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상인가 - 평균에 대한 집착이 낳은 오류와 차별들
사라 채니 지음, 이혜경 옮김 / 와이즈베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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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각 집단마다 추구하는 이익과 가치관이 있다.

타자를 배제함으로써 자신의 위상이 자동 승격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거대한 사회를 상대로 한낱 개인이 저항해야 하는 순간에

공동체의 연대를 발휘하는 이들도 있다.

인간의 본질 중에 본질인 존엄함은 계급이나 인종, 성별과 관계없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간 인간의 역사에는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이분법적인 범주에 의해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측정하고 표준화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지속하고 있다.

누가 누구를 정상인지 아닌지 정의할 수 있는가!

'적절하다, 평균이다, 정상이다, 표준이다' 라는 개념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왔으며 누가 설계했는가?

자신의 성장과정 속에서 정상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의문을 가져왔던 사라 채니가 <나는 정상인가> 에서 던지는 질문이다.

의학과 감정의 역사에 관한 연구를 통해 저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가 정상인지 아닌지 걱정하고

내가 정상인의 범주에 속하는지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 자체에 문제를 제기한다.

도대체 정상이라는 관념이 뭐길래???

법으로 정해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태초에 정해져 내려오는 것도 아닌

'정상성' 개념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걸까.

사라 채니는 정상성이란 기준은 통계학의 급속한 발전을 계기로

다양한 학문들이 유럽과 북미를 중심으로

과학적 관행 속에서 광범위하게 뿌리내리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심지어 그 역사는 겨우 200년 밖에 되지 않음에도

오늘날 우리의 법률, 사회구조, 건강과 정상성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실감하게 한다.

즉, 정상성 관념은 자연 법칙이 아니라 지난 수 세기 동안

인간 세상에서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설계된 것이며

서구의 기준에서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개인의 방식에 반한다면

모든 공동체를 서슴없이 타자화한다고 경고한다.

표준, 평균, 기준, 정상의 개념이 생겨나게 된 배경부터

인간의 몸과 마음, 성생활, 감정, 자녀, 사회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에 교묘히 파고든 정상성의 민낯을 파헤친다.

저자가 개인적으로 겪었던 인생 경험들 속에서

평균에 집착해온 인간의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

이것은 비단 저자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정상의 범주에 속했을 때 안정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평균과 달라 보이고 싶은 욕망 또한 내재되어 있다.

또는 평균이나 기준에 속하지 않으면 마치 내가 비정상인 것 같아 불안감을 느끼기도 한다.

사회적으로 더 바람직해 보이는 쪽에 줄을 서고

나만 아니면 된다는 자기중심적인 못된 심리가 작용하면

다른 집단들을 주변화하는 경향까지 보인다.

인간의 지난 역사 중에서 미국 연방정부가 기숙학교 제도를 도입해 부족 문화를 뿌리 뽑아

원주민을 적응시키고 동화시키는 정책을 펼쳤던 것만 봐도 그러하다.

미의 보편적 기준은 이것이다~ 라고 떠들어 대지만

그런 기준을 정하라고 어느 누가 자격을 부여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당연히 정상에 대한 보편적 기준도 있을 수가 없다.

결국 인간 세상은 힘의 논리에 의해 지배하고 지배되는 형국에서

결정권은 바로 서구의 남성 연구자들이 부유한 서구 백인 남성을 중심으로 삼았고

모든 기준이 이를 바탕으로 설계되었다는 것을 들춰 냈으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사회적 사다리 맨 꼭대기에 자신들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자연의 순리라고 믿었고 그 시스템을 강화시켜온 과정들이

평균에 대한 집착을 낳았고 연쇄반응이 일어나 약자를 차별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계급, 인종, 젠더, 종교적 신념이라는 기준과 함께 작동해온 정상성은

1801년 이탈리아의 천문학자에 의해 궤도의 평균치를 산출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정상성 개념이 대두되었던 초창기에 '평균' 이라는 의미는

현대인들의 인식과 다르게 '완벽' 을 의미했었다.

상식적으로 평균을 산출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규모의 표준이 필요하다.

완벽함을 추구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평균을 추구하기에 몰두했고

그 기준은 단연 부유한 서구의 백인 남성 엘리트를 기초로 과학적 표준을 만들어 왔다.

저자의 표현을 정확히 빌리자면 그 표준은 바로...

 

 

 

백인 남성이자 건강​한 신체를 지닌 중간계급

성별과 성 정체성이 일치하는 이성애자인 것이다.

 

 

 

이러한 기준은 질병에 있어서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1990년까지는 약물 실험 대상이 남성인 경우가 흔했다.

질병은 남성과 여성, 그리고 피부색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을 간과하였다.

