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 (10만 부 기념 리커버) - 뇌과학과 정신의학이 들려주는 당신 마음에 대한 이야기
전홍진 지음 / 글항아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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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을만한 심리학책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

미국과 한국의 우울증 환자 비교 연구,

치매와 스트레스에 대한 치료 및 연구를 해온

정신건강의학과 전홍진 교수의 베스트셀러이다.

십만 부 기념 리커버가 나오고 나서야 만나게 되었는데

이것도 글항아리 서포터즈여서 주어진 기회.^^

가끔씩 이런 생각이 들곤 했었다.

'나는 예민한 사람인걸까?'

내가 나를 생각해 보면

상대방의 언어와 표정을 통해 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유추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고

정서적으로 섬세한 편이긴 한 거 같은데

예민하다는 단어를 평소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늘 궁금했었다.

뇌과학으로 접근해서 예민함에 대한 처방전을 내려준

이 책을 읽고 나니까 비로소 판단의 기준이 선 듯 싶다.

저자는 "매우 예민한 사람들 Highly Sensitive Person" 에 대해서

대인관계에 매우 민감하고 다른 사람들보다는 자신을 피곤하게 하며

보통 사람보다 좀 더 힘들게 사는 사람들 이라고 정의했다.

한마디로 '외부 자극에 민감한 사람들' 이다.

인간의 특징 그대로 이 정의를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다 보면

예민함이 자칫 유별나고 까탈스러움이라는 부정적인 특징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예민함은 그냥 느낌으로 그렇게 형성된 것이 아니다.



우리 뇌는 마음을 담고 있는 기관이다.

인간이 느끼는 수많은 감정과 생각은

뇌의 신경 회로망에 담겨 있고

수억, 수조 개의 회로가 모여 그 사람의 마음의 구조를 만든다.

시간이 지나면서 필요 없어지거나 오래된 신경 회로는

망각 과정을 통해 사라지는 반면,

자주 경험되거나 강렬한 트라우마와 연결된 신경망은

더 강화되어 단단해진다.

반복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매우 예민한 뇌'는

'매우 예민한 사람'을 만들게 된다.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 중에서





뇌의 서로 다른 역할과 그 상관관계를 제대로 알면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와 여타 기본적인 욕구를 관장하고 조절함으로써

자신의 예민함을 스스로 통제, 관리할 수 있다.

인간의 뇌는 처음부터 완전히 만들어진 상태가 아니다.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일이 각자 다르고

그 영향에 의해 평생에 걸쳐 인간의 뇌는 수정, 변형되어간다.

살다가 스트레스를 견딜 에너지가 바닥나게 되면

인간에게는 바로 우울증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온다.

그것이 쌓이고 쌓이면 만성적 긴장과 불안을 안고 살아가게 되고

이것이 예민함으로 강화되면서 심해지면

정신적인 문제, 병적인 상태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진행되지 않도록 타고난 것과 후천적으로 형성된 예민함을

잘 조절해서 선을 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하지만 무엇이든지 동전의 양면이 있듯이

'예민함'이라는 특성이 꼭 단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예민성을 잘 극복한 유명인들의 사례를 들어 이를 증명해주기도 한다.

저자는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자신의 출생과 성장과정으로 인한

결핍과 슬픔이 스티브 잡스로 하여금

버튼에 대한 공포증(환 공포증) 을 갖게 했다고 추정한다.

만성적인 불안, 우울증, 노이로제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와 관련이 깊다.

어린 시절 자신을 거부한 것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이

어머니의 모성을 형상하는 둥근 모양에 대한 공포에


담겨 있을 수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공개하면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승화시켰던 스티브 잡스 외에

자신의 우울증을 대놓고 black dog 이라고 불렀던 윈스턴 처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면서 우울증을 극복했다고 알려진다.

마음은 신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데

예민함은 유독 그러한 듯 싶다.

우리 뇌의 기억하는 부분을 이렇게 예민한 사람들은

보통 불안으로 강화시키는 성향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럴수록 저자는 자신이 하는 일을 즐기라는 처방전을 제시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에 집중할 것.

예민한 사람들은 각성 수준이 높아서

뇌가 그것을 감당하기 힘들어하는 경우에 생긴다고 한다.

너무 많은 외부적 자극들을 다 신경쓰다 보면

예민성을 스스로 조절하지 못해서 항상 긴장 상태에 놓이는 것이다.

과거 일이 자꾸 생각나면 내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아닌지 체크하고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리라고 조언한다.

예를 들면 책을 읽거나 나에게 맞는 운동을 하나 정해서 꾸준히 하기.

전문가가 추천하는 방법 둘 다 내가 지금 현재 집중하고 있는 것들.

혹여 내가 예민한 사람에 속한다고 하더라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법을 꾸준히 실천하고 있는 중이니까

나는 지금 괜찮은 상태라고 스스로 진단해도 되겠지? ㅎㅎㅎ





심리학책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 이라는 제목 답게

이 책을 읽는 데 할애한 시간이 아깝지 않을 좋은 정보들이 제법 들어 있다.

긴장 이완 훈련, 트라우마에 대한 정보와 극복하는 방법,

매우 예민한 사람들의 다양한 정신과 상담 사례와 전문가의 처방전,

예민성을 잘 극복한 사람들의 좋은 예, 스트레스 지수에 대한 정보,

예민함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방법들을 소개한다.




누구나 살다 보면 감정적 상처가 있는데

그걸 잘 다스리면 마음의 평정심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고,

그렇지 않을 때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방어기제가 작동하게 된다.

