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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리치의 일본 미학 - 경계인이 바라본 반세기
도널드 리치 지음, 박경환.윤영수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8월
평점 :

내게는 매우 공교로운 만남이다.
일본에 대한 사적인 흥미가 거의 없는 마당에
<도널드 리치의 일본 미학> 을 만나게 된 것에 대해서.
다양한 장르의 책을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으로
꾸준히 탐독을 하고 있지만 그 안에 사실 일본발 책이 설 자리는 없었다.
물론 이 에세이는 미국인이라는 이방인이 반세기동안 바라본
일본 문화의 단면들을 모은 책이지만
그래도 일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큰 기대 없이 책을 펼쳐 읽어 가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에 담긴 문구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일본을 이해하는데 고전과도 같은 <국화와 칼> 보다도
<도널드 리치의 일본 미학> 을 읽고 나면 더 일본에 대한 흥미로운 시각을 갖게 될 것이라고.
글항아리 서포터즈 2기로서 받은 책인데
자신있게 소개한다고 하더니 정말 그렇네.^^
별다른 기대감이 없던 내게 이웃나라 일본에 대해서 알려고 들지 않았던
나의 반지성주의적 태도에 반전을 가져다준
의미있는 일본 문화 에세이가 되었다.
도널드 리치가 20대 초반인 1947년에 연합군 사령부 군무원 소속으로
일본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경계인으로서의 인연은 시작된다.
중간에 미국에서 일이 생겨 가 있던 몇 년을 제외하고는
거의 60년간 일본에서 살면서 환대받고 또 배제되었던
이방인으로 살다가 88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도널드 리치의 일본 미학> 은 1960년대부터 50여 년에 걸쳐
다양한 일본 문화에 대해 도널드 리치의 관점으로 쓴 글을 시대순으로 19편 추렸고,
마지막 20번째 글은 "일본 미학 소고" 전체를 완역한 것이다.
도널드 리치의 일본 문화에 대한 시각의 바탕에는
그의 고향 미국 오하이오주의 작은 도시 리마가 깔려 있다.
답답하고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청년에게
일본이라는 섬나라는 상당히 이질적인 문화로 다가왔으며 해방감마저 느끼게 했다.
외국인이어서 예외 취급을 받는 일이 초반에는 일본 내 엄격한 규칙에 대한 유연함과
서양인에 대한 경외감이라고 생각했지만 도널드 리치는 살면서 깨닫게 된다.
경계가 분명한 일본인들이 사실은 이방인을 배제하는 것이고
같은 영역에 끼워주지 않는 것임을.
그렇게 저자는 일본 문화 속 그들만의 '패턴' 을 발견하고 익숙해지기에 이른다.
그가 찾아낸 패턴을 '일본 미학' 이라는 우아한 이름으로
특히 영화 평론가로서의 입지를 다져나간다.
<도널드 리치의 일본 미학> 속에는 일본 영화에 대한 이방인의 시각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근대 이전과 이후의 일본, 일본의 근간을 이루는 전통,
내용만큼이나 형식을 중요시하는 일본의 형태, 표지판과 문자,
일본의 패션과 이미지 산업, 일본의 성과 자동차 문화,
영화 속 일본 여성과 열차, 그리고 파친코에 대하여.
관능적 쾌락을 추구하면서도 우아함과 과도한 격식에서 자유롭지 않은 일본의
복잡다단한 문화들을 담았는데 그것이 일본 내부자가 아닌
미국 이방인의 시각이라는 것이 흥미로운 것이다.
일본과 서양의 관점 차이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는데
저자의 논조가 균형감을 잃지 않은 채 끝까지 힘있게 이어진다.
가령, 드러난 현실이 전부라고 보는 일본과
숨겨진 현실이 존재한다는 서양 영화에서의 차이도 그렇고
사회적 수치심에 더 민감한 일본과
개인적 죄책감이 더 고통스러운 서양인들의 특징도 그렇고.
특히 외국어가 새겨진 옷을 입는 행위에 있어서는
유행을 선도하며 진보적이라는 과시에 대한 욕망이 일본에 깔려 있다면
미국의 패션에서는 문자에도 역설적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는
해석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이 부분은 한국 역시 일본과 비슷한 행동양식을 취하는 것도 같고.
