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겁쟁이 겁쟁이 새로운 파티
정지돈 지음 / 스위밍꿀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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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한 세상.
2 강의 국가가 무너지고 총기가 난무하는 디스토피아.

첩보물스러운데 반이 넘어가도록 무엇을 원하는 이야긴지 모르겠다.

'불필요한 여자'와 같이 읽고 있었어서 전시상황의 세계가 확장되는 느낌을 받는다.

결말 없는 결말이랄까.
앞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는 예감이 드는 결말.

디스토피아 소재의 이야기는 늘 막막함으로 끝맺지만 계속 읽는 이유는
그럼에도 나아가야, 해나가야 하는 삶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을 늘 하기 때문인 것도 같다. 

- 서울을 떠나는 순간 벌집이 될지도 모른다. 기름을 넣기 위해 주유소에 들렀다가 차량을 탈취당하고 무릎이 꿇린 채 뒤통수에 총알이 박힐지도 모르고 도로에 설치된 지뢰나 크레모아에 의해 산산조각 날지도 모른다. 볼일이 급해 국도에 차를 세우고 벌판으로 달려가다 저격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죽었다는 사실도 모르겠지. 아픈지도 모르고 슬픈지도 모르고 억울하지도 않을 것이다. 죽음의 유일한 장점은 남들은 알지만 자신은 모른다는 거다. 그것도 영원히. - 18

- 안드레아는 짐에게 무하마드의 삶을 글로 써보는 게 어떠냐고 했다. 짐은 좋다고 했지만 쓰지 않았다. 무하마드의 삶에 이입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하마드의 삶은 그가 좋아하는 것과 정반대였다. 학문에 대한 열의, 민족에 대한 애정, 가족에 대한 사랑, 미래에 대한 확신, 과거에 대한 그리움. 짐은 어느 하나 이해할 수 없었다. - 27

- 총은 감정을 가진 것처럼 스스로 발사되었다. 사람이 총을 쏘는 게 아니라 총이 사람을 쏘는 거야. - 36

- 재앙은 지진이나 홍수처럼 갑자기 도래하는 게 아니오. 무하마드가 말했다. 우리가 눈을 감았기 때문이오. - 91

- 보리는 성격이 그렇다는 말로 둘러대곤 했다. 낯을 가리는 성격이에요. 하지만 보리는 낯을 가리지 않는다. 그녀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걸 포기한 지 오래다. 남들이 뭐라고 지껄이면 그냥 속으로 조용히 생각했다. 다 망해버렸으면. 다 죽어버렸으면. - 100

- 그녀도 바람이 필요했다. 바람은 먼지와 죽음을 실어 날랐고 그 안에는 소량의 활력과 생명도 있었다. 바람이 맨살에 닿으면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살아 있다는 자각이 함께 찾아왔다. 그건 이상한 청량감이었다. - 111

- 미래를 구체적으로 생각할수록 슬픔이 찾아왔다. 그는 터무니없이 무책임하고 추상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는 아직 할 수 있는 게 많다. 우리는 생각한다. - 118

- 내가 제일 보고 싶은 건 그림자야. 길고 선명한 그림자. 그런데 마음이라니. 그런 게 왜 있는 거지? - 138

- 우리는 백미러를 통해 현재를 본다. 우리는 미래를 향해 뒷걸음질한다. - 154

- 다른 사람이 뭐가 중요해.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리기도 하는데 다른 사람 중요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사는 거니까, 다른 사람은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 작가의 말 중


2026. may.

#작은겁쟁이겁쟁이새로운파티 #정지돈
#스위밍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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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9
피천득 지음 / 민음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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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작가들은 읽기 전 부터 핀트 나간 윤리관, 성인지 감수성 등의 지점에서 각오를 해야 한다는 막연한 감정적 불쾌함과 불편함이 있기 마련이지만 
피천득이라는 사람은 참 서정적이고 잔잔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다 싶은 산문들이다.
그 서정과 애정이 구닥다리이긴 하지만.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친일로 변절한 춘원 이광수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는 글이 포함되어 있는데 흥미로웠다.

민음북샵에서 구입해서 편집자 레터가 있었는데 이런 레터 참 좋다.
롯데월드에 있는 피천득 문학관에 전시된 소박한 작가의 책장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나.
몇 권 되지 않는 책들과 볼품없는 책장에 대한 묘사는 직접 본 것은 아니라도 그 분위기가 느껴졌다. 