부정, 왜곡, 자신의 결점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남탓하는 투사,

대상을 비판없이 수용하는 내재화,

퇴행, 불안과 우울 같은 정신적 문제가 신체적인 증상으로 나타나는 신체화,

자신의 문제 행동에 대해서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내고 재해석하는 합리화,

자신의 욕구나 태도, 사고를 외부 대상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외부화.

이렇게 다양한 방어기제들이 있는데

자신에게는 어떤 것이 강화되어 있는지 돌아보는 계기를 삼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을 필요성은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긍정적인 변화의 시작은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예민성을 인정하고 줄이려는 노력으로

저자가 조언하는 방법 중에 가장 설득력있는 내용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일상생활에서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는 다양한 갈등 상황을 줄이는 것!

갈등 상황이란 선택의 기로에 서는 경우나

갈등을 유발하는 사람과의 관계 모두를 말한다.

나아가 누군가를 만났을 때 에너지를 충전한 느낌이 드는지,

갖고 있던 나의 에너지가 소진된 느낌이 드는지

내 예민함의 근원을 확인하고 리셋하는 과정을 갖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예민한 사람들은 타인과의 관계설정이 특히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민한 사람들의 심리를 지배하는 근원을 이해하게 되면

외부의 자극에 휘둘리지 않고 나의 에너지를 잘 지킬 수 있다.

나아가 예민함을 나의 장점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노력하면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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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 왕자 - 내 안의 찬란한 빛, 내면아이를 만나다
정여울 지음 / CRETA(크레타)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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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속에 평생 자라지 않는 어린 아이.

상처로 인해 성장이 멈춰버린 자아.

위로받고 싶은 또 하나의 나.

내가 되찾아야 할 또 다른 나.


모두 inner child, 내면아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내면 아이를 만나는 일은 사람마다 그 반향이 다를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아픈 상처를 다시 꺼내 보는 일이어서 두렵기도 한 일이고,

또 다른 이에게는 치유와 극복의 에너지를 발견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내면아이를 만나는 일은 나의 그림자를 만나는 일과도 같아서

나를 지키기 위해 구축해 놓은 방어기제들을 걷어 내는 단계부터 난관이 될 수도 있다.

"누구나 제 안의 수많은 강박과 싸워 나간다."

내 안의 좋은 힘을 끌어 모으기 힘들게 쌓아 두었던 방어기제들이

강박이 되고 마침내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속하면

내 안의 내면아이는 점점 더 깊은 상처를 안게 되고

세상 밖으로 자유롭게 알을 깨고 나올 수 없다.

내면아이는 어른이 되면 성인자아가 된다.

어릴 때 보살핌 받지 못한 내면아이는 성인자아가 되어서도

평생 따라다니며 오롯한 나로 똑바로 서지 못한다.

내면아이의 존재를 인식하고 수용하며 성인자아와 다정한 수다를 나눌 때

내 안의 또 다른 나, 나만의 어린왕자를 찾을 수 있다.



정여울 에세이 <나의 어린 왕자> 에서는

내면아이 조이와 성인자아 루나의 솔직하고도 섬세한 대화를 통해

어둠을 뚫고 찬란한 빛이 되어 새로 태어나는

당신의 내면아이의 존재를 인식하게 한다.

어린왕자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가장 중요한 건 보이지 않는 거라고.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조이와 루나처럼

독자들도 자신의 내면아이와 이렇게 친구가 될 수 있다고 긍정하게 한다.



생텍쥐페리의 프랑스 소설, 어른을 위한 동화 <어린 왕자> 에서

보아뱀과 코끼리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어른들은 보이는 그대로 믿지만

자기 안에 어린왕자가 있는 사람들은 모자 속 코끼리를 볼 수 있다.

대상에 대한 기존의 고정관념이나 편견을 걷어내고

그 대상 너머를 볼 줄 안다.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고, 타인의 마음을 마음으로 볼 줄 아는 것이다.

모자 속 코끼리를 볼 수 있는 건 그래서 결코 개개인의 능력차에 머무르지 않는다.

어른이 되는 건 누구나 처음 겪는 일이고,

바쁜 세상에서 생존하다시피 살아내다 보니

자신의 내면아이를 돌볼 틈이 없었던 모든 성인자아가 해결해야 할 몫인 것이다.

어린 시절의 결핍과 잠재력, 순수한 시선을 간직하며

성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녹록지 않은 게 어른들의 세상인듯 싶다.

성인자아가 되면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어른 세상에서

무조건 앞으로만 나아가려는 관성을 거스르기가 참으로 어렵다.

낯설게 보고 되돌아 보고 다시 보는 습관을 통해

"자기 만의 방" 하나쯤 마음 한 켠에 남겨두자!!!



크레타 출판사의 신간 <나의 어린 왕자> 는

두 개의 서문과도 같은 머리말과 프롤로그,

10개의 챕터, 그리고 마지막은 작가와 편집자의 인터뷰로 책문을 닫는다.

10개의 챕터에서는 각각 조이와 루나의 대화가 이어지고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속 발췌문을 인용하며

정여울 작가가 독자에게 직접 질문을 던진다.

독자가 읽어내고 끝내는 소비의 패턴의 아니라

치유의 글쓰기까지 이끌어내는 구성이 인상적이다.

아주 쉽고 친근한 별명을 붙여주는 것부터

내면아이와 친구되기 프로젝트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속 장미를 통해

허영과 소유욕이 어린 왕자를 지치게 하는 걸 독자는 목도한 바 있다.

어떤 대상을 향해 집착하고 소유하려는 심리는

그 대상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

멋있어 보이고 싶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일텐데

어쩐 일인지 자꾸만 못된 마음이 싹트면서 본인도 걷잡을 수 없게 되어 버리곤 한다.

