속 거리와 탑승 인원 때문이다.

대형 전용기 도입 계획은 야당 반대에 부딪혔다. 노무현 대통령은 비용을 따져 보라고 한다. 그는 역대 대통령 중 외국을 가장 많이 방문했다. 지금 체류 중인 로마를 포함해 재임 중 23차례, 49개 나라에 다녔다. 한 번 나갈 때 전세기 비용이 8억~9억원이라니 임기 중 200억원 정도가 드는 셈이다. 전용기를 20년마다 바꾼다고 가정하면 같은 기간 전세기 비용은 800억원 정도다. 기름값과 인건비를 제외해도 전용기 도입 비용(1900억원)의 절반 수준이다.

그러나 국가원수의 안전과 국가 안보를 비용으로 따질 순 없다. 국익에 보탬이 된다면 전용기를 반대할 이유가 없다. 문제는 민심이다. 국민이 정상 외교를 걱정하는 상황에서는 여론을 돌리기 어렵다. 필요 이상의 수행원으로 허세를 부리고, 관광지에서 기념사진이나 찍는다는 인상을 줘도 전용기 구입 논리는 궁색해진다.

김진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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