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의 공동체 - 신형철 산문 2006~2009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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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주의보가 경보가 되어 조심스러웠는데 다행히 비가 왔다. 계속 푸석거렸던 공기가 물기를 빨아내어 부드러워졌다. 이러 날은 괜히 싱숭생숭해서 시와 소설, 영화 등의 텍스트를 기웃거린다. 아마도 텍스트 속에 담겨있는 서사와 이야기에 교감할 수 있는 느낌이 살아나서이지 않을까. 나같은 범인은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그 느낌. 그 '알 수 없는 느낌'을 신형철은 글로 '알 수 있게 복원'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그 어떤 공동체를 향해 노를 젓는 일'이라고 그는 말한다.

 

신형철은 문학 작품을 읽었을 때의 느낌을 정확하게 말로 표현해내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수 편의 시와 시집, 소설 등에서 나오는 느낌 하나를 가지고 자유롭고 적확하게 글을 쓴다. '느낌은 희미하지만 근본적인 것이고 근본적인 만큼 공유하기 어렵다.'(p12)는 그의 말이 투정처럼 느껴지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는 어느 평론가보다도 공유하기 쉽게, 명확하게 글을 쓴다.

 

사실 신형철의 글을 제대로 마주한 건 <정확한 사랑의 실험>(2014)을 통해서다. 읽자마자 그의 글에 매료되었고, 텍스트를 정확하게 본다는 것은 그 텍스트에 대한 사랑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서평을 썼다. http://blog.naver.com/magicsm/220169497060  그리고 눈을 떼레야 뗄 수 없게 만드는 그의 글에 대한 매력이 이 책을 집어 들게 만들었다. 이 책 <느낌의 공동체>는 2011년에 발행되었다.

 

책의 구성은 시인, 시집, 세상, 소설, 영화에 대한 이야기 묶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묶음 구성은 평소 계속 신문과 잡지에 써 오던 글의 합으로 되어 있다. 그러하기에 쓰여진 연도와 날짜와 제각각이다. 하나하나 낱으로 읽어갈 때의 느낌과 그 읽어감을 큰 카테고리로 묶어 바라보는 느낌은 또 다르다. 한 편씩 읽을 때마다 그 독립된 한 편 자체를 음미했고, 큰 카테고리로 바라볼 때마다 신형철의 사유의 이미지로 그 틀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하였다.

 

우선 짚고 넘어가자. 신형철은 시와 시인을 바라보는 눈은 '진보'와 '혁명'이다.  문학은 서정성에 머물러서 투명하고 편안하고 또 안이한 것을 경계한다. 그는 '예술은 먼저 예술 자체를 혁신하면서 우선 인간을 바꾸고, 멀게는 제도의 변혁에 기여하겠다는 '가망 없는 희망'에 헌신해야 한다.'(p19)고 말한다. 그의 이런 '진보'와 '혁명'의 관점에서의 문학론은 이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시인 '진은영'에 대한 평론에서 그렇고, '모국어가 흘리는 눈물'편에서 허수경의 시에 대한 평론도 그렇다. '총을 든 선승의 오늘'편에서 서정성으로 회귀하는 고은을 매몰차게 밀어냈으며 '치명적인 시, 용산' 평론에서는 전투적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며'며 대표되는 그의 일련의 글과 평론들은 더욱 노골적으로 '진보'와 '혁명'으로 무장한다.

 

얼마 전에 서평글을 남겼던, '처형자와 시인이 나란히 앉아 통치한 서정시의 시대' 속에서 '시인'을 죽여야만 했던 <생은 다른 곳에>를 신형철이 평론한다면 어떠할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강렬히 '진보'로움을 갈구한다. 쿤데라든 신형철이든 시인과 시의 세계를 다룬다. 그런데 적어도 위 책에서는 사유하는 방식이 다르다. '예술에서의 진보는 대중과 함께 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을 창조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p18)고 믿는 신형철이 옳을까. 혁명시로의 전환한 야로밀을 죽인 쿤데라가 옳을까. 

 

다만 정확히 텍스트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은 필수다. 그 눈을 신형철은 가지려 한다. 수 명의 시인과 수십개의 시와 시집, 그리고 소설과 영화의 정확한 느낌의 표현을 읽고 있노라면, 얼른 하던 일을 멈춰두고 서점에 달려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책 속에 실려있는 작품집을 갖고 싶고, 시인과 작가를 얼른 만나고 싶을 만큼 멋지고 가치있는 작품들이 속속 등장한다. 이 작품들만 읽어도 여러해가 다 갈 것 같은, 풍요로운 이 감정을 감사하게도 신형철은 먼저 맛보고 글을 써주었다.