어른이 될수록 우리는 순수함 그대로 보지 못하고,

간편하고자 모든 것을 숫자로 재단해 버리기도 하고

너무 빨리 많은 것을 얻어내려는 욕심에 사로잡히곤 한다.

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어린왕자의 지혜".

빠르게 변화하는 이 세상을 살면서 정말 필요한 것은

회의적이고도 반성적인 태도에 근거하는

"판단중지" 의 시간을 잠시라도 가져보는 건 어떨까.



독자들의 소중한 내면아이를 되찾아주고 싶은

정여울 작가와 편집자의 인터뷰에서는

왜 우리가 내면아이와 대화해야 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부터 시작된다.

오랫동안 나 스스로 내 내면아이를 숨기고 억압해 왔던 관성을 직면하게 될 때

성인자아가 되어 품고 있는 슬픔도

서서히 보여줄 수 있는 편안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지점에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속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길들인다는 것" 에 대한 사유.

길들인다는 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고,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며

그에 따른 책임이 따른다는 것이고,

곧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이다.

즉, 내면아이와 성인자아는 서로를 길들임으로써

긍정의 관계를 맺고 나아가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길들인다는 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란다."

"관계를 맺는다?"

"그래." 여우가 말했다.

"넌 아직 나에게는 다른 수많은 어린이와 똑같은 사람에 불과해. 그러니 나에겐 네가 필요 없지.

물론 너에게도 내가 필요 없겠지.

네 입장에서는 내가 수많은 다른 여우들과

똑같은 여우에 불과할 테니까 말이야.

그러나 만일 네가 나를 길들이면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게 돼.

나에게는 네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고,

너에게는 내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될 거야."

여우는 이렇게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아, 이제 좀 알 것 같아."

어린 왕자가 말했다.



이제는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평가하기보다는

나만의 독특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봐요.

헷갈릴 때는 저의 내면아이에게 물어봐요.

나 오늘 괜찮니?

내가 이런 말을 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좋은 선택일까.

내면아이와 자주 대화를 나누면

내 안의 지혜로움과 순수함을

회복하는 느낌이 들어서 더욱 좋지요.

복잡하다 싶으면, 이것만 기억해 두세요.

내면아이와 친구가 되는 것은

최고의 베프를 내 안에 간직하는 일이라는 것!



인간의 외향성과 내향성 기질을 리트머스 시험지에 비유한 글을 통해

나의 내면아이가 머물러 있는 방에 살며시 노크를 시도해본다.

중립적이다가도 외부의 자극에 의해

외향적, 또는 내향적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것.

나라는 존재는 하나의 단어로 규정할 수 없고,

고정된 모습으로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내가 만든 틀에 나를 가둘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내가 구속하지 않는 한, 내 안의 내면아이도 나를 가끔은 찾아와줄 것이고

내 방식대로 세상의 편견에 저항하면서 살아간다면

진짜 나 자신으로 바로 설 수 있으리라 긍정해본다.

여행, 책, 그리고 예술이 내면아이와 성인자아를 치유해 주는

내 삶의 소중한 방식들임을 새삼 느끼는 계기도 되었다.

정여울 작가의 심리 에세이 <나의 어린 왕자> 가

평소에 갖던 나의 깨달음을 더 굳건하게 만들어 주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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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 - 미친 듯이 웃긴 북유럽 탐방기
마이클 부스 지음, 김경영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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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발칙한 빌 브라이슨이 있다면,

영국에는 까칠한 마이클 부스가 있다고 들었다.

빌 브라이슨도 영국 시민권을 취득한 이중국적자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이번에 만난 북유럽 탐방기의 저자도 그렇고

영국 특유의 위트와 유머가 뭔지 대략 감이 오기 시작하려고 한다.

마침 어제 교환하기로 했던 빌 브라이슨의 <언어의 탄생> 도 도착했는데

이야기가 더 산으로 가기 전에 빌 브라이슨은 여기까지만. ㅋㅋ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 은 저자의 아내가 덴마크인이라는 점도

어느 정도는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은 합리적 의심이 있다.

북유럽 장기 체험담을 통해 스칸디나비아 5개국 사람들의

단점만 파고들면서 뼈를 때리는 비판과 비난을 하기 보다는

그들을 바라보는 관점이 꽤나 호의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저자가 주목한 것은 북유럽에 직접 거주하면서 확인하고 싶은 그 호기심과 겹쳐 있지 않았을까!

전 세계적으로 증명되어온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라는 사회적인 지표와 달리

주관적인 경험에서 오는 괴리는 없었는지 말이다.

정말 북유럽 사람들은 모두 행복한가에 대한 의구심이

정말 세계 어느 누구도 없을까에 대해서 말이다.

북유럽 사람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바라보고 그들의 문화와 역사를 알아가면서

저자는 비로소 그들을 이해하고 정확히 파악해가는 듯 했다.

그 유쾌통쾌한 견문록을 통해서 나 또한 북유럽을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직접 만나보지는 못 했지만 혹시나 북유럽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는 태도를 취할 수 있을 것도 같다.

타인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일은 언제나 선(善)이 될 거라 믿는다.

<얀테의 법칙>

1. 당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2. 당신이 남들만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3. 당신이 남들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4. 당신이 남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지 마라.

5. 당신이 남들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 마라.

6. 당신이 남들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7. 당신이 모든 일을 잘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8. 남들을 비웃지 마라.

9. 누구도 당신에게 관심있을거라 생각하지 마라.