- 처음 제가 생각했던 제목은 '편지'였어요.
편지란, 그리고 편지를 둘러싼 감성이란,
피천득의 문학 그 자체라고 생각했거든요.
누군가 저에게 피천득 문학을 한 단어로 표현하라고 하면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제 상각은 '편지'.
누군가에게 당장 편지하고 싶어지는 두근거림,
그 연약하고 적극적인 박동이야말로 편지의,
그리고 피천득 글의 실체가 아닐까요. - 한국문학팀 박혜진 편집자 레터 중

- 산호와 진주는 나의 소원이었다. 그러나 산호와 진주는 바닷속 깊이깊이 거기에 있다. 파도는 언제나 거세고 바다 밑은 무섭다. 나는 수평선 멀리 나가지도 못하고, 잠수복을 입는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나는 고작 양복바지를 말아 올리고 거닐면서 젖은 모래 위에 있는 조가비와 조약돌 들을 줍는다. 주웠다가도 헤뜨려 버릴 것들이기에, 때로는 가엾은 생각이 나고 때로는 고운 빛을 발하는 것들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산호와 진주가 나의 소원이다. 그러나 그것은 될 수 없는 일이다. 그리 예쁘지 않은 아기에게 엄마가 예쁜 이름을 지어 주듯이, 나는 나의 이 조약돌과 조가비 들을 '산호와 진주'라고 부르련다. - 서문 중, 13

- 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는 것이다.
수필의 색깔은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하여 추하지 않고, 언제나 온아 우미하다. 수필의 빛은 비둘깃빛이거나 진줏빛이다. 수필이 비단이라면 번쩍거리지 않는 바탕에 약간의 무늬가 있는 것이다. 그 무늬는 읽는 사람의 얼굴에 미소를 띠게 한다.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서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 17

- 오동은 천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고,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물론 마음의 자유를 천만금에는 아니 팔 것이다. 그러나 용돈과 얼마의 책값과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마음의 자유를 잃을까 불안할 때가 있다. - 86

- 큰일을 하는 분은 대범하다는 말은 둔한 머리의 소유자가 뱃심으로 해 나간다는 말이다. 지도자일수록 과학적 정확성과 예술적 정서를 가져야 한다. - 145

- 누구나 큰 것만을 위하여 살 수는 없다. 인생은 오히려 작은 것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 190

- 나는 작은 놀라움, 작은 웃음, 작은 기쁨을 위하여 글을 읽는다. 문학은 낯익은 사물에 새로운 매력을 부여하여 나를 풍유하게 하여 준다. 구름과 별을 더 아름답게 보이게 하고 눈, 비, 바람, 가지가지의 자연 현상을 허술하게 놓쳐 버리지 않고 즐길 수 있게 하여 준다. - 227

- '또 한 해가 가는구나.' 세월이 빨라서가 아니라 인생이 유한하여 이런 말을 하게 된다. - 266

- 빈한이 아니라 한빈 속에서 봄을 기다립니다. "사람은 저 잘난 맛에 산다지만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 잘난 맛에 사는 것"이라던 피천득 선생의 파릇한 문장을 가슴에 안고 또 한 번의 봄을 기다립니다. - 작품 해설 중

2026. may.

#악수도없이헤어졌다 #피천득 #민음세계문학 #수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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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기 혹은 영원히 남아 있기
강보원 지음 / 민음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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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즐겁게 읽었다.
김화진 작가의 책 추천을 어느 유투브영상에선가 보고 사보았다.

문학과 음악에 대해 이런저런 주절거림이랄까.

아마도 정지돈 금정연 같은 만연체로 자기혐오의 유머를 근간으로 삼는 그런 장르의 글쓰기.

짐작보다 더 궁시렁체여서 재미있었다.

혐오가 넘쳐서 연민이 되는 산문.

-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지낸다. 대개 지난 일들에 대한 생각이거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한 생각이다. 아니면 나와 전혀 관련 없는 개념적이고 철학적인 생각들이거나. 아무튼 내가 생각한 것들을 글로 잘 쓰지 않으려는 이유들 중 하나는 그것들이 별로 좋지 않기 때문이고, 하나는 그것들이 아주 좋기 때문이다. - 15

- 일을 하고 싶은 이유는 뭐랄까, 자기만의 방을 갖고 싶은 이유와 비슷하다. 물론 직장은 자기만의 방이 아니다. 내 말은 문학이나 여타의 공부와 좀 관련되지 않은 삶의 영역을 갖고 싶다는 뜻이다. 가급적 출판사에서는 일하고 싶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일자리를 주면 가겠지만. 돈은 벌어야 하니까. 그래도 좀 부품 같은 게 되고 싶다.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일. - 18

