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순수한 시대를 위한 한바탕 반항의 흔적 『호밀밭의 파수꾼』

​대학 처음 발을 딛고 비트를 봤다. 정우성의 멋진 눈빛은 둘째치고, 오토바이 위에서 정우성이 두 눈을 감고 양팔을 벌리고 질주하던 모습에 한동안 먹먹했다. 그 시기의 불안과 방황, 무엇인가 주변인이 된 것 같은 내 모습이 영화에 깊게 덧칠해져였을 것이다. 속도감이 최고조로 다다르지만 결국 잡을 수 없는 그 무엇. 그 무엇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외롭다고. 아프다고. 그때 그렇게 느꼈다. 그래서 그 영화를 반복해 보며 위안을 얻었다. 시간은 상황을 해결해준다. 시간이 흐르니, 상황이 변했고 생각이 변했으며 현실을 받아들였다. 어른이 된 나는 그 반항의 시간의 흔적을 붙잡지 않았다. ​

 

아마 그때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었으면 어떠했을까. 비트 영화는 이 작품의 대체되지 않았을까. 지금에서야 읽어버린 나는 '홀든 콜필드'의 반항을 따라가고는 있지만 동화되지 못한다. 그 반항을 존중하지만, 어른들의 거짓과 속물스러움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나는, 홀든 콜필드를 그저 바라보았다. 순수함이 없어진 지금의 나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라 한다면 힘든 일이라고 난색을 표할 수밖에 없다.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런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이야.(p230)

하지만 내 머릿속에서 왜 홀든의 마지막 장면이 남아있는 것일까. 순수함이 없어져 버렸다고 애써 말하지만 그 순수함을 갈망하는 것일까. 변해버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누군가의 만남과 헤어짐을 쉽게 받아들이는 지금의 나를 속으로는 거짓과 위선으로 만들어진 사람으로 여겨버리기 때문일까.    

​갑자기 비가 엄청나게 퍼붓기 시작했다. 누가 하늘에서 물통으로 물을 붓기라도 하는 듯이. 아이들의 부모들은 전부 비를 피하기 위해 회전 목마의 지붕 밑으로 뛰어 들어갔다. 한참 동안 난 그냥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완전히 젖어버리고 말았다. 특히 목 근처와 팬티가 많이 젖었다. 그나마 사냥 모자가 도움이 되긴 했지만, 흠뻑 젖는 건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피비가 목마를 타고 돌아가고 있는 걸 보며, 불현듯 난 행복함을 느꼈으므로. 너무 행복해서 큰소리를 마구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피비가 파란 코트를 입고 회전목마 위에서 빙글빙글 도는 모습이 너무 예뻐 보였다. 정말이다. 누구한테라도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p278)

<호밀밭의 파수꾼>을 지금에서야 읽어버린 나는, 나이가 너무 들어서 홀든의 일련의 과정을 치기로 치부하면서도 한편으로 또 다른 생각이 드는 건, 순수한 그 무엇에 대한 갈망이 여전히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만약 그때, 홀든의 나이였을 때 이 책을 읽었다면 좋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더욱 드는 건, 적어도 내가 힘이 들고 사회의 거짓과 가식에 절망했을 때 홀든이 친구가 되었을 터라는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은둔의 작가로 유명한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매카시 열풍이 불던 그 1960년대 미국의 일방통행식의 사고, 번영과 호황을 누리지만 그  이면의 성찰이 부족했던 사회, 그리고 존 레넌의 암살범 마크 채프먼이 암살 직전까지 손에 들고 있었다는 이야기까지. 이 책은 많은 비하인드스토리​가 가득 차있다. 문학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간과한 채 읽어버리면 텍스트의 구조를 분석하고 서정적인 관념으로만 빠질 수 있다. 특히 이 책도 그럴 수도 있다. 이 책이 지루하다는 사람들! 그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고 책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시라. '홀든 콜필드'라는 그 시대의 질풍노도의 젊은이를 만날 수 있으리라.

