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인간 - 인생을 단단하게 살아내는 25가지 지혜
발타자르 그라시안 지음, 강민지 옮김 / 교보문고(단행본)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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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고 보니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책을 만나는 일은

​

적어도 나에게는 필연이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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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쇼펜하우어가 사랑하는 스페인의 17세기(1601년생) 철학자의 책이라는 소개 정도로도

​

나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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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짚어 보니 올해 여동생의 생일선물로 내가 구입해서 보내 준 책 역시

​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아주 세속적인 지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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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은 내가 미처 어떤 인물이었는지도 모른 채 무심코 나를 스쳐 갔지만

​

결국은 이렇게 내 손안에 발타자르 그라시인의 교양 철학책이 들어오기로 되어 있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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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던 것처럼 나혼자 의미부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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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로움을 지닌 채 책을 펼쳐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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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타자르 그라시안은 25세에 사제 서품을 받고 이미 28세부터 인문학 교수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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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을 가르쳤으며 3년 간의 수도원 수련기를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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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근본' 에 관한 삶의 지혜를 설파해온 철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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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쇼펜하우어에게 영향을 준 인물인 만큼

​

고난과 시련이 불가피한 우리의 삶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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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연하고 단단하게 살아낼 수 있는 인간 덕목 25가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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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인간> 이라는 주제 아래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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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책과 친해지고자 접근할 때 나의 습관들 중 하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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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두고두고 읽어보며 저자의 의도를 여러 방면으로 짐작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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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저자가 모든 책에 자신의 의도나 메시지를 심어놓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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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입장에서 나름 진지하고 거창하게 의미를 부여하며 읽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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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저자에게 확인해보면 '별 생각없이 했는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맞아떨어졌다~'

​

뭐 이런 경우가 적지 않아서 당황스러웠던 적이 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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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국내 작가들과의 북토크 경험상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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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번역본은 저자의 의도를 짐작해 보기에 앞서 원제부터 체크하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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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 Discre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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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어 "El Discreto"는 '신중한', "입이 무거운, '빈틈없는' 이라는 뜻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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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에서부터 다소 의역의 향기가 묻어나는 <완전한 인간> 같은 번역본은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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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원제를 확인하고 나서 읽어 보니

​

'완전한' 이라는 의미를 선뜻 떠올렸을 때의

​

'complete', 'perfect', 'flawless' 와는 결이 좀 다르게 수용된다.

​

발타자르 그라시안은 이 교양 철학책을 열고 닫을 때 하나의 문장을 내세웠다.

​

"어디서든 우리는 철학을 해야 합니다."

​

인간은 각자 자신만의 기질과 기량을 갖고 태어나며

​

자신만의 능력이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다는 신념이 있다면

​

이 세상의 고난들에 쉽게 좌절하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한다.

​

자기 자신을 갉아 먹는 것은 변덕이라 칭했고

​

자신의 탁월한 능력을 한 번에 드러내지 않아야 하며

​

어떤 식으로든 박수를 받는데 급급한 허풍쟁이를 또한 경계하였다.

​

자신의 말과 행동을 스스로 다스릴 줄 안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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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려깊은 단어를 사용하고 절제할 줄 알며 끝을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

완전한 인간을 신중한 인간이라고 그 의미를 전환시켜 볼 때

​

개인적으로 신중한 인간과 맥을 같이 하는 지혜로운 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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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소개하는 25가지 인간 덕목 중에서 '끝을 생각하는 사람' 이라고 생각한다.

​

유한한 인간의 본성을 더 어리석게 만드는 치명적인 요소를 욕망이라고 볼 때

​

인간은 스스로 최고치라 생각하는 그 순간이 영원할 거라 착각하며

​

스스로 브레이크를 걸지 못하고 질주한다.

​

그 행동이 추후에 자신에게 독이 되어 오는 것도 모른 채.

​

인간의 바램이 현실로써 영원할거라고 믿는 이 어리석음과

​

인간끼리 서로를 해치는 역사가 반복되는 한

​

인간의 타락은 불가피한 걸까 씁쓸하게 자문해 보기도 한다.

​

그러나 발타자르 그라시안이 제안하는 인생의 지혜를 찬찬히 짚어나가다 보면

​

그러한 인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위대함, 숭고함, 그리고 탁월한 면면은 여전히 빛을 잃지 않는다.

​

그렇기에 인간을 향한 기대와 희망을 놓을 수 없는 것이다.

​


완전한 인간은 자신의 판단력이 옳고 자신의 취향이 성숙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항상 주의깊게 말하며 천천히 행동합니다.

​

위대한 사람은 진실과 보여지는 것을 구분합니다.

​

훌륭한 사람은 위선적인 것들도 모두 꿰뚫고, 눈치채고, 깨닫고, 이해하며,

자신만의 기준으로 상황을 정의합니다.

​

위대한 인간은 함부로 감탄하거나 함부로 깔보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평가를 이야기할 뿐입니다.

​

<완전한 인간> 중에서



인상깊게 여긴 덕목들 몇 가지를 풀어놓긴 했지만

​

발타자르 그라시안이 말하는 '신중한 인간' 이 되는 인생의 지혜 25가지는

​

결국 하나로 수렴되는 듯 하다.