10. 당신이 남들에게 무엇이든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 중에서

이른바 <얀테의 법칙> 은 덴마크식 십계명이었지만

이제는 북유럽으로 확산되었다.

느긋하고 편안한 아늑함과 유쾌함을 지향하는 영어로는 cozy 를 의미하는 휘게 Hygge 역시

덴마크의 순응주의를 달리 부르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이런 마인드가 있기 때문에 경쟁과 사회적 평가의 부담으로부터

서로를 보호하는 문화가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되었나 보다.

북유럽 사람들, 즉 내부자들 사이에서는 또 외부자들의 인식과 달리

휘게를 향한 외부적 시선이 강압에 가깝다고 보는 경향도 있음을 짚기도 한다.

공동의 가치를 고수하려는 집착이 편협함으로 흘러들지 않게,

어떠한 격식에도 얽매이지 않기 위해 균형을 잡으려는 애씀도 엿보인다.




자본주의 구조에 의한 무한 경쟁으로 인해 피폐해지는 현실을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여유와 풍요를 상징하는 북유럽 문화를 지향하고픈 마음이

내면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 을 보여주면

분명 사회 구조적 차이가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개인의 노력으로 북유럽 사람들처럼 행복지수를 높이는 일은 쉽지 않겠지만

그들의 생활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나만의 해법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있다.


스칸디나비아 5개국의 지도를 보면

지정학적인 관점에서 국가가 이렇게 인접해 있다 보니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사회문화와 역사에 있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을 것도 같은데 신기하게 각 나라별 특징들이 선명하다.

섬나라 아이슬란드는 지도처럼 다른 네 개의 나라에 비해

북유럽스러움에서 동떨어진 특징들이 더러 있다.

상징적으로 1인당 책 구매량 1위라는 타이틀은

북유럽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도 매우 의외인 수치이다.

스웨덴은 오랜 역사로 인해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와는 달리

가장 현대적인 나라로 인정받으면서

공공의 적과도 같은 대상이 되어 분노와 질투를 유발하기도 한다.

행복지수가 높기로 늘 상위에 있는 덴마크

예상과 달리 세계에서 암 발병률과 알코올 소비량이 가장 높으며

평균 수명은 가장 낮다는 결과치를 보인다.

세계 최고의 교육제도를 자랑하는 핀란드

겸손과 절제가 몸에 배어 있고 단순한 방식으로 살아가는데도

항불안제, 불면증 치료제, 알코올 중독자들이 상당히 많은 나라이기도 하다.

'위협을 느끼지 않는 것' 이 노르웨이의 핵심가치 중 하나이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반이슬람 정서로 인한

인종차별적 편집증 환자들의 테러 공격이 끊이지 않고 점점 강화되는 추세다.

극동 아시아 일본과 중국, 한국을 서양에서 바라볼 때

다 비슷해 보여도 좀 더 내밀히 들여다 보면 제각각의 문명과 특징을 갖고 있지 않은가.

역시 나라별로 그들만의 국민성은 분명히 달랐다.

결국 북유럽 나라들이 이룬 성공의 상당 부분은

세 가지 요인 덕분이었다.

동질성, 평등주의, 사회적 결속.

아이슬란드는 이 모든 걸 충분히 갖추었으며,

어떤 부분은 북유럽 이웃 나라들보다 자질이 훨씬 많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 중에서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북유럽 사람들이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갈 내용이 없는 건 또 아니지.^^

북유럽 사람들이 누리는 안전감이 그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행복의 핵심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는 것"

"보호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것"

사회복지와 교육제도를 통해 개개인을 위한 사회 안전망이 구축되어 있고

휘게(hygge)와 라곰(lagom) 가치관을 통한 삶의 여유와 느긋함은

언제나 부러운 지점이다.

삶의 자율성..... 지나치게 애쓰지 않아도 되고

예측불가능한 일에 대해서 걱정하며 살지 않아도 되는 삶.

자산이 풍족하다고 행복한 게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알지만

타인의 욕망을 내 것이라 착각하며 명확하게 분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북유럽스러운 풍요로움이나 평등주의와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

현재 자본주의가 주류가 된 세상을 살아가는 지구인들의 숙제이다.

소유에 몰두하지 않고 정신적인 풍요로움과 느긋함을 잊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늘 고민이다.

내가 사는 세상과 주변 사람들을 향해 눈을 감고 살 수도 없는 일이다.

결국은 '나' 라는 우주를 내가 주도해서 구축해 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북유럽 사람들로부터 배울 점이 있다는 저자의 말이

시사하는 바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고맥락 high context' 문화권 사람들은 같은 종류의 기대와

경험, 배경, 심지어 유전자까지 공유한다.

그들에게는 언어적 의사소통이 덜 중요한데,

서로는 물론 자신도 흔히 겪는 상황을

이미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고맥락 문화에서 말은 더 큰 의미를 지니지만 덜 필요하다.

한편 수백 개의 국적, 인종, 종교가 섞여 있는

런던 같은 저맥락 문화에서는 언어적 의사소통으로

서로를 이해시키는 과정이 더 많이 필요하다.

공통점이 더 적으며, 무언의 추정이 더 적게 이루어지고,

메워야 할 차이도 더 많다.

각자 정도는 다르지만 모든 북유럽 나라가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모두 비교적 단일하며, 따라서 고맥락 문화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 중에서

소통에 있어서 주변의 환경과 상황을 얼마나 고려하느냐에 따라

저맥락과 고맥락 사회로 구분하는 문화학 계통의 개념어를 접하게 되었다.

과묵한 핀란드 사람들의 특징을 대표로 해서 북유럽 사람들이

고맥락 문화권에 속한다는 걸 이해해볼 수 있었다.