 

 

"내가 그 애가 죽던 날 밤 차고로 숨어들어, 유리창을 전부 주먹으로 깨부쉈으니까.(p58)

"그렇지만 이 박물관에서 가장 좋은 건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제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누구도 자기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10만 번을 보더라도 에스키모는 여전히 물고기 두 마를 낚은 채 계속 낚시를 하고 있을 것이고, 새는 여전히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을 것이다... (중략)...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유일하게 달라지는 게 있다면 우리들일 것이다. 나이를 더 먹는다거나 그래서는 아니다. 정확하게 그건 아니다. 그저 우리는 늘 변해간다. 이번에는 코드를 입고 왔다든지, 지난번에 왔을 때 짝꿍이었던 아이가 홍역에 걸려 다른 여자아이와 짝이 되어 있다든지 하는 것처럼. 아니면 에이글팅거 선생님 대신 다른 선생님이 아이들을 인솔하고 있다든지, 엄마하고 아빠가 욕실에서 심하게 싸우는 소리를 들은 다음이라든지, 아니면 길가의 웅덩이에 떠 있는 기름 무지개를 보고 왔다든지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늘 뭔가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설명하고 싶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중략)... 예전에 내가 보았던 것들을 그 애는 어떻게 느끼고 있을지, 그리고 매번 그걸 볼 때마다 동생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을지. 이런 생각들이 나를 우울하게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어떤 것들은 계속 그 자리에 두어야만 한다. 저렇게 유리 진열장 속에 가만히 넣어두어야만 한다.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안타깝다.(p164-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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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달에는 가볍게 -^^~ 읽기를 소망하면서

 

 

 

   

 

 

 

 

 

 

 

 

 

 

 

 

 

 

1. 음식의 언어 (댄주래프스키, 어크로스)

언어학 교수가 음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음식에 관한 모든 언어, 어원, 실생활 이야기가 가득 펼쳐질 것 같아 기대가 크다. 먹으면서 책을 편하게 읽고 싶어 선택!

 

 

 

 

 

 

 

 

 

 

 

 

 

 

2. 언어의 무지개(고종석, 알마)

그의 책은 내가 국어에 관심이 상당했을 때 읽고 도움이 많이 된 기억이 있어 책이 나올 때마다 유심히 본다. 언어 관련 에세이는 믿고 볼 수 있는 그만의 언어에 관한 사유의 세계가 있기에 다시 한 번 빠져 읽고 싶어서 추천한다.  그를 통해 언어를 다시 공부하고 싶다.

 

 

 

 

 

 

 

 

 

 

 

 

 

3. 수학, 영화관에 가다(버카드 폴스터, 마틴 로스)

영화와 수학의 만남, 생각만 해도 설렌다. 수학은 자다가 이불을 걷어찰 만큼 지독히 왠수였지만, 특이하게도 영화 속에서 수학적 사고와 씨름하면 그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다. 수학을 영화관에서 만났을 때 어떠한 아드레날린이 분비될 지 벌써 부터 설레서 한 표!

 

 

 

 

 

 

 

 

 

 

 

 

 

4. 텃밭일지, 농사달력(꿈이 자라는 뜰, 그물코)

때론 무모한 그 순간이 좋다. 지금이 그렇다. 선정이 안될 줄 알면서도 읽고 싶어 선택했다. 오해하지 마시라. 아직 텃밭이 좋아 뒤뜰이나 가꾸며 전원생활을 꿈꿀 나이는 아니다. 다만 흙 속에서 커가는 식물이 어떻게 키워지는지, 어떻게 길러지는 지 과정이 궁금할 뿐이다. 자연의 일부인 우리가 자연에 관심이 없다면 그건 인간에 관심이 없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 표! 물론 뽑히지 않겠지. 뭐..

 

 

 

 

 

 

 

 

 

 

 

 

 

 

5. 이 아이들에게도 아버지가 필요합니다(천종호, 우리학교)