​

카이사르도 진실은 완전함이라고 여겼던 것처럼

​

인생을 단단하게 살아내기 위해 나아가는 완전한 인간은 곧 진실한 인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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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양 철학책에서 소개하는 그 25가지 덕목을 다 갖춘 사람을

​

완전한 인간이라고 생각할 리도 만무하지만

​

불완전한 인간이 이 덕목들을 다 갖췄다고 해서 완전한 인간이 될 수도 없다.

​

그런 사람은 단언컨대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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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타자르 그라시안이 본 위대한 인간이란

​

동시에 이 모든 덕목을 발휘할 수 있지도 않으며

​

여러 완벽함을 반복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

한 마디로 정의 내릴 수 없다고 그는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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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

나 자신의 주인이 되고자 발타자르 그라시안이 제안하는 25가지 지혜 중에서

​

자신이 추구하고 싶은 덕목 하나 정해서 노력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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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보면 운좋게 25가지 인간의 덕목 중에

​

내 안에서도 하나쯤은 발견할 수도 있고.^^

​

더불어 '나'라는 우주가 변할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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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고 진화하는 것은 하나의 방향도 아니고 그 방향이 정해져 있지도 않는 것.

​

(요즘 다윈주의에 빠져있는 관계로...^^;)

​

그저 성장하든 퇴보하든 항상 변화를 거듭할 수밖에 없는 인생에서

​

자신이 주인이 되는 나아감을 추구함으로써 성숙해지는 일.

​

이것으로부터 완전한 인간의 역사는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

그러고 보니 성숙한 인간과 진실한 인간의 상이 내 안에서 겹쳐지는 듯 하다.

​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완전한 인간> 은 이렇게 내 안에 이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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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상인가 - 평균에 대한 집착이 낳은 오류와 차별들
사라 채니 지음, 이혜경 옮김 / 와이즈베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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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각 집단마다 추구하는 이익과 가치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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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를 배제함으로써 자신의 위상이 자동 승격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

거대한 사회를 상대로 한낱 개인이 저항해야 하는 순간에

​

공동체의 연대를 발휘하는 이들도 있다.

​

인간의 본질 중에 본질인 존엄함은 계급이나 인종, 성별과 관계없이 보장되어야 한다.

​

그러나 그간 인간의 역사에는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이분법적인 범주에 의해

​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측정하고 표준화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지속하고 있다.

​

누가 누구를 정상인지 아닌지 정의할 수 있는가!

​

'적절하다, 평균이다, 정상이다, 표준이다' 라는 개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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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디로부터 왔으며 누가 설계했는가?

​

자신의 성장과정 속에서 정상성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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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적으로 의문을 가져왔던 사라 채니가 <나는 정상인가> 에서 던지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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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과 감정의 역사에 관한 연구를 통해 저자는

​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가 정상인지 아닌지 걱정하고

​

내가 정상인의 범주에 속하는지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 자체에 문제를 제기한다.

​

도대체 정상이라는 관념이 뭐길래???

​

법으로 정해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태초에 정해져 내려오는 것도 아닌

​

'정상성' 개념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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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 채니는 정상성이란 기준은 통계학의 급속한 발전을 계기로

​

다양한 학문들이 유럽과 북미를 중심으로

​

과학적 관행 속에서 광범위하게 뿌리내리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

심지어 그 역사는 겨우 200년 밖에 되지 않음에도

​

오늘날 우리의 법률, 사회구조, 건강과 정상성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실감하게 한다.

​

즉, 정상성 관념은 자연 법칙이 아니라 지난 수 세기 동안

​

인간 세상에서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설계된 것이며

​

서구의 기준에서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개인의 방식에 반한다면

​

모든 공동체를 서슴없이 타자화한다고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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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준, 평균, 기준, 정상의 개념이 생겨나게 된 배경부터

​

인간의 몸과 마음, 성생활, 감정, 자녀, 사회에 이르기까지

​

우리 삶에 교묘히 파고든 정상성의 민낯을 파헤친다.

​

저자가 개인적으로 겪었던 인생 경험들 속에서

​

평균에 집착해온 인간의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

​

이것은 비단 저자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정상의 범주에 속했을 때 안정감을 느끼면서도

​

한편으로는 평균과 달라 보이고 싶은 욕망 또한 내재되어 있다.

​

또는 평균이나 기준에 속하지 않으면 마치 내가 비정상인 것 같아 불안감을 느끼기도 한다.

​

사회적으로 더 바람직해 보이는 쪽에 줄을 서고

​

나만 아니면 된다는 자기중심적인 못된 심리가 작용하면

​

다른 집단들을 주변화하는 경향까지 보인다.

​

인간의 지난 역사 중에서 미국 연방정부가 기숙학교 제도를 도입해 부족 문화를 뿌리 뽑아

​

원주민을 적응시키고 동화시키는 정책을 펼쳤던 것만 봐도 그러하다.

​

미의 보편적 기준은 이것이다~ 라고 떠들어 대지만

​

그런 기준을 정하라고 어느 누가 자격을 부여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

당연히 정상에 대한 보편적 기준도 있을 수가 없다.