10세기 작품 <겐지 이야기> 는 몇 년 전 어떤 강좌에서
일본 문화의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며 소개받은 적이 있어 기억이 난다.
일본 미학의 바탕에 깔려 있는 단순함, 세련됨, 우아함, 절제됨, 품위,
풍류, 예술적 안목들이 이 작품 안에 녹아 있고
그래서 일본은 여전히 이 작품을 의미있게 여긴다.
미국의 이방인에게서 일본 문화의 가치를 지닌 작품 소개를 접하는 일이
어찌 보면 참 신기한데 희한하게 쉽게 이해가 된다.
이방인과 이방인은 통하는 것인가.^^
애플TV의 8부작 드라마 <파친코> 의 흥행은 이미 세계적인 것이 되었다.
국내에 개정판 파친코 1권과 2권 출간에 대한 관심과 열기도 뜨겁다.
드라마 팬들이 흥미로워 할만한 작품 분석에 대한 글은 아니지만
드라마를 보지 않은 나도 재밌게 읽은 내용은 1980년과 1986년에 쓰여진 에세이이다.
당시 파친코를 찾는 사람들의 진정한 목적을
도널드 리치의 시각으로 분석한 지점에 설득력이 있다.
전쟁후 생겨난 이 게임은 패전의 폐허가 복구되기도 전에 생겨난 것이었다.
당시 일본은 저렴한 가격에 유흥을 즐길 수 있다고 홍보했고
낙이라고는 없던 때에 단순한 즐거움을 추구할 수 있는 좋은 매개체였다.
정서적 확신이 없던 시기에 파친코가 일본인들에게는
제국에 대한 상실감을 대체해주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저 술집에 가는 것처럼 중독성을 구하러,
잠시 고통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걱정없이 무언가에 몰두하는 쾌락을 위해 파친코에 가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망각의 효용성을 여실히 보여준 파친코는
삶으로부터 자기를 소멸시키는 임시 처방이라는 한계를 드러낸다.
드라마 속 파친코도 혹시 이러한 상징성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도널드 리치의 파친코에 대한 해석을 접하고 보니
드라마가 갑자기 너무나 보고 싶어진다.^^
도널드 리치는 이 일본 문화 에세이 곳곳에
자연의 패턴에 집중하고 자연을 손을 대고 꾸미는
일본의 특징에 주목하기도 한다.
그 경향은 일곱번 째 에세이 일본의 정원에 관한 글에 진하게 녹아 있다.
정원은 야생 상태의 있는 그대로가 아니다.
야생을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은 낭만주의자들뿐인데,
일본인들은 낭만주의자가 되기에는 너무 실용적인 사람들이다.
또한 정원은 기하학적인 추상화도 아니다.
그런 것은 고전주의자들이나 매력을 느낄 만한 것으로,
일본인들은 이성적인 고전주의자가 되기에는
너무도 감정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정원은 자연을 재창조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란 원래 존재하지 않는다.
뛰어난 통찰력으로 일본을 관찰했던 이른바 일본학자들이 많지만
그 누구보다 일본에서 거주한 경계인으로서
일본의 겉과 속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도널드 리치가 아닌가 싶다.
서양과는 다분히 차이점을 드러내는 일본의 사회 문화적 기질, 기준, 심리에
역사와 사회적 맥락을 끌어와 풀어놓은 글들이 어렵지 않았고
심지어 가독성도 좋았다.
동양인이라는 접점이 엿보이기도 했고
한편 저마다의 문화권이 존재하는 것에서 오는
그들만의 이해체계도 접할 수 있었다.
다름을 인식하고 존중하려는 마음은 알고자 하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일본인들의 사고방식과 태도를 어떤 하나의 기준에 의해 좋고 나쁘다고 말할 수 없는 일이다.
도널드 리치가 바라본 솔직담백한 일본인들의 이야기 속에는 깊은 관심과 이해가 담겨 있다.
자신의 인생 절반 이상을 일본에서 보낸 미국인이 쓴
<도널드 리치의 일본 미학>.
일본인보다 더 일본을 잘 알고 느끼는 이방인의 시선에
내가 왜 더 흐뭇해지는지 모르겠다.
나에 대해 이다지도 깊고 내밀하게 알고 있는 사람에게
그 누가 애정이 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