즉 고맥락의 문화에서 언어적 소통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우선적이고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북유럽 사람들은 소통에 사용된 단어 자체의 의미보다는

왜 저 사람이 저런 말을 했는지에 대한 상황이나 의도, 표정과 행동에

더 집중하는 방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가만히 보니 한국 사람들이 소통하는 방식도

고맥락 문화권 사람들의 그것과 비슷해 보인다.

밥 한 번 같이 먹자는 이야기를 하는 한국 사람들은

인사치레이거나 그 의도가 친해지고 싶다는 뜻을 내포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저맥락 문화권 사람들로서는 말과 행동이 다르다고 볼 수 있어서

모호하고 무책임한 말로 들리고 해독 과정이 들어가야 해서 피곤해질 수도 있겠다 싶다.

(충청도 말이 매우 고맥락의 언어가 아닐지....^^;

의도를 파악하기가 참으로 난해한 언어이다. ㅎㅎ)

한국도 전반적으로 고맥락 문화권에 속한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보면 소통 방식은 또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

TMI지만 나는 상대방에게 오해의 소지가 있는 소통 방식을 싫어하기 때문에

돌려 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는 편이다.

밥 한 번 먹자는 말을 했다는 건 진짜 그러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것이어서

일정 기간이 지나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면 못내 찜찜하다.

내가 한 말에 책임지지 않기 위해서

농담이라는 한 마디 던져서 공기 중에 이미 뿌려진 '그 말'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하는 일은 그래서 내게는 참으로 불편한 일이다.

정확히 알아야 할 것은 어떤 방식이 더 좋고 나쁜지를 분간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대화 안에서 고맥락과 저맥락을 스스로 파악할 수 있다면 좋고

그 분석이 끝났다면 내 앞에 있는 사람에 맞게 소통의 기술을 적용하면 될 일이다.^^

관계는 곧 인간에 대한 탐구를 바탕으로 하는 것임을 생각해 본다.


내가 발견한 유럽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의 차이는

'어떤 시점에 삶의 방점이 찍혀 있느냐' 였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사는 사람들과

장미빛 미래의 나를 꿈꾸며 현재의 나를 희생하는 사람들.

과연 어떤 삶이 더 만족도가 높을까.

미래의 행복도를 현재에 알 수 있다면 그건 인간이 아니라 신이다.

우리는 인간일 뿐이기에

이렇게 단순화해서 생각해 봐도

북유럽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당연히 높을 수밖에 없다.

행복지수는 현재를 살아가는 개개인이 평가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수치이니까.

'그냥 하루를 견딘다' 는 마음도 나쁘지 않은 거 같다.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라기 보다는

주어진 나의 오늘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안전하게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여기는 마음.

'그냥 하루를 견딘다' 는 말을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각자의 삶은 각자의 해석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또 달라진다.

금욕적이고 실용적인 사람들.

따분하고 너무 과묵해서 재미없는 사람들.

집단주의적이어서 시민 합의에 집착하는 사람들.

파티에 진심이고 매우 사교적인 술꾼들.

규범과 절차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

단일한 문화여서 세계관과 목표가 비슷한 사람들.

나라별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지배와 피지배의 역사가 존재하기 때문에

각자의 입장에 따라 그들을 설명할 수 있는 표현들도 다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은

북유럽 사람들은 바이킹의 후예라는 유전적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 공용어로 통하는 영어에 바이킹족이 남긴 흔적도 작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 문화가 현재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스칸디나비아의 원형은 앞으로도 쭉

그들의 일상적인 삶 속에 스며들어 북유럽스러움을 지속해 나갈 것이다.

삶의 방식과 우선 순위, 돈을 쓰는 방법과 삶과 일의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는 모습,

효과적인 교육 제도와 서로를 돕는 방식,

그리고 최종적으로 행복해지는 방법까지 닮아 있는 북유럽 사람들.

세계적으로 공인된 행복에 대한 지표에도 불구하고

그들 또한 인종차별과 이슬람 공포증, 약화되어가는 사회적 평등, 알코올중독,

이민자 수용에 관한 불편한 진실,

혜택을 누려본 적 없는 이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공공 부문에 관한 문제들이 점점 부정적으로 강화되어 가기도 한다.

저자가 오랜 시간 북유럽에 있으면서

덴마크 시골에 있는 집에서 노르웨이 북쪽 극지방의 차디찬 바다,

아이슬란드의 간헐천, 악명 높은 스웨덴 주택단지의 암흑가,

산타가 사는 작은 동굴과 레고랜드,

덴마크 코펜하겐의 동쪽 해안과 서쪽 지역까지 경험한 북유럽스러움을

농담과 진지함을 오가며 전하고 있다.

북유럽의 행복 현상, 북유럽의 기적을 깊이 파고들면서도 유쾌통쾌한 어조가 좋았다.

개인적으로 유익하게 다가온 부분은

'북유럽'이라는 단어 하나로 대강 뭉쳐서 규정해 버렸던 인식과 이미지가

저자 덕분에 국가별, 개개인별 개성으로 섬세하게 분리되는 경험이었다.

이렇게도 북유럽을 여행할 수 있구나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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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지지 않는, 기억 - 일본인 PD가 본 위안부 문제
나카지마 가제 지음, 최세경 감수 / 3월의나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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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해방전후사는 늘 나의 관심사이다.

시간은 인간이 치유될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지워지지 않는, 기억> 을 출간하는 과정에서도

벌써 4분의 위안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저자 나카지마 가제는 일본 민영방송국 TBS의 보도 프로그램 PD이다.