​

결국 인간 세상은 힘의 논리에 의해 지배하고 지배되는 형국에서

​

결정권은 바로 서구의 남성 연구자들이 부유한 서구 백인 남성을 중심으로 삼았고

​

모든 기준이 이를 바탕으로 설계되었다는 것을 들춰 냈으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

사회적 사다리 맨 꼭대기에 자신들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

자연의 순리라고 믿었고 그 시스템을 강화시켜온 과정들이

​

평균에 대한 집착을 낳았고 연쇄반응이 일어나 약자를 차별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

​

​

계급, 인종, 젠더, 종교적 신념이라는 기준과 함께 작동해온 정상성은

​

1801년 이탈리아의 천문학자에 의해 궤도의 평균치를 산출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

정상성 개념이 대두되었던 초창기에 '평균' 이라는 의미는

​

현대인들의 인식과 다르게 '완벽' 을 의미했었다.

​

상식적으로 평균을 산출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규모의 표준이 필요하다.

​

완벽함을 추구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평균을 추구하기에 몰두했고

​

그 기준은 단연 부유한 서구의 백인 남성 엘리트를 기초로 과학적 표준을 만들어 왔다.

​

저자의 표현을 정확히 빌리자면 그 표준은 바로...

 

 

 

백인 남성이자 건강​한 신체를 지닌 중간계급에

성별과 성 정체성이 일치하는 이성애자인 것이다.

 

 

 

이러한 기준은 질병에 있어서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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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까지는 약물 실험 대상이 남성인 경우가 흔했다.

​

질병은 남성과 여성, 그리고 피부색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을 간과하였다.

​

호르몬 수치 변동이 적은 남성이 비용도 적게 들고 여러모로 편한 실험 대상이기 때문에

​

의약품과 치료법들을 남성에 맞추다 보니

​

여성들에게는 늘 적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

저자는 이 사례를 소개하면서 모집단 설정을 잘못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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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표준을 정하고 보니 이 범주에 속하지 않으면

​

자연스럽게 부적합자가 되는 것이고

​

부적합자는 바로 노동계급이나 유색인 등 자신과는 다른 집단으로 규정하며

​

곧바로 배제하는 수순으로 이어진다.

​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표준화 과정이 결코 소수의 일탈적 주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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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서구 과학계와 의학계에서는

​

우생학이 이미 주류를 형성하던 시기였고

​

세계 곳곳에서 타자라 여겨진 이들을 파괴했던 교묘하고도 섬뜩한 역사가 있다.

​

우생학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늘 호기심이 있었기에

​

관련된 내용들을 읽는 동안에 나의 집중력은 탑이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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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다윈과 띠동갑 정도 차이 나는 사촌 동생 프랜시스 골턴이

​

아이러니하게도 '우생학' 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는 건 워낙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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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나 그의 부유한 친구들 같은 적합자에게는 더 많은 자녀를 낳도록 독려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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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부적합자에게는 자녀를 덜 낳게 하거나 심지어 상황에 따라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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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인에게 아예 출산을 금하도록 유도함으로써

​

국가 자원을 개선하는 역할을 한다는 명분으로 우생학을 공고히 했던 과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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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놀라운 것은 우생학을 지지했던 명단에 헬렌 켈러와

​

카네기, 록펠러 등 자산가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

기업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노동자들이 인종 과학에 있어서 적합자이길 바라는 그 마음은

​

뭐 이해하기 어렵진 않지만 절대로 공감할 수는 없는 일!

​

골턴이 살았던 시대에는 과학이 정상화의 핵심수단으로 작용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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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위계적이고 규범적인 관념이 백인이자 남성을 정상이라고 규정한 것이

​

오늘날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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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생학적 선동에 영감을 받았던 또 다른 인물은 바로 나치의 히틀러.

​

그래서 그가 통치할 당시 독일 식민지 전역에서 서로 다른 인종의 결혼을 금지시키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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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반유대주의를 강화하는 분위기로 흘러가기도 했었다.

​

사람이 다른 사람을 비정상이라고 판정하고 그 존엄함을 멋대로 제한하는 이 어이없는 오류를 보면서

​

우생학이 부여한 정상성 개념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

얼마나 위험한 권력이 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

우생학 연구의 가장 악의적인 대목은 적합자의 범주로

​

백인 남성이자 엘리트로 정한 후에 인간이 만든 이상에 맞추기 위해

​

인류를 고의적으로 변형시킬 수도 있다는 섬뜩함에 있다.

​

이것이 현재의 인종차별주의, 장애인 차별주의, 호모포비아, 트랜스포비아로

​

흘러들어와 세상의 차별들을 공고히 하고 있는 것이다.

​

우생학에서 만든 인간의 이상을 현재로 가져와보면 대략 이런 것이 아닐까.

​

'정상체중' 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저 평범한 것보다는

​

어떤 이상적인 것을 떠올리는 게 더 쉬워지는 메커니즘에 이미 길들여져 버렸다.

​

자본주의 원리가 팽배해지면서 정상 여부나 기준을 판단하는 중심에는

​

개인의 안녕이나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 성과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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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것 하나 인간 중심적이거나 인간친화적인 것이 없다.