<아니야, 우리가 미안하다>를 읽으면서 감동했던 기억에 다시 한 번 그의 책이 나와 반갑다. '호통판사'로도 불리지만 그 호통 속에 지독한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어 마음이 먹먹해지며 그의 책을 읽은 기억이다. 그런 그가 소년재판에 서 있는 아이들의 아버지를 자처하며 이 에세이를 써냈다. 소년들을 재판장에 서 있게 하는 것은 그들의 심성이 죄를 지을 만큼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가정이 우리 사회가 그런 죄인들을 키워내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며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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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을 왜 하지? - 수업으로 읽는 우리 교육
서근원 지음 / 우리교육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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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르치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적성의 문제가 아니라 부단한 성찰과 배움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다.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인 동시에 배우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처음 교단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말 그대로 정신없이 하루를 보냈다. 30명 넘는 제각각의 아이들 틈바구니 속에서 쏟아지는 공문과 학교 안팎의 지침과 계도는 나를 숨 막히게 했다. 1년을 하고 나니 내 기운이 다 소진되는 것 같았다. 힘이 부처 군 입대를 신청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복직하고 새롭게 시작했다. 막연히 수업을 잘하는 선생님이 되고 싶어 수업 기법과 방법에 연수를 받으러 돌아 다녔다. 기법과 방법에 대해 많이 알아갈수록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배우면 배울수록 풀어내기가 버거웠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간과한 채 몰아붙이고 혼자 좌절했다. 새로운 방식으로 수업을 하면 그 때만 반짝인 것 같았고 아이들은 또다시 제자리인 것처럼 느껴졌다. 난 항상 바쁘게 지냈지만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수업은 기법과 방법의 연마가 아니다. 수업에 대한 가르치는 자의 철학의 문제이다. 내가 수업에 대한 철학이 있었던가. 수업을 왜 해야 하는지 몰랐다. 교과서를 다 배우고 진도를 맞춰 나가야 하는 게 가장 큰 일인 줄 알았다. 그게 안 되면 아이들을 닦달했고 난 조급해졌다. ‘수업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이 없이 모둠학습을 하고 조별학습을 진행했다. 동기유발부터 시작되는 일련의 교수-학습 체계는 지켜져야 했으며 교과서에 실려 있으니 꼭 해야 되는 것인냥 전투적이었다.

 

<수업을 왜 하지?>는 제목 그대로 수업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고민을 담은 책이다. 9편의 수업 사례를 통해 수업의 장면을 복기해가며 대안을 찾으려고 시도한다. 법률가들에게 판례가 소중한 것처럼 교사들에게 수업사례, 상담사례, 교육적 문제와 처방 사례가 소중하다.(11p, 추천사) 이 책은 아이 눈으로 수업하기바람을 일으켰던 서근원 교수가 썼다. 2003년에 초판으로 나왔고, 2014년에 2판이 나왔다.

 

2판을 내면서 글의 내용은 크게 손보지 않고 장의 배치를 달리하고 부를 나누었다.(p5)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우리나라 수업의 현실과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가 살펴보고 2부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현재의 방식과 그 한계를 알아본다. 3부는 수업이 무엇인지 새롭게 고민하고 4부는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수업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각 부는 특성에 맞게 수업장면이 삽입되어 있고, 9개의 수업 장면을 전사하거나, 분석한다.

 

다양한 수업 사례는 이 책의 백미이다. 9편의 수업 사례는 읽으면서 공감했으며 때론 소설을 읽듯, 키득거리는 유머집을 읽듯 신났다. 교사들이 펼치는 일상적 수업 사례는 내 이야기인 듯 가슴이 아프다가도 아이 눈으로 수업을 본다면 진짜 배움이 일어나고 있을까라고 생각할 때 뜨끔하기도 하였다. 내 이야기인 듯, 옆 반 이야기인 듯 실제 상황 속에서 철학적 고민이 수도 없이 일어났다. 더욱이 서근원 교수의 고백에 가까운 마지막 장(가고픈 저 길)은 읽으면서 또 다른 나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만큼 서글프고 감동적이었다. 마치 문학 작품에서 오는 감동처럼 느끼는 까닭은 수업이 가르치는 자로서의 숙명이라는 공감이 들어서였을 거다.

 

교육과정과 교과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책에서 나오는 수업 장면에서 줄기차게 나오는 선생님들의 딜레마는 교과서와 교육과정이다. 교과서와 진도에 매몰되고, 형식적인 수업 기법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될 때의 모습들이 담겨있다. 그 속에서 아이들의 눈으로 수업을 살펴보고 배움을 지켜보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저자는 그 모습을 이해하며 바라본다. 이 책은 2003년도에 이루어졌으니 10년도 넘는 이야기이다. 물론 여전히 그런 관행들이 남아있긴 하지만 지금은 교과서는 교육과정을 가르치기 위한 하나의 범례이고 잘 정선된 예시안으로 교육을 바라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에서 계속해서 7차에 따른 교과서와 교육과정 이야기가 나오는데 지금 보면 문제가 있어 폐기되었거나 재정선된 새로운 교과서가 나온다. 그래서 나 역시 주제중심으로 재구성해 가르치고 있으니, 교과서 참고자료이고 단원은 주제에 따라 선별적으로 사용된다. 물론 면밀한 교육과정 분석은 필수임은 당연한 일이다.