15년간 한국을 취재하면서 섭렵한 기록들중에서도

위안부 문제 한일관계에 집중하여 직접 한국어로 쓴 책이다.


위안부 문제의 본질은 성폭력 피해라는 보편적인 인권, 여성의 인권 문제인데

책임을 저야할 당사자인 일본 정부는 이를 정치적으로 접근하여

가해 책임을 왜소화하거나 심지어는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문제의 핵심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도 여전히

한일간 입장과 해석이 첨예하게 대립하며 평행선을 걷고 있다.

그러나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일본인 PD의 균형잡힌 시각을 통해 일본이 강제동원이나 성노예 명칭의 삭제에 집착하며

피해자들의 삶과 기억을 지우려는 매우 부적절한 움직임에 대해서는

그 어떤 국가들도 지지하고 있지는 않은 듯 하다.

점점 국제사회에서 인권 문제에 있어서 고립되어 가고 있으면서도

책임회피에 대한 의지는 여전히 강고하며

문제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과 주장은 참 변함이 없다.

위안부 문제를 '피해자 중심' 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나 전향적 태도를

역대 일본 총리 그 누구에게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10대 소녀가 가족에게 보탬이 되겠다고 돈을 벌 수 있다는

낯선 이의 꼬임에 넘어가 의심없이 믿고 따라간 결과가

자기 의사로 간 매춘부였다는 모함으로 둔갑하게 된다면,

게다가 신체적으로도 성적 학대와 폭력을 홀로 감당해야 한다면

지금 이 시대를 사는 그 누가 침묵할 수 있을까!!!

그 어린 소녀가 자신의 딸이라고 한 번만 가정해 본다면

이렇게 끈질기게 인권 침해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제국주의 국가로서의 영광을 여전히 꿈꾸고 있는 듯한 현재 일본의 윗세대들은

고유한 존재로서 살아가는 개개인의 존엄성을 들여다보고 각성하길 바랄 뿐이다.

진실을 은폐하고 호도해온 역사가 적지 않아

그 시스템에 길들여져 있는 것은 아닌지 가엾기까지 하다.

동시에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말씀하듯이,

일본인 개개인의 응원과 방문은 언제나 감사한 일이라고 하셨다.

일본 정부의 공식적이고도 진심어린 사과와 반성을 촉구하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혹여 윗 세대들이 듣지 못한다면

현재 일본의 젊은 세대들이라도 귀기울여주길 바랄 뿐이라는 저자의 호소가 고맙기까지 했다.

일본 내에서 언론인으로서 객관적이고도 균형잡힌 시각과 목소리를 내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음에도 국제 약속과 국민 정서 양쪽 모두를 짚어준

나카지마 가제 PD의 기록은

영원토록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기억하게 해줄 것이다.





2015년 시점에서 한국 정부가 인정한 위안부는 238명.

그 중 생존자는 47명이었고 2022년 현재는 11명뿐인 절박한 상황이다.

대한민국 곳곳에서 "진실은 기억으로, 정의는 연대로" 를 외치며

조직적으로 행동하고 있지만

여전히 이 간절한 목소리의 울림은 미미한가보다.

가해자 측의 강제 연행이나 증언을 직접 증명하는 공적 문서가 나오지 않고 있을 뿐,

피해자 측의 증언과 기록들은 수도 없이 많음에도

강제연행을 확인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위안부 문제를 회피하는 일본.

오히려 돈으로써 이 모든 문제를 퉁치려는 행위가

더더욱 인간적인 모욕으로 다가와 상처가 가시기는 커녕 덧나고 있는 상황이다.

2015년 '불가역적' 인 한일합의 후 2016년 화해*치유재단 설립에 이어

정부가 바뀌고 2018년 해산에 이르기까지

국가간 대화 속에 "피해자 중심주의 원칙" 은 온데간데 없다.

당시 한국 정부측은 한일합의 결정에 대한 평가는 일단 차치하고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초대하자는 제안에 대해 일본 정부는 거부했다는 사실을

<지워지지 않는, 기억> 을 통해 처음 접했다.

시간이 갈수록 자연스럽게 위안부 생존자들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그렇게 역사에서 피해자들의 존재를 말살하려는 일본의 꼼수가 엿보여

분하고 참담하기 그지없다.

2015년 당시 한일간 외교부 장관이 한일합의를 하면서

사과의 의미로 일본은 한국에게 10억엔이라는 자금을 출자했다.

당시 46명의 생존자 중에서 34명이 1억원씩 받았고,

유가족에게는 2천만원씩 지급되었다.

혹자는 돈을 받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와 그 유가족들에게

억울하거나 자존심 상하지 않냐고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피해자들의 신발을 신고 하루만 살아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위안소에서 매일 20명의 건장한 군인들을 받으며 강간을 당했던 피해자는

고향에 돌아와서도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한없이 괴로웠을 것이 뻔하다.

위안부였던걸 공표할 수도 없는 성차별적 국가의 현실 속에서

먹고 살기가 상상할수도 없이 힘들었을 것을 생각하면

일본이 받은 그 돈을 받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해서는 안 된다.

이해하고 보듬어주며 옆에 서서 한 목소리를 내줘야 한다!

개개인의 동정이나 연민이 무슨 도움이 되겠냐고 말한다면

물론 이것만으로는 어떤 해결책도 볼 수 없을 거란걸 안다.

국가간의 공식적인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물론 힘쓰는 일도 계속하면서 동시에

하루하루를 고통스런 기억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곁에 있어줄 사람들이

그래도 조금씩은 늘어났으면 하는 바램이다.