​

이럴 거면서 왜 인간은 그리도 표준이나 평균을 정하려고 하는 것인가.

 

 

​

이미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 정신과 의사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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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성이 사회적 관습에 따라 결정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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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계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전문가의 횡포를 가동하여

​

관습을 따르라고만 권고했을 뿐이다.

​

당시 취약계층이나 미혼여성, 흑인, 노인, 성소수자 등등 사회의 주변인들은

​

저항할 힘조차 없기 때문에 가장자리에서 근근히 살아가는 것밖에 도리가 없었다.

​

스스로에게 '정상' 을 부여한 이들은 '비정상' 들에게

​

폭력을 일삼고, 차별하며 그들끼리 혐오하게 만든 역사가 씁쓸하다.

​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들을 돌아보게 해준 <나는 정상인가>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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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불평등이 유래한 또 다른 갈래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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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이 정상이라는 것은 오해일 뿐임을 자각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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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차근 인류에게 주어진 이 문제를 해결해나갈 동력이 절실해지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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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을 정당화하는데 정상성을 사용했던 집단의 교묘한 술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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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라도 직시하고 견제해야 한다.

​

그들의 술수가 교묘하다는 건 달리 말하면 정상성이 허구적인 관념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

근대 서구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허구적인 신념체계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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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존재하고 인간 문명에 침투해 있으니

​

왜곡된 기대치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문제의식부터 심고 보자.

​

기어코 평균에 속하려는 나를 진단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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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정상인가..."

​

이 질문이 과연 물어볼만한 가치는 있는 것인지 반문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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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덕질 - 일상을 틈틈이 행복하게 하는 나만의 취향
이윤리 외 지음 / 북폴리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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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계에서는 수상작품집을 출간함으로써 해당 출판사의 브랜드 마케팅과 더불어

​

신진작가들을 발굴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활동들을 많이 보여주고 있는 추세이다.

​

미래엔도 이 흐름에 발맞춰 '전국 덕질 자랑' 을 주제로 하여

​

작년부터 "미래엔 단편 에세이 공모전" 이라는 이름으로

​

다양한 단편 에세이들을 선보이고 있다.

​

올해 제2회 수상작품집은 그래서 <오늘의 덕질> 되시겠다.

​

https://blog.naver.com/hyuna5071/222782581256

 

작년에 출간된 제1회 수상작품집은 바로 <이웃덕후 1호> 였다.

​

덕후의 삶은 참으로 스펙트럼이 넓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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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하고 싶은 나만의 취향 중에서 2023년에 꼽힌 주제와 분야는

​

SF, 책, 여성 아이돌, 발레, 식충식물, 로맨스판타지, 인형까지

​

모두 일곱 덕후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

일상과 취향에 진심인 이들이 용기 내어 자랑하는 것을

​

이제는 수용하고 나아가 응원도 해주는 시대가 되었지만

​

여전히 한쪽 구석에서는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폄하하는 경우도 없진 않다.

​

그럼에도 목소리를 내는 그들의 공통점은

​

하나같이 진실로 덕후를 권한다는 것이다.

​

결국 인간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향하게 되어 있다.

​

지금의 나를 기분좋게 만드는 것에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이고

​

내가 상상하는 세상을 바라보며 그저 나아가는 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

​

"깨닫지 못할 뿐이지 우리는 누구나 무언가의 덕후다."

​

​

덕질은 생산성이 없으니 당연히 의미없는 활동이라고 치부하는 이들에게

​

이 일곱 덕후는 비로소 덕질을 통해

​

자기 자신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

나를 더 사랑하는 방법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

주제가 다양해서 독자마다 이해와 공감의 폭과 깊이가 각각 다를 수도 있다.

​

그래서 독서모임 하기에 즐겁고 흥미로운 책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

(덕후까지는 아니지만 독서모임의 쓸모를 높이 보는 한 사람으로서~~^^)

​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인생에서 수많은 전환점들을 만났고,

​

또 때로는 미처 알아보지 못해 조용히 통과했을수도 있다.

​

덕후를 권하는 이 책을 읽으면서

​

타인의 공감이 없더라도 묵묵히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서

​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행복한 순간을 맞이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

역시 1회보다는 2회가 나은가보다.

​

이번에 나온 제2회 미래엔 단편 에세이 수상작품집 <오늘의 덕질>은

​

재밌어서 2독을 했으니까.^^

​

​​


 

개인적으로는 여성 아이돌, 발레, 식충식물, 로맨스판타지, 인형을 향한 덕질은

​

나의 취향과 겹치는 지점은 없었지만

​

저들의 세계는 또 저런 기쁨이 있구나 하면서 즐겁게 읽었다.

​

글의 맛이 있는 에세이들이다.

​

이동하면서 가볍게 한 꼭지씩 읽기에도 좋은 구성이다.

​

어쩌다 보니 이번 수상작품집의 순위와 나의 취향이 딱 겹친다.

​

​

"'덕후' 라는 종족은 꼭 스스로 좋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

내가 경험한 즐거움을 다른 이들에게도 맛보여주고 싶어하는 것 같다."