 

정리하자. 그렇다면 수업을 왜 하는 것일까. 모든 교사의 현재 진행형은 수업이다. 그럼에도 왜 가르치는 것일까에 대한 고민은 상념으로 치부하는 교사가 많다. 나 역시 그랬다. 국가의 명을 받아 국가가 만들어 놓은 커리큘럼에 아이들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 내 임무였다. 왜 가르치는지 고민은 쓸데없는 막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교실 상황에서 수업 상황에서 하나도 나아지는 게 없다고 느끼는 데에 있었다. 그렇지 않겠는가. ‘왜 가르치는 가에 대한 철학적 고민과 사유 없이 기법으로만 수업이 이루어질 수 없다. 배움의 대상자인 학생은 어떠한 눈으로 배움을 해나가는지에 대한 고민 없이 수업이 제대로 될 리 만무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내 임무는 가르치는 기계가 아닌 아이들의 진정한 배움을 이끄는 스승이 되는 것이다. 나는 단순한 지식 전달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수업을 판단하지 않고 이해하려고 애를 썼다.’(p5), ‘나는 수업을 어떤 눈으로 바라볼 것인가? 라는 질문에 간접적인 방식으로 대답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p7)고 말하는 것처럼 이 책은 직접적으로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읽으면서 같이 대화한 독자들은 직접적으로 안다. 수업은 아이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같이 이해하는 과정이며 서로의 배움을 같이 공유하는 과정이다. 이해로서의 상대가 아니라 변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볼 때 교육과정의 혁신과 교과의 재구성은 요원한 일이다. 그들을 단순히 가르치는 대상이 아니라 주제 속에서 함께 배우는 상대로 볼 때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진정한 배움이 일어난다. 화려한 멀티미디어나 기법으로는 다가갈 수 없는 것, 맨손 수업이라도 삶을 이해하고 주제를 공유하며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수업을 왜 하는지에 대한 답이 아닐까 한다. 교사와 학생들 모두 진리의 공동체 안에서 같이 배우며 같이 성장한다고 믿는다.

 

야영하면서 음식을 만들어 보았는데 왜 수업 시간에 또 음식을 만드는 것일까? 야영하면서 음식을 만드는 것과 수업 시간에 음식을 만드는 것은 서로 어떻게 다를까?(p25)

 

“ ‘이것을 왜 하는 거니?’ 내가 아이들에게 묻는다. ‘선생님이 하라고 하니까요.’ 우성이가 대답한다.(p26)

 

그리하여 교과를 배우는 것이 우리의 삶과 얼마나 밀접한 관련이 있는지가 그의 수업과 삶에서 먼저 배어 나가를 바란다.(p33)

 

수업이 질적으로 변화기 위해서는 학급당 정원의 감축이라든가 시간 운영 방식의 변화와 같은 세부적인 조건의 변화와 함께 교사 자신의 노력이 요구된다. 그것은 집터와 목재를 준비한다고 해서 집이 저절로 지어지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p68)

 

교사는 한편으로는 학생들 하나하나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현재 수준과 속도를 확인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 교과서에 수록된 내용이 생산되기까지의 과정을 교사 자신이 먼저 경험할 필요가 있다. 교과서에 적힌 내용을 학생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해서 기억하게 하는 일은 몇 가지 수업 방법과 학생 통제 방법만 익히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런 결과물을 낳는 과정을 경험하게 하는 일은 교사 자신이 직접 해 보지 않는다면 가르칠 수 없기 때문이다.(p90)

 

수업을 통해서 학생들이 실제로 무엇을 학습했는지, 또는 무엇을 경험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학생들이 학습하거나 경험한 그것이 그가 학습하기를 기대한 그것인지 살펴보아야 한다.(p133)