- 요즘에는 태도에 대해서 생각 중이다. 좋은 태도를 갖고 싶다. 좋은 태도가 뭔가를 해결해 주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생각하는 좋은 태도를 내가 취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것은 범박하게 말하면 혼자서 꾸준히 열심히 하는 것, 외부의 이런저런 사정들과 나 자신의 이러저러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자유를 획득하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늘 잘 사는 것을 최우선으로 두고 생각한다. 잘 살기. 잘 살아야 하고, 잘 살고 싶다. - 21

- 인생이란 게 도대체 가능한 것인지 진심으로 궁금할 때가 있다. 인생을 살려면 인생과 보폭을 맞춰서 착착 잘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모든 일들이 너무 빠르게 나를 지나쳐 간다. 지나쳐 가서 그냥 깔끔하게 헤어지면 차라리 좋겠는데 앞에서 목줄을 당기고 나를 질질 끌고 가는 것 같다. 해야 할 건 너무 많고, 하지 않은 것은 정말이지 너무 많다. 그것들은 결국 돌아오는데 그럴 때가 되면 숨이 턱턱 막힌다. 내가 할 수 있는 거였으면 진작했겠지. 하지만 할 수 없는 것이어서 안 한 건데 왜 끝끝내 하라고 나한테 이러는 것인지? 억울하지만 그런 억울함은 어떻게 해소되는 것도 아니다. 그냥 해야 한다. 하고 나면 좀 낫긴 하다. 다른 하지 않은 일이 만기가 차서 내 목덜미를 움켜쥐기 전까지는. 천천히. 좀 천천히 살게 해 주면 안 될까? - 28

- 자유라는 건 확실히 없을 땐 불행하지만, 그것이 있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그런 종류의 것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자유는 종종 끔찍한 것일 때가 많다. 이 사실을 외면하는 작품이나 주장은 내게 비현실적인 몽상으로 느껴졌다. - 50

-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작은 공터에 풀을 심는 일처럼, 아무것도 없는 곳을 다시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돌려놓는 일처럼, 어쩌면...... 어차피 달리 할 것도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소설을 써 보자.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이다. - 70

- 하루하루 실시간으로 성격이 안 좋아지고 있는 게 느껴진다. 약간 콩나물 자라듯이...... 눈 돌리고 다시 보면 더 나빠져 있다. 이 기세라면 조만간 아무도 만나지 못할 정도가 될 것 같다. 내 성격...... 내 성격 어떻게 하나. - 72

- 나는 현재가 싫고 미래는 더더욱 싫다. 가장 싫은 것은 지금 도래-한-비-미래로서의 현재다. - 99

- 대개 나는 끔찍하거나 끔찍하게 멍청한 생각들만을 하고 그래서 내 생각을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다. 나는 내 생각을 말하려고 이 글을 쓴 게 아니라, 어떻게든 내 생각을 말하지 않으려고 이것을 쓴 것이다. 이 연재를 유심히 읽은 사람이 있다면 알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남의 일기를 유심히 읽을 리는 없으므로 나는 내 생각을 말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쓴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나는 어떻게든 내가 생각하는 것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가능하다면 생각 자체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생각이란 것은 내가 겪는 온갖 종류의 괴로움 중 압도적으로 대부분의 원인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 117

- 침묵은 금이지만, 사람이 또 금으로만 사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일관성을 추구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 124

- 내가 생각하기에 세상을 모르고 뭐 낭만적이고 그런 사람이 예술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극도로 실용주의적인 사람들만이 예술을 한다. - 158

2026. jul.

#지나가기혹은영원히남아있기 #강보원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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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책으로 - 순간접속의 시대에 책을 읽는다는 것
매리언 울프 지음, 전병근 옮김 / 어크로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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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 책을 구매했었을까?
분명 무슨 계기가 있어 사둔 책일텐데.

서사가 있는 이야기만 죽 읽어대서 잠시 환기하는 기분으로 책장에 있던 책을 골랐다.

육아하는 부모들, 저연령 대상의 선생들이 참고할 만한 책이다.

- 읽기는 관조의 행동이다. 주의를 분산시키는 상황에서는 저항의 행동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를 시간과 더불어 생각하게 한다. - 데이비드 울린

- 나는 읽기의 고유한 본질이 고독 속에서 일어나는 소통의 비옥한 기적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저자의 지혜가 떠나는 곳에서 우리의 지혜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히 느낀다. 이례적인, 더욱이 신적이기까지 한 법칙에 의해 그들의 지혜가 끝나는 지점이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지혜가 시작되는 지점처럼 보이는 것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 독서에 관하여 중