​

​

라고 식충식물 덕후가 말하기도 했는데 나에게 무언가의 덕후라고 붙일만한

​

후보들을 꼽자면 책, 여행, 등산, 조깅, 소설... 정도.

​

이렇다 보니 나 역시도 SF와 책 덕후의 이야기에 마음이 향할 수밖에 없다.

​

​책 덕후가 사랑하는 장소에 도서관이 빠질리가 없다.

​

그 곳에서 만났는데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라는 노랫말이 떠오를 이야기들로

​

피식 웃음도 나고 괜히 나 혼자 주변을 두리번 거리게 만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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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정수가 도서관에 다 모여 있다니...ㅋㅋㅋ

​

역시 도서관에는 세상의 모든 지혜가 있다.

 

 

​
 

 

SF 덕후는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옥타비아 버틀러를 자기 소개에 언급하며

​

이러한 이야기들에 빚지며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데

​

정작 에세이 속에는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가 등장한다.

​

쥘 베른의 <달나라 탐험>으로 고전적인 SF소설도 만나긴 했지만

​

현재까지 내가 만나본 SF 중에서 원픽으로 꼽는 작품이 바로 테드 창의 이 소설집이다!

​

https://blog.naver.com/hyuna5071/222857154612


8개의 단편 중에서 표제작과도 같은 "네 인생의 이야기" 는

​

영화 <컨택트> 로도 만나볼 수 있는데 영화나 원작이나 제각각 다 좋아하는 작품이다.

​

이미 미래의 결과를 알고 그 언어를 구사하는 존재인 외계인 헵타포드가

​

어느 날 지구를 방문했고 지성을 가진 인간 집단들은 그들의 방문 목적을 알아내고자 한다.

​

언어학자 루이즈가 이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헵타포드의 언어를 배우면서

​

점차 자신도 헵타포드와 같이 사고하게 되고 고유한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데...

​

미래에 자신의 딸이 젊은 나이에 죽게 될 것임을 알면서도

​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결정을 하는 언어학자 루이즈.

​

루이즈의 결정을 보여주면서 작가는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

"알면서도 불행한 미래를 감당할 사람이 있을까"

​

"불행한 미래를 알면서도 자유의지로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까"

​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제외하고 운명만이 남는다면 인간이 살아갈 의미가 있을까"

​

작가 자신의 인생 경험과 SF 작품들을 연결지어 소개하면서

​

SF 덕후가 된 자신의 선택에 그럴만한 이유와 가치가 있음을 설파한다.

​

SF 덕후 뿐만이 아니다.

​

그 대상이 다를 뿐, <오늘의 덕질> 에세이 안에 담겨진 이야기들의 주인공들은

​

하나같이 자신에게 세상을 보여준 그 대상을 향해 온전히 애정을 보낸다.

​

그로부터 받은 것이 감사하고 자신을 좀 더 성숙하게 해주기에

​

나 혼자 좋아하는 걸로 그칠 수 없다는 것이다.

​

자신의 깨달음이 독자들에게도 기분좋게 전염되길 바라는 마음이 전해진다.

​

각자가 꾸려가고 있는 인생의 행간에 귀를 기울이는 친절함을 발휘하는 건 어떨지.

​

​

​

 

누군가에겐 하찮은 것이겠지만

​

바로 그것이 또 누군가에게는 삶의 의미가 된다.

​

일곱 덕후가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낸 이 에세이 책 공간에서

​

얼마나 재밌어 했고 마음의 치유를 받았을지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다.

​

작지만 소소한 행복, 나에게 소확행이란 내 일상의 기억들을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

​

지금 이 순간, 이 기록의 행위에 있다.

​

내가 블로그를 운영하는 이유와 겹치기도 하니

​

이제는 덕후 대열에 하나 더 추가해야겠다.

​

기록하는 행위에 몰입할 때의 순수한 기쁨이 있으니 '기록 덕후' 도 추가? ㅎ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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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이 불안하다면 - 불안감을 추진력으로 바꾸는 가장 과학적인 방법
트레이시 데니스 티와리 지음, 양소하 옮김 / 와이즈베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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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지털 기술과 불안감에 대해 연구해온 신경과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저자는

​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며 살아가는 감정인 불안에 대해서

​

알 수 없는 미래의 불확실성을 어떤 태도로 대처할 것인지 이야기한다.

​

심리학책 <불안이 불안하다면> 에서 불안은 결코 질병이 아니며

​

과거 그렇게 접근했던 인류의 역사에 오류가 있었음을 지적한다.

​

저자의 경험과 과학적 연구 결과를 버무려서 "불안의 쓸모" 를 역설함으로써

​

불안감을 추진력으로 바꾸는 가장 과학적인 방법을

​

3부, 총 10개의 장으로 구성하여 제시하고 있다.

​

 

 

 


​

 

저자는 인간 삶의 불청객이라 생각하기 쉬운 불안이 사실은

​

인간에게 친구가 되자고 속삭이는 것이라며

​

덴마크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를 소환한다.