 

예를 들면, 폭우로 수해를 입은 지역의 학생들에게 앞서 살펴본 <비 오는 날>이라는 시는 공허할 수밖에 없다.(p188)

 

요컨대, 수업의 표면에서는 교사가 학생을 가르침으로써 아이가 성장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교사가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불안을 느끼며,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 노력하는 가운데 성장해 간다. 아마도 여기에 수업의 또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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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의 공동체 - 신형철 산문 2006~2009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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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주의보가 경보가 되어 조심스러웠는데 다행히 비가 왔다. 계속 푸석거렸던 공기가 물기를 빨아내어 부드러워졌다. 이러 날은 괜히 싱숭생숭해서 시와 소설, 영화 등의 텍스트를 기웃거린다. 아마도 텍스트 속에 담겨있는 서사와 이야기에 교감할 수 있는 느낌이 살아나서이지 않을까. 나같은 범인은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그 느낌. 그 '알 수 없는 느낌'을 신형철은 글로 '알 수 있게 복원'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그 어떤 공동체를 향해 노를 젓는 일'이라고 그는 말한다.

 

신형철은 문학 작품을 읽었을 때의 느낌을 정확하게 말로 표현해내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수 편의 시와 시집, 소설 등에서 나오는 느낌 하나를 가지고 자유롭고 적확하게 글을 쓴다. '느낌은 희미하지만 근본적인 것이고 근본적인 만큼 공유하기 어렵다.'(p12)는 그의 말이 투정처럼 느껴지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는 어느 평론가보다도 공유하기 쉽게, 명확하게 글을 쓴다.

 

사실 신형철의 글을 제대로 마주한 건 <정확한 사랑의 실험>(2014)을 통해서다. 읽자마자 그의 글에 매료되었고, 텍스트를 정확하게 본다는 것은 그 텍스트에 대한 사랑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서평을 썼다. http://blog.naver.com/magicsm/220169497060  그리고 눈을 떼레야 뗄 수 없게 만드는 그의 글에 대한 매력이 이 책을 집어 들게 만들었다. 이 책 <느낌의 공동체>는 2011년에 발행되었다.

 

책의 구성은 시인, 시집, 세상, 소설, 영화에 대한 이야기 묶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묶음 구성은 평소 계속 신문과 잡지에 써 오던 글의 합으로 되어 있다. 그러하기에 쓰여진 연도와 날짜와 제각각이다. 하나하나 낱으로 읽어갈 때의 느낌과 그 읽어감을 큰 카테고리로 묶어 바라보는 느낌은 또 다르다. 한 편씩 읽을 때마다 그 독립된 한 편 자체를 음미했고, 큰 카테고리로 바라볼 때마다 신형철의 사유의 이미지로 그 틀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하였다.

 

우선 짚고 넘어가자. 신형철은 시와 시인을 바라보는 눈은 '진보'와 '혁명'이다.  문학은 서정성에 머물러서 투명하고 편안하고 또 안이한 것을 경계한다. 그는 '예술은 먼저 예술 자체를 혁신하면서 우선 인간을 바꾸고, 멀게는 제도의 변혁에 기여하겠다는 '가망 없는 희망'에 헌신해야 한다.'(p19)고 말한다. 그의 이런 '진보'와 '혁명'의 관점에서의 문학론은 이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시인 '진은영'에 대한 평론에서 그렇고, '모국어가 흘리는 눈물'편에서 허수경의 시에 대한 평론도 그렇다. '총을 든 선승의 오늘'편에서 서정성으로 회귀하는 고은을 매몰차게 밀어냈으며 '치명적인 시, 용산' 평론에서는 전투적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며'며 대표되는 그의 일련의 글과 평론들은 더욱 노골적으로 '진보'와 '혁명'으로 무장한다.

 

얼마 전에 서평글을 남겼던, '처형자와 시인이 나란히 앉아 통치한 서정시의 시대' 속에서 '시인'을 죽여야만 했던 <생은 다른 곳에>를 신형철이 평론한다면 어떠할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강렬히 '진보'로움을 갈구한다. 쿤데라든 신형철이든 시인과 시의 세계를 다룬다. 그런데 적어도 위 책에서는 사유하는 방식이 다르다. '예술에서의 진보는 대중과 함께 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을 창조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p18)고 믿는 신형철이 옳을까. 혁명시로의 전환한 야로밀을 죽인 쿤데라가 옳을까. 