호르몬 수치 변동이 적은 남성이 비용도 적게 들고 여러모로 편한 실험 대상이기 때문에

의약품과 치료법들을 남성에 맞추다 보니

여성들에게는 늘 적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사례를 소개하면서 모집단 설정을 잘못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렇게 표준을 정하고 보니 이 범주에 속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부적합자가 되는 것이고

부적합자는 바로 노동계급이나 유색인 등 자신과는 다른 집단으로 규정하며

곧바로 배제하는 수순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표준화 과정이 결코 소수의 일탈적 주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서구 과학계와 의학계에서는

우생학이 이미 주류를 형성하던 시기였고

세계 곳곳에서 타자라 여겨진 이들을 파괴했던 교묘하고도 섬뜩한 역사가 있다.

우생학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늘 호기심이 있었기에

관련된 내용들을 읽는 동안에 나의 집중력은 탑이었다는 것.^^

찰스 다윈과 띠동갑 정도 차이 나는 사촌 동생 프랜시스 골턴이

아이러니하게도 '우생학' 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는 건 워낙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다.

자신이나 그의 부유한 친구들 같은 적합자에게는 더 많은 자녀를 낳도록 독려하고,

반대로 부적합자에게는 자녀를 덜 낳게 하거나 심지어 상황에 따라서는

특정인에게 아예 출산을 금하도록 유도함으로써

국가 자원을 개선하는 역할을 한다는 명분으로 우생학을 공고히 했던 과학자였다.

더 놀라운 것은 우생학을 지지했던 명단에 헬렌 켈러와

카네기, 록펠러 등 자산가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기업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노동자들이 인종 과학에 있어서 적합자이길 바라는 그 마음은

뭐 이해하기 어렵진 않지만 절대로 공감할 수는 없는 일!

골턴이 살았던 시대에는 과학이 정상화의 핵심수단으로 작용했고

당시 위계적이고 규범적인 관념이 백인이자 남성을 정상이라고 규정한 것이

오늘날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우생학적 선동에 영감을 받았던 또 다른 인물은 바로 나치의 히틀러.

그래서 그가 통치할 당시 독일 식민지 전역에서 서로 다른 인종의 결혼을 금지시키기도 했었다.

이는 반유대주의를 강화하는 분위기로 흘러가기도 했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비정상이라고 판정하고 그 존엄함을 멋대로 제한하는 이 어이없는 오류를 보면서

우생학이 부여한 정상성 개념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얼마나 위험한 권력이 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생학 연구의 가장 악의적인 대목은 적합자의 범주로

백인 남성이자 엘리트로 정한 후에 인간이 만든 이상에 맞추기 위해

인류를 고의적으로 변형시킬 수도 있다는 섬뜩함에 있다.

이것이 현재의 인종차별주의, 장애인 차별주의, 호모포비아, 트랜스포비아로

흘러들어와 세상의 차별들을 공고히 하고 있는 것이다.

우생학에서 만든 인간의 이상을 현재로 가져와보면 대략 이런 것이 아닐까.

'정상체중' 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저 평범한 것보다는

어떤 이상적인 것을 떠올리는 게 더 쉬워지는 메커니즘에 이미 길들여져 버렸다.

자본주의 원리가 팽배해지면서 정상 여부나 기준을 판단하는 중심에는

개인의 안녕이나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 성과로 귀결된다.

어느 것 하나 인간 중심적이거나 인간친화적인 것이 없다.

이럴 거면서 왜 인간은 그리도 표준이나 평균을 정하려고 하는 것인가.

 

 

이미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 정신과 의사들은

정상성이 사회적 관습에 따라 결정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 경계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전문가의 횡포를 가동하여

관습을 따르라고만 권고했을 뿐이다.

당시 취약계층이나 미혼여성, 흑인, 노인, 성소수자 등등 사회의 주변인들은

저항할 힘조차 없기 때문에 가장자리에서 근근히 살아가는 것밖에 도리가 없었다.

스스로에게 '정상' 을 부여한 이들은 '비정상' 들에게

폭력을 일삼고, 차별하며 그들끼리 혐오하게 만든 역사가 씁쓸하다.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들을 돌아보게 해준 <나는 정상인가> 덕분에

사회의 불평등이 유래한 또 다른 갈래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평균'이 정상이라는 것은 오해일 뿐임을 자각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인류에게 주어진 이 문제를 해결해나갈 동력이 절실해지는 시점이다.

차별을 정당화하는데 정상성을 사용했던 집단의 교묘한 술수를

이제라도 직시하고 견제해야 한다.

그들의 술수가 교묘하다는 건 달리 말하면 정상성이 허구적인 관념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근대 서구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허구적인 신념체계였지만

여전히 존재하고 인간 문명에 침투해 있으니

왜곡된 기대치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문제의식부터 심고 보자.

기어코 평균에 속하려는 나를 진단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나는 정상인가..."

이 질문이 과연 물어볼만한 가치는 있는 것인지 반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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