​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친구보다

​

내가 듣고 싶지 않은 중요한 말을 해 주는 친구가 진짜 좋은 친구이듯이

​

그간 도망가고 싶게 만들었던 불안이라는 감정이

​

사실은 인간에게 제법 쓸모가 있다는 것이다.

​

불안, 걱정, 우울, 초조함은 그저 불완전한 감정일 뿐이며

​

누군가에게 태도로 강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

불안을 공포나 질병의 관점으로 볼 것이 아니라

​

인간 본성의 특징을 밝혀줄 하나의 감정으로 접근하여

​

기존의 오해를 깨부수고 새로운 사고방식을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

불안의 정의, 불안이 존재하는 이유,

​

중세 암흑기의 현대 의학에서부터 시작된 질병으로서의 불안의 역사,

​

미래의 불확실성을 통해 올바른 방법으로 불안해하는 법 등을 만나게 될 것이다.

​

​

불안은 우리 신경계를 활성화해 긴장감을 높이고

심박수를 증가시킬 뿐 아니라 통제 불가능한 생각을 불러일으켜

우리를 초조하고 안절부절못하게 만든다.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로 '목을 조르다',

'고통스럽게 조이다', '불편하다' 를 뜻하는 말에서 파생된

이단어는 불쾌함과 더불어 두려움으로 마비된 몸과

우유부단함에 사로잡힌 마음,

다시 말해 신체적 및 정신적 질식의 결합을 뜻한다.

​

​

<불안이 불안하다면> P.20

불안함을 느끼게 되면 인간의 시야는 숲 대신 나무를 보는 수준에 머무르게 되고

​

부정적인 가능성에 대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

인간을 바짝 긴장하게 하는 경계심이 작동하게 되면서

​

불확실성으로 인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

이는 불안이 인간에게 보내는 경고인 셈이다.

​

바로 이 지점에서 저자는 불안에 대처해왔던 우리의 자세를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

인간은 불안이 보낸 경고를 받아들이기 보다는

​

무시하고 덮어버림으로써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 버린다.

​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니까.

​

하지만 외면하는 것은 결코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

보이지 않으면 해결된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일 뿐.

​

본인이 느끼는 현재의 불안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

자신의 감정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가 중요하다.

​

이 때부터 불안은 본격적으로 우리에게 쓸모를 경험하게 해줄 것이고

​

그 안에서 또 다른 가능성과 지혜를 발견하게 한다.

​

이것이 바로 올바르게 불안해하는 법의 시작이다.

​

​

​

​

​

불안에 휩쓸리는 게 아니라 불안을 내가 쥐락펴락할 수 있도록 하는 것.

​

불안이라는 감정의 주인은 바로 나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

무엇보다도 중요해 보인다.

​

그렇다면 나는 지금의 불안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고민하게 되고

​

내가 원하는 방식을 선택해서 실험해 가는 과정 속에서

​

자연스럽게 불안의 덫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

 

 

​

 

과거 신 중심의 세계관에서 인간의 경험론과 과학적 관찰로 나아가는 과도기에 있을 때

​

화학적 약물을 통해 고통을 가라앉히는 것이 산업이 되었고

​

이러한 흐름으로 인해 불안이 질병인 것처럼 여겨져

​

빠른 시간내에 고통을 잠재우는 것의 효용성을 찬양했던 시절도 있었다.

​

물론 지금도 전혀 사라졌다고 볼 수는 없다.

​

여전히 약물의 힘에 의존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목격하곤 하지만

​

그것이 결코 본질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이제는 안다.

​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면 사고방식을 바꿔야 한다.

​

​

​

​

​

인간은 불확실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

그런 인간의 조건을 거역할 수 없다면 함께 살아가는 법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

불확실성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본의 아니게 인류는 지혜를 얻었던 경험이 있다.

​

코로나 팬데믹이 바로 그것이다.

​

남녀노소, 빈자와 부자 상관없이 인류는 안전과 생명에 대한 최고 수준의 불안을 경험했다.

​

전염에 의한 예측 불가능성은 인간을 조급하고 이기적이게 만들었지만

​

동시에 공동체의식, 시민의식을 결집시키며 존엄한 인간 그 자체를 바라보게 되었다.

​

나와 내 가족의 안전을 인생 최우선 과제로 삼으며

​

그 때의 불안이 오히려 모두가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한

​

주의력과 추진력을 끌어모으게 했다.

​

주변의 상황과 환경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생기면서

​

미래의 행복을 위해 계획하고 실천하는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

코로나 19 대유행으로 인한 불확실성은

​

인간으로 하여금 위기의 순간에 사회적 존재임을 자각하게 했고

​

함께 하는 것의 힘을 일깨워 주었다.

​

전염병의 대유행이 위기였음은 자명했으나

​

생존을 위해 어떠한 행동을 취하게 함으로써

​

인간의 잠재적인 가능성을 폐기하지 않았고 창의성으로 연결시켜

​

삶의 진보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고 본다.

​

물론 인류 앞에 예고없이 찾아온 뉴노멀 시대와 패러다임의 변화가

​

인간의 삶을 무조건 행복하게 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

그렇다고 해서 늘 평온함을 유지하는 것만이 인간을 만족시키는 삶 또한 아닐 것이다.