- 우리가 소설을 읽는 동안, 타인의 관점을 취해보는 과정과 소설 내용 자체가 공감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도덕 실험실'의 역할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소설을 읽을 때는 뇌가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의 의식을 그대로 따라합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따라하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 했을 사람까지 포함됩니다. 이때 우리는 잠시나마 타인이 되어보는 것이 정말 어떤 의미인지를 시뮬레이션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우리와 아주 비슷하거나 때로는 너무나 다른 감정과 분투에 지배당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그런 시뮬레이션을 거치면 우리의 읽기 회로망은 정교해집니다. 또한 우리의 일상생활도, 다른 사람들에게 지도력을 행사하는 이들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 92

- 21세기의 가장 큰 실수를 꼽는다면, 첫 번째는 20세기의 최대 실수를 무시한 것이고, 두 번째는 점점 파편화하는 사회에서 우리의 비판적인 분석력과 독립적인 판단력을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준 것은 아닌지 가늠조차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굳이 답을 해야 한다면, 우리의 핵심적인 능력이 이미 감퇴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 297


2026. jun.

#다시책으로 #매리언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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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돌멩이 - 2026년 제4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ㅣ 이상문학상 작품집
위수정 외 지음 / 다산책방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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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의 실패담 크루가 가장 인상적이었다.(바로 뒤이어 노 피플 존을 읽었다.)
정말 세련되고 정곡을 찌르는 문장으로 글 쓰는 작가가 아닌가. 부럽다.
하나의 단편 속에 실패담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에피소드를 삽입하는 자연스러운 블렌딩.
계급이라는 무형의 실체에 대해 곱씹게 만드는, 은근하게 예리한 이야기.

지나친 진심.... 그게 불편해진 세상에 대하여...

- 수진이 죽은 후 재한은 수진을 생각한다는 의식도 없이 종종 그렇게 수진을 떠올렸다. 수진이 했던 말과, 어떤 순간의 표정과 몸짓 같은 것들. 기억하는 줄도 몰랐던 장면들을. 그것은 유미도 마찬가지였다. 가까웠던 누군가가 떠나면 그렇게 된다는 것을 둘은 이제 알게 되었다. 그 무력함과 슬픔을. 이어서 뒤따르는, 대상이 모호한 분노도. - 위수정, 눈과 돌멩이, 13

- 재한은 고개를 틀어 바깥 풍경을 응시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정제되지 않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재한은 창밖으로 보이는 희고 고요한 식물들의 세계를 바라보았다. 소리와 풍경의 불일치가 오히려 재한의 불안을 조금씩 가라앉혔다. 그것은 낙관이라기보다는 슬픔에 가까웠다. - 위수정, 눈과 돌멩이, 21

- 누구나 가족과 연인과, 결국엔 삶과 이별해야 한다. 예외는 없다. 그 모든 일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믿을 수가 없다. 하지만 사건들은 일어난다. 나의 이해와 무관하게. 그러므로 나는 내게 일어난 일들을 사후적으로라도 이해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들여 되새겨보아도 불가해한 일들은 있을 것이다. 불가해한 채로 받아들이는 연습도 필요하겠지. 살아가려면. 인간으로 살아가려면. 그것을 애도라고 불러도 될까? - 위수정, 문학적 자서전, 62

- 원희에게서 조금 떨어진 벤치 주위에서 큰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젊은 남녀 무리가 보였다. 짧은 스커트에 어깨가 드러난 셔츠. 누군가 농담을 던졌는지 무리는 동시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이 못 견디게 아름다웠다. 가슴 깊은 곳에서 질투심이 솟아났다. 하지만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니까. 나도 저런 때가 있었던가? 저들도 지금 자신들이 얼마나ㅏ 아름다운지 모를까. 무심할까. 원희는 한동안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들이 무지하기를 바랐다. 실수를 반복하고 좌절하기를. 그리고 후회하기를. 내가 그랬던 것처럼. - 위수정, 오후만 있던 일요일, 91

- 해진이 살아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
나는 끔찍한 내용보다 아직도 해진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때 죽었으므로 사람들이 기억하는 해진은 열여섯 살에 멈춰 있을 텐데 사람들은 어떻게 성인이 된 그 애를 알아본 걸까.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누구하나라도 말을 걸었다면 그 애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텐데 아무도 확인하지 않은 게. 사람들은 온갖 이야기를 지어내고 믿으면서 그 애의 죽음 만은 상상하지 못한다. - 이민진, 겨울의 윤리, 209

- 페이스트리는 뜻밖에 정치적인 빵이다. 겹겹이 쌓인 층과 층 사이, 선처럼 얇은 틈이 숨어 있다. 한 입 베어 물면 버터 향이 입안에 퍼지고, 부스러기는 겹의 바깥으로 바스스 쏟아져 내린다. 당신은 이미 어디에든 속해 있다. - 정이현, 실패담 크루, 253


2026. jun.

#눈과돌멩이 #위수정 #이상문학상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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