나는 이렇게 그들의 목소리를 글로 남긴 사람들의 책을 읽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중이고.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들이 더 많이 담겨 있지만

당시 강간의 가해자 집단에 속해 있는 병사의 증언은

비교할수도 없게 노골적이고도 참혹하게 다가왔다.

이 말은 피해자들이 아니라 당시 병사였던 일본의 만화가가 남긴 것이다.

"위안소는 지옥이었다."

이런 지옥은 1930년대에 중국에 처음 위안소라는 이름으로 설치되기 시작해서

1941년 태평양전쟁이 시작되고 일본의 점령지마다 위안소를 설치하기에 이른다.

당시 일본의 식민지에서 여성들을 강제동원한 역사는 비단 한국만은 아니다.

일본은 주로 직업여성들이 돈을 벌기 위해 간 것이었다 하고

그 외의 국가들에서 온 피해자들과 대우부터 달랐다고 전한다.

중국,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등 7개 지역에 걸쳐

자기 의사로 간 매춘부 취급 받으며 속아서 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대만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만난 저자의 이야기 속에도

한국의 피해자들이 바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진심어린 사죄를 받아 깊은 상처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상처는 절대로 스스로 치유할 수 없는 일이다.

분명히 책임져야 할 대상이 있고 그들이 이 매듭을 풀어야 한다.

정치는 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에서 빛을 발한다.

정치가 휴머니즘을 상실할 때 변질되는 것이다.


왜곡되어져서 앞이 똑바로 보이지 않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과거의 무거운 역사를 떠안고 살아가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가혹하고 지옥같았던 시간과 해방 후에도 겪었을 차별과 편견의 나날들을

상상하는 것조차 버거운 일이었다.

일본인 PD의 취재를 통해 일본의 시각을 접할 수 있어서 유의미한 시간이기도 했다.

피해 당사자들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이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다음 세대에 진실을 전하는 것이다.

위안부 추모비나 소녀상의 참된 의미는

시위가 아니라 바로 이 메시지인 것이다.

진실이 기억되고 전해지는 것이 두려워 가해자들은

그 상징물을 끊임없이 박해하고 없애고자 시도하는 것이다.


국가의 지배욕이 나약한 개인을 파멸시키는 이 아픈 역사를 보면서

온전히 다음 세대에 전달될 수 있도록,

지워지지 않도록 기록해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소명과도 같다.

누구나 선택권 없이 세상에 던져지고,

살아가야 하고, 때로는 힘겹게 살아내야 하겠지만

누구의 삶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개인의 잘못이 아니기에 사회가 힘을 보태줘야 한다.

인류애는 여전히 우리 주변에 살아있다고 믿는다.

현재 진행형의 위안부 문제를 균형잡힌 시각으로 접할 수 있어

주변에 강추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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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리치의 일본 미학 - 경계인이 바라본 반세기
도널드 리치 지음, 박경환.윤영수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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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매우 공교로운 만남이다.

일본에 대한 사적인 흥미가 거의 없는 마당에

<도널드 리치의 일본 미학> 을 만나게 된 것에 대해서.

다양한 장르의 책을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으로

꾸준히 탐독을 하고 있지만 그 안에 사실 일본발 책이 설 자리는 없었다.

물론 이 에세이는 미국인이라는 이방인이 반세기동안 바라본

일본 문화의 단면들을 모은 책이지만

그래도 일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큰 기대 없이 책을 펼쳐 읽어 가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에 담긴 문구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일본을 이해하는데 고전과도 같은 <국화와 칼> 보다도

<도널드 리치의 일본 미학> 을 읽고 나면 더 일본에 대한 흥미로운 시각을 갖게 될 것이라고.

글항아리 서포터즈 2기로서 받은 책인데

자신있게 소개한다고 하더니 정말 그렇네.^^

별다른 기대감이 없던 내게 이웃나라 일본에 대해서 알려고 들지 않았던

나의 반지성주의적 태도에 반전을 가져다준

의미있는 일본 문화 에세이가 되었다.

 

도널드 리치가 20대 초반인 1947년에 연합군 사령부 군무원 소속으로

일본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경계인으로서의 인연은 시작된다.

중간에 미국에서 일이 생겨 가 있던 몇 년을 제외하고는

거의 60년간 일본에서 살면서 환대받고 또 배제되었던

이방인으로 살다가 88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도널드 리치의 일본 미학> 은 1960년대부터 50여 년에 걸쳐

다양한 일본 문화에 대해 도널드 리치의 관점으로 쓴 글을 시대순으로 19편 추렸고,

마지막 20번째 글은 "일본 미학 소고" 전체를 완역한 것이다.

 

도널드 리치의 일본 문화에 대한 시각의 바탕에는

그의 고향 미국 오하이오주의 작은 도시 리마가 깔려 있다.

답답하고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청년에게

일본이라는 섬나라는 상당히 이질적인 문화로 다가왔으며 해방감마저 느끼게 했다.

외국인이어서 예외 취급을 받는 일이 초반에는 일본 내 엄격한 규칙에 대한 유연함과

서양인에 대한 경외감이라고 생각했지만 도널드 리치는 살면서 깨닫게 된다.

경계가 분명한 일본인들이 사실은 이방인을 배제하는 것이고

같은 영역에 끼워주지 않는 것임을.

그렇게 저자는 일본 문화 속 그들만의 '패턴' 을 발견하고 익숙해지기에 이른다.

그가 찾아낸 패턴을 '일본 미학' 이라는 우아한 이름으로

특히 영화 평론가로서의 입지를 다져나간다.