​

변화가 없는 삶은 인간에게 곧 존재의 소멸을 의미한다고 보기 때문에.

​

전 인류가 경험했던 코로나 팬데믹은 인간으로 하여금 불안을 마주하게 했고

​

적응할 수 있게 했으며 나에게 이로운 환경으로 만들게 하는 힘을 심어주었다.

​

심리학책 <불안이 불안하다면> 을 읽으면서

​

불안이라는 감정이 인류에게 지혜와 통찰력을 제공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

이 책에서 나는 불안의 쓸모를 이렇게 찾았다.

​

​

​

​

​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지 않았지만 어디 가서 읽었다고 말할 수 있는

​

'불안과 친해지는 3가지 원칙' 방출~~!!!

1. 불안은 미래에 관한 정보다. 불안에 귀를 기울여라.

​

2. 불안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당분간은 그냥 내버려두어라.

​

3. 만약 불안이 유용하다면

그 불안으로 목적성 있는 무언가를 하라.

​

​

<불안이 불안하다면> P.216

 

 

이 책에서 저자 트레이시 데니스 티와리는

​

불안을 '극복' 하는 게 목표가 아님을 분명히 밝혀두고 있다.

​

우리가 느끼는 불안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해한 뒤에

​

삶을 더 좋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하면 될 것이다.

​

앞으로는 "불안" 이라는 감정에 허우적대며 신체적, 정신적 고통에 매몰되기 보다는

​

영감과 에너지를 얻는 기회로써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처해 보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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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 -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불편한 공존
마이클 샌델 지음, 이경식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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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
 

와이즈베리에서 믿고 보는 마이클 샌델 교수의 책이 개정판으로 나왔다.

​

초판은 1996년에 <민주주의의 불만> 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었고

​

거의 4반세기 만에 전체 분량의 1/4을 새로 써서 나온 개정판의 제목은

​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

​

<정의란 무엇인가> 에서는 한국 사회에 그야말로 '정의' 열풍을 몰고 왔고,

​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에서는 시장지상주의를 비판했으며,

​

<공정하다는 착각> 에서는 민주주의 사회 속에서 능력주의가 마치

​

절대선인양 사회 질서를 교란시켰다고 본 그의 문제의식이

​

이번에는 "민주주의" 로 향한다.

​

감수로 참여한 숭실대 철학과 김선욱 교수는

​

마이클 샌델의 국내 번역서 대부분의 번역과 감수를 맡고 있을 정도로

​

인지도만큼은 확실하다.

​

이번 책의 해제 역시 문장이 명료하고 깔끔한 정리 굿~~!

 

마이클 샌델의 글은 전후 논리가 촘촘하면서도 친절해서 자동으로 집중 모드가 된다.

​

총 7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고

​

목차를 통해 보이는 키워드들이 이번에 마이클 샌델이 중요하게 다루는 것들이 맞다!

​

정치경제학, 시민적 덕목, 임금노동, 자유노동, 자유주의, 케인스혁명, 절차적 공화주의....

​

현재 우리 모두가 느끼는 민주주의의 위기가 어떤 시대적 흐름에 의해서

​

변화해 왔는지 민주주의의 서사를 만날 수 있었다.

​

그리고 민주주의의 불만에 대한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도.

​

아하~~

​

표제관련정보가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거였구나.^^

​

민주주의를 이룩하고자 하는 이들의 염원과 달리

​

언제부턴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공존하기 시작하더니

​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를 불편함과 온갖 해악들은

​

오롯이 제도를 만든 인간이 짊어지고 있는 격이다.

​

​

 

​
 

<공정하다는 착각> 이후 3년 만에 마이클 샌델이 꺼낸 불편한 화두는

​

"불만을 너머 파탄이 난 민주주의" 이다.

​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알고 있지만

​

현실도 정말 그럴까?

​

이 질문에 어느 누구도 시원스럽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는 현실에 놓여 있기 때문에

​

이 책은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읽혀져야만 한다.

​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90년 독일의 통일을 보았던 시기까지

​

우리는 냉전시대를 지켜봤고 냉전의 종식과 함께 공산주의가 붕괴되며

​

미국판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살아남아 민주주의가 승리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

인간에게 이로운 민주주의로 진화한다면 너무나 좋겠지만

​

현재로선 불행히도 그래 보이진 않는다.

​

공동선을 향해 바로잡아야 하는 길이 아득히 멀어 보이기만 하다.

​

미국 건국 초기 도덕적 덕목과 자치의 역량을 갖춘 시민을 양성하여

​

국가가 부패한 힘에 휘둘리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지의 공화주의와 다르게

​

인간의 욕망대로 자유롭게 선택권을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

자유지상주의가 점점 팽배해지면서 시민적 덕목은 고사하고

​

사회적 결속력마저 붕괴되어 가는 현실 속에 무기력하게 놓여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

게다가 자본주의까지 활개를 치며 인간의 정신을 황폐하게 만든다.

​

현재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실험중이다.

​

​

​

​

미 공화국 초기의 정치인들에게서 마치 사상가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

​

영국의 강제적인 과세법에 저항하며 독립을 이뤄냄으로써

​

유럽발 부패를 끊어내고 공화주의적 이상을 신대륙에

​

제대로 뿌리내리려는 열망이 그들에게 있었다.