 

관점이 어찌 되었던, 그의 글은 읽는 재미가 있다. 이 재미는 그냥 말초신경의 흥미를 의미하지 않는다. 텍스트를 정확히 분석하고 느낌을 적확하게 표현해내는 능력에서 오는 글을 읽는 '탐구'와 '몰입'의 재미이다. 느낌의 공동체에 같이 배를 타고 가는 두근거림의 재미이다. <느낌의 공동체> 속의 많은 시인과 소설가들과 만나서 그들의 사유함을 공유하는 성장의 재미이다. 그래서 항상 신형철의 평론을 읽으면 감사하다. 

 

밑줄긋기

 

"사랑할수록 문학과 더 많이 싸우게 된다. 사랑으로 일어나는 싸움에서 늘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는 이는 잘못을 저지른 쪽이 아니라 더 많이 그리워한 쪽이다. 견디지 못하고 먼저 말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야 또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진다. 나는 계속 질 것이다.(p12)

 

"그녀의 사전에는 '솔직히 말하면'이라는 관용구가 없다. 솔직하지 않은 것은 말하지 않는다. '서정적'이지 않다고? 그러나 분명히 '시적'이다.(김민정, p30)

 

"뛰어난 메타포는 감각의 문으로 들어가 사유의 문으로 나온다.(진은영, p54)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게 사랑이지만, 더 많이 아파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 시다.(아름다운 엄살, 실존적 깽판, p127)

 

"크리스마스의 역설이 그렇게 생겨난다. 평소보다 훨씬 더 행복해야 마땅한 날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에, 흔히 겪는 어떤 사소한 불행 앞에서도 '오늘은 크리스마스인데!'라고 생각하면 더 서러워져서, 결국 우울한 날이 되어버리고 마는 역설. 크리스마스를 소재로 한 문학들은 흔히 이 크리스마스의 역설에 초점을 맞추고 '너만 그런 게 아냐. 다 그래'하고 우리를 위로한다.(이런 몹쓸 크리스마스, p159)

 

"시집 제목은 싱싱한 것으로 고르되, 시식용 시 제목은 반대로 고르자. 목차를 펼쳐서 사랑, 그리움, 슬픔 따위의 해묵은 단어들을 제목 안에 품고 있는 시를 먼저 읽어보라. 본래 시인의 진짜 실력은 저런 진부한 소재들을 처리하는 솜씨에서 드러난다. 예컨대 감히 '사랑' 운운하는 제목의 시를 쓴다는 것은 기왕의 수많은 연애시들과 진검 승부 한판 하겠다는 얘기다.(읽어야 할 것 투성이

, p178)

 

"얼굴 공개로 얻게 되는 '공익'의 실체는 불분명하다. 그가 향후 지속적으로 공중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칠 공인이 아니기 때문에 '알 권리' 운운도 설득력이 없다. 징벌의 차원에서 얼굴을 공개하자는 논리는 법치주의에 위배될 뿐 아니라 살인자의 가족에게는 연좌제의 굴레가 될 수 있어 위험하다. 유사 범죄 예방 운운은 추단과 바람일 뿐이어서 '무죄 추정의 원칙'이라는 성문법을 훼손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피해자의 인권이 문제가 된다면 살인자의 얼굴을 유족들에게만 제한적으로 공개할 수 있겠지만 본래 이누건이란 서로 주고 뺏는 것이 아니라 함께 수호되어야 하는 것이어서 저 논리는 감상적이다. 예외를 허용하면 원칙은 파괴된다. 살인자가 아니라 인권 그 자체를 보호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연쇄살인자의 얼굴은 전쟁터가 되었고 그 전쟁에서 우리는 졌다.(얼굴들, p231)

 

"마지막으로 말줄임표와 마침표. 흔히 말줄임표를 자주 사용하면 글이 겸손해보인다고 생각한다....(중략)말 줄임표는 겸손함이 아니라 소심함의 기호다. 마침표에 대해서는 긴 말이 필요없다. 담배는 백해무익이요, 마침표는 다다익선이다. 많이 찍을수록 경쾌한 단문이 생산된다.(구두점에 대한 명상, p255)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하는 일은 끝내 나 자신만을 사랑하는 일과 다르지 않아서 그 사랑은 가련한 사랑이다.(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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