 

다만 정확히 텍스트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은 필수다. 그 눈을 신형철은 가지려 한다. 수 명의 시인과 수십개의 시와 시집, 그리고 소설과 영화의 정확한 느낌의 표현을 읽고 있노라면, 얼른 하던 일을 멈춰두고 서점에 달려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책 속에 실려있는 작품집을 갖고 싶고, 시인과 작가를 얼른 만나고 싶을 만큼 멋지고 가치있는 작품들이 속속 등장한다. 이 작품들만 읽어도 여러해가 다 갈 것 같은, 풍요로운 이 감정을 감사하게도 신형철은 먼저 맛보고 글을 써주었다.

 

관점이 어찌 되었던, 그의 글은 읽는 재미가 있다. 이 재미는 그냥 말초신경의 흥미를 의미하지 않는다. 텍스트를 정확히 분석하고 느낌을 적확하게 표현해내는 능력에서 오는 글을 읽는 '탐구'와 '몰입'의 재미이다. 느낌의 공동체에 같이 배를 타고 가는 두근거림의 재미이다. <느낌의 공동체> 속의 많은 시인과 소설가들과 만나서 그들의 사유함을 공유하는 성장의 재미이다. 그래서 항상 신형철의 평론을 읽으면 감사하다. 

 

밑줄긋기

 

"사랑할수록 문학과 더 많이 싸우게 된다. 사랑으로 일어나는 싸움에서 늘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는 이는 잘못을 저지른 쪽이 아니라 더 많이 그리워한 쪽이다. 견디지 못하고 먼저 말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야 또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진다. 나는 계속 질 것이다.(p12)

 

"그녀의 사전에는 '솔직히 말하면'이라는 관용구가 없다. 솔직하지 않은 것은 말하지 않는다. '서정적'이지 않다고? 그러나 분명히 '시적'이다.(김민정, p30)

 

"뛰어난 메타포는 감각의 문으로 들어가 사유의 문으로 나온다.(진은영, p54)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게 사랑이지만, 더 많이 아파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 시다.(아름다운 엄살, 실존적 깽판, p127)

 

"크리스마스의 역설이 그렇게 생겨난다. 평소보다 훨씬 더 행복해야 마땅한 날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에, 흔히 겪는 어떤 사소한 불행 앞에서도 '오늘은 크리스마스인데!'라고 생각하면 더 서러워져서, 결국 우울한 날이 되어버리고 마는 역설. 크리스마스를 소재로 한 문학들은 흔히 이 크리스마스의 역설에 초점을 맞추고 '너만 그런 게 아냐. 다 그래'하고 우리를 위로한다.(이런 몹쓸 크리스마스, p159)

 

"시집 제목은 싱싱한 것으로 고르되, 시식용 시 제목은 반대로 고르자. 목차를 펼쳐서 사랑, 그리움, 슬픔 따위의 해묵은 단어들을 제목 안에 품고 있는 시를 먼저 읽어보라. 본래 시인의 진짜 실력은 저런 진부한 소재들을 처리하는 솜씨에서 드러난다. 예컨대 감히 '사랑' 운운하는 제목의 시를 쓴다는 것은 기왕의 수많은 연애시들과 진검 승부 한판 하겠다는 얘기다.(읽어야 할 것 투성이

, p178)

 

"얼굴 공개로 얻게 되는 '공익'의 실체는 불분명하다. 그가 향후 지속적으로 공중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칠 공인이 아니기 때문에 '알 권리' 운운도 설득력이 없다. 징벌의 차원에서 얼굴을 공개하자는 논리는 법치주의에 위배될 뿐 아니라 살인자의 가족에게는 연좌제의 굴레가 될 수 있어 위험하다. 유사 범죄 예방 운운은 추단과 바람일 뿐이어서 '무죄 추정의 원칙'이라는 성문법을 훼손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피해자의 인권이 문제가 된다면 살인자의 얼굴을 유족들에게만 제한적으로 공개할 수 있겠지만 본래 이누건이란 서로 주고 뺏는 것이 아니라 함께 수호되어야 하는 것이어서 저 논리는 감상적이다. 예외를 허용하면 원칙은 파괴된다. 살인자가 아니라 인권 그 자체를 보호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연쇄살인자의 얼굴은 전쟁터가 되었고 그 전쟁에서 우리는 졌다.(얼굴들, p231)