​

그들이 바라는 공화주의는 시민적 덕목과 소박함을 갖춘 시민으로 국가를 구성하고

​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

그런데 언젠가부터 민주적 시민의 권리보다 소비자 마인드가 부상하게 되고

​

시장에 대한 믿음과 금융의 역할이 커지면서

​

경제 논쟁에서 시민적 노선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

마이클 샌델이 지적한 현재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이자 문제는

​

공공의 이익보다 개인의 자유를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것이다.

​

이 자유지상주의의 파급력은 한국에서도 역시 상당하기 때문에

​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인가에 대한 의심이 있다면 이 책이 적절하다.

​

정치경제를 주무르는 엘리트들은 사익을 추구하며

​

죄책감없이 시민들에게 금융 자본주의적 폭력을 행사하지만

​

부채로 허우적대는 소시민들은 온갖 폐해를 감당할 여력이 없다.

​

시장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개인만 죽어나고

​

설상가상 공동체의 도덕적 결속력마저 느슨해지는 것이 우려스럽다.

​

미 공화국 초기의 정치인들은 미국의 발전을 꿈꿨지만

​

구체적으로 만들어가는 방식은 너무나 달랐다.

​

이 책을 읽고 나면 현재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자유주의, 자본주의, 민주주의는

​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제도인지 묻고 싶어진다.

​

인간이 만든 제도지만 일부에게만 이로울 뿐,

​

평범한 시민들은 소비자로 전락시키고 수단으로 삼으며

​

비인간적인 산업과 상업의 방대한 구조 속에서 교묘하게 존재 가치를 착취하고 있다.

​

건국 초기 공화주의자들의 주도 하에 형성해 갔던 시민의식의 정치경제학은

​

점점 영향력을 잃어가고 시간이 흐를수록

​

인간이 자기 목적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하는 자유방임적 자유주의,

​

자발주의적 자유관이 지배하는 세상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

이로써 미국적 이상, 공화주의적 이상은 점점 소멸되어 가고

​

번영과 성장에만 몰두하면서 이제는 인간의 욕망이 민주적 지배를 허용하지 않게 되었다.

​

좋음(the good) 과 옳음(the right), 무엇이 선일까?

​

사생활의 권리를 지나치게 보호해주는 자유주의.

​

개인만 있고 공동선, 공적인 삶은 황폐해져 가는 이 사회의 민주주의가

​

과연 건강해 보이는지, 인간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묻고 싶다.

​

​

​

​

시민의 바람직한 덕목을 형성하게 한다는 것도 특정한 가치관을

​

강요하는 것이라 보았던 존 롤스는 정면으로 공화주의적 발상을 거부한다.

​

그는 옳음이 좋음보다 우선하며 개인권이 공적인 삶보다 중요하다는

​

자발주의적 자유관의 입장을 취한다.

​

여기에 마이클 샌델은 공동체에 속하는 것이 가지는 소중한 가치들이

​

인간과 삶에 깨달음을 준다는 믿음으로 대응하고 있다.

​

시장 논리의 효율성이 모든 사회 문제를 덮어버리고 번영을 제공할 거라는

​

자본주의, 자유 지상주의의 교묘한 술수에 맞서

​

"시민적 공화주의" 라는 공공철학으로 끊임없이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다.

​

경제가 민주적 통제에 순응하지 않음으로 해서

​

양극화와 사회적 불평등이 심각해지고 있지만

​

그럼에도 공동선을 포기하지 않는 자유적 공동체주의자의 문제의식을

​

진지하게 경청하고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

​

 

​

국가 경제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마지막으로 묻고 싶다.

​

시민이 시민으로 적절한 자치를 행사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으로

​

미국 국가 건설 당시부터 품었던 시민다움.

​

마이클 샌델은 현재의 민주주의를 위기라고 진단하며

​

미국 공화주의의 기초 정신을 끌어올려 다함께 공적 삶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 한다.

​

인간이 만들었지만 사실 하나의 유기체인 것처럼

​

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이 인간을 피폐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이 한편 무섭기도 하다.

​

시장의 지배에 휘둘리지 않는 시민적 덕목을 갖춘 국민들이

​

자본의 힘에 대항할 수 있도록 모두가 바람직한 삶, 공동선을 만들어서

​

인간 친화적인 민주주의 환경을 만들어나갈 수 있기를 바래본다.

​

돈이나 권력, 사치나 허영 같은 부패한 힘이 아니라

​

민주주의가 경제권력을 지배할 수 있도록

​

인간적인 덕목, 공공의 정신이 이 사회에서 주류의 공공철학이 되길 희망한다.

​

현재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

자치의 역량, 시민성에 대한 인식, 공적인 삶의 회복.

​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불편한 공존을 바라보며

​

우리 모두에게 이로운 민주주의를 다시 형성하기 위해

​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

공화주의, 공동체주의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기까지

​

마이클 샌델식의 철학적 해석과 통찰이 담긴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는

​

이번에도 역시 수용할 수밖에 없도록 설득력 충만한 인문도서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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