<도널드 리치의 일본 미학> 속에는 일본 영화에 대한 이방인의 시각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근대 이전과 이후의 일본, 일본의 근간을 이루는 전통,

내용만큼이나 형식을 중요시하는 일본의 형태, 표지판과 문자,

일본의 패션과 이미지 산업, 일본의 성과 자동차 문화,

영화 속 일본 여성과 열차, 그리고 파친코에 대하여.

관능적 쾌락을 추구하면서도 우아함과 과도한 격식에서 자유롭지 않은 일본의

복잡다단한 문화들을 담았는데 그것이 일본 내부자가 아닌

미국 이방인의 시각이라는 것이 흥미로운 것이다.

일본과 서양의 관점 차이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는데

저자의 논조가 균형감을 잃지 않은 채 끝까지 힘있게 이어진다.

가령, 드러난 현실이 전부라고 보는 일본과

숨겨진 현실이 존재한다는 서양 영화에서의 차이도 그렇고

사회적 수치심에 더 민감한 일본과

개인적 죄책감이 더 고통스러운 서양인들의 특징도 그렇고.

특히 외국어가 새겨진 옷을 입는 행위에 있어서는

유행을 선도하며 진보적이라는 과시에 대한 욕망이 일본에 깔려 있다면

미국의 패션에서는 문자에도 역설적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는

해석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이 부분은 한국 역시 일본과 비슷한 행동양식을 취하는 것도 같고.

10세기 작품 <겐지 이야기> 는 몇 년 전 어떤 강좌에서

일본 문화의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며 소개받은 적이 있어 기억이 난다.

일본 미학의 바탕에 깔려 있는 단순함, 세련됨, 우아함, 절제됨, 품위,

풍류, 예술적 안목들이 이 작품 안에 녹아 있고

그래서 일본은 여전히 이 작품을 의미있게 여긴다.

미국의 이방인에게서 일본 문화의 가치를 지닌 작품 소개를 접하는 일이

어찌 보면 참 신기한데 희한하게 쉽게 이해가 된다.

이방인과 이방인은 통하는 것인가.^^

애플TV의 8부작 드라마 <파친코> 의 흥행은 이미 세계적인 것이 되었다.

국내에 개정판 파친코 1권과 2권 출간에 대한 관심과 열기도 뜨겁다.

드라마 팬들이 흥미로워 할만한 작품 분석에 대한 글은 아니지만

드라마를 보지 않은 나도 재밌게 읽은 내용은 1980년과 1986년에 쓰여진 에세이이다.

당시 파친코를 찾는 사람들의 진정한 목적을

도널드 리치의 시각으로 분석한 지점에 설득력이 있다.

전쟁후 생겨난 이 게임은 패전의 폐허가 복구되기도 전에 생겨난 것이었다.

당시 일본은 저렴한 가격에 유흥을 즐길 수 있다고 홍보했고

낙이라고는 없던 때에 단순한 즐거움을 추구할 수 있는 좋은 매개체였다.

정서적 확신이 없던 시기에 파친코가 일본인들에게는

제국에 대한 상실감을 대체해주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저 술집에 가는 것처럼 중독성을 구하러,

잠시 고통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걱정없이 무언가에 몰두하는 쾌락을 위해 파친코에 가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망각의 효용성을 여실히 보여준 파친코는

삶으로부터 자기를 소멸시키는 임시 처방이라는 한계를 드러낸다.

드라마 속 파친코도 혹시 이러한 상징성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도널드 리치의 파친코에 대한 해석을 접하고 보니

드라마가 갑자기 너무나 보고 싶어진다.^^

도널드 리치는 이 일본 문화 에세이 곳곳에

자연의 패턴에 집중하고 자연을 손을 대고 꾸미는

일본의 특징에 주목하기도 한다.

그 경향은 일곱번 째 에세이 일본의 정원에 관한 글에 진하게 녹아 있다.

 

 

정원은 야생 상태의 있는 그대로가 아니다.

야생을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은 낭만주의자들뿐인데,

일본인들은 낭만주의자가 되기에는 너무 실용적인 사람들이다.

또한 정원은 기하학적인 추상화도 아니다.

그런 것은 고전주의자들이나 매력을 느낄 만한 것으로,

일본인들은 이성적인 고전주의자가 되기에는

너무도 감정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정원은 자연을 재창조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란 원래 존재하지 않는다.

 

뛰어난 통찰력으로 일본을 관찰했던 이른바 일본학자들이 많지만

그 누구보다 일본에서 거주한 경계인으로서

일본의 겉과 속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도널드 리치가 아닌가 싶다.

서양과는 다분히 차이점을 드러내는 일본의 사회 문화적 기질, 기준, 심리에

역사와 사회적 맥락을 끌어와 풀어놓은 글들이 어렵지 않았고

심지어 가독성도 좋았다.

동양인이라는 접점이 엿보이기도 했고

한편 저마다의 문화권이 존재하는 것에서 오는

그들만의 이해체계도 접할 수 있었다.

다름을 인식하고 존중하려는 마음은 알고자 하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일본인들의 사고방식과 태도를 어떤 하나의 기준에 의해 좋고 나쁘다고 말할 수 없는 일이다.

도널드 리치가 바라본 솔직담백한 일본인들의 이야기 속에는 깊은 관심과 이해가 담겨 있다.

자신의 인생 절반 이상을 일본에서 보낸 미국인이 쓴

<도널드 리치의 일본 미학>.

일본인보다 더 일본을 잘 알고 느끼는 이방인의 시선에

내가 왜 더 흐뭇해지는지 모르겠다.

나에 대해 이다지도 깊고 내밀하게 알고 있는 사람에게

그 누가 애정이 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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