 

"마지막으로 말줄임표와 마침표. 흔히 말줄임표를 자주 사용하면 글이 겸손해보인다고 생각한다....(중략)말 줄임표는 겸손함이 아니라 소심함의 기호다. 마침표에 대해서는 긴 말이 필요없다. 담배는 백해무익이요, 마침표는 다다익선이다. 많이 찍을수록 경쾌한 단문이 생산된다.(구두점에 대한 명상, p255)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하는 일은 끝내 나 자신만을 사랑하는 일과 다르지 않아서 그 사랑은 가련한 사랑이다.(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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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탄생 - 사라진 암호에서 21세기의 도형문까지 처음 만나는 문자 이야기
탕누어 지음, 김태성 옮김 / 김영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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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문에 새겨진 한자 속에 담긴 인문학적 이야기 <한자의 탄생>

 

우리가 중국의 한자의 영향을 받은 한자문화권임은 너무나 당연하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로 인해 우리 문자의 혁신이 있었음에도 한자는 우리 생활 깊숙히 박혀있어서 지금까지도 낱말과 어원은 한자로 풀어야 이해되는 것들이 상당수다. 통계적으로는 우리 말의 70%정도는 한자어라 하니 그냥 넘길 수만은 없는 일이다.

 

한자는 사물을 본 떠 그 사물이나 그것에 관련있는 관념을 나타낸 상형 문자이다. 우리 나라의 문자는 표음문자로 그 과정이 다르다. 그래서 한자를 무턱대고 외우고 공부하면 낭패일 수 있다. 한자의 조형원리를 알고 그 발전 단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은 한자 문화권인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숙명일 수 있다. 한자가 위대하니 그것을 받들자는 사대주의와는 다르다.

 

탕누어의 한자의 탄생을 읽었다. 이 책은 갑골문자에 나타난 한자를 분석하여 그 모습을 우리 앞에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그 전의 학자들이 충분히 시도했었기에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 책의 장점은 그것에 더해 갑골문에 담긴 문화와 역사를 인문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한자의 모체는 중국의 갑골문에서 찾을 수 있다. 갑골문은 동물(거북이)의 뼈나 껍질에 새겨져 있는 글자로 오래 전 고대 중국에서 주술적으로 사용했던 문자 기호이다. 이러한 문자 기호의 발견은 그동안 베일에 쌓여져있던 중국 역사와 문화, 농법, 역법 등 다양한 분야를 확인할 수 있기에 획기적이었다. 때문에 갑골문자는 당시 사회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나침반 역할을 하며 중국 문자와 문물을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탕누어는 갑골문 속에 담긴 한자 이야기와 한자 변천 과정을 인문학적으로 재미있게 서술한다. 한자 속에 담긴 그 시대의 이야기와 삶은 읽는 소소한 재미를 준다. 탕누어 식의 신변잡기성의 편안하면서도 위트있는 이야기도 재미를 배가시킨다. 더욱이 한자의 조형 원리인 상형, 회의, 지사, 형성, 전주, 가차를, 모든 살아있는 것이 흔적을 남기는 상형, 모니터 커서같은 막대부호 지사, 하늘아래 새로운 문자는 없다는 전주와 가차로 알기 쉽게 설명하여 유익한 지식의 즐거움까지도 얻어갈 수 있다.

 

다만 이 책은 한자의 기초적인 지식이 부족하거나, 한자에 흥미가 없다면 몰입도를 떨어뜨릴 수 있는 여지가 다분한 것도 사실이다. 한자권이라고는 하나, 표음문자를 사용하는 우리로서는 한자의 특성과 그 시대 중국 문화를 아는 것이 우리 문화를 알아가는 것보다는 재미가 없을 수도 있다. 중국이나, 한자를 직접 사용하고 있는 문화권에서 더욱 요긴하게 읽힐 수도 있다. 그런 걸 감안하고 책을 선택해야 할 듯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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