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여자 - 영국 1920년대: <댈레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

두번째 여자 - 미국 LA 1950년대: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 있는 가정주부 로라.

세번째 여자 - 미국 NY 2000년대: '댈러웨이 부인'이라고 불리는 출판편집자 클래리사.

3명의 여자의 삶을 정교하게 교차시키면서 시대별 여성의 자의식을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는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화 <디 아워스 The Hours>를 보고 읽기 시작한 책이다. 놀랍게도 저자는 버지니아 울프의 여자 애인이었던 비타의 아들이다. 어린 시절 가까이에서 버지니아 울프를 지켜볼 수 있었던 까닭에서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시대를 앞서간 페미니스트로 각인된 버지니아 울프의 삶에 드리워진 여성주의적 '신화'의 베일을 벗겨내고 그녀의 삶을 보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한다. 페미니스트라면 받아들이기 불편한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저자의 견해도 더러 눈에 띈다. 하지만 나의 관심을 끌었던 부분은, 버지니아 울프에게서 볼 수 있는 도발적 몸짓은 그녀만의 독창적인 사회적, 정치적 이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녀의 작가로서의 치열한 자의식과 블룸즈버리 그룹의 개방적이고 지적인 분위기에서 기인한다는 점이었다. 자유롭고 창조적인 지적 공동체 - 문학, 예술,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꿈꾸는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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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책이라서 그랬을까? 제법 오래 전에 마지막 책장을 덮었건만 도통 정리를 할 수 없었다. 한 번 대출연장을 했기에 이제 무조건 반납해야 하는 상황에 몰려서야 비로소 이 두툼한 책을 앞에 놓고 짧은 단상으로나마 정리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렇다! 책을 읽어내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이다. 전공과 관련된 치밀한 책읽기를 해야 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자신의 관심에 따라 집어든 책에 기꺼이 시간을 투자하면서 즐기는 일이 무슨 어려운 일이랴. 정작 수고를 필요로 하는 것은 읽은 책을 어떠한 형식으로든 자신의 '노동의 생산물'로 만들어내는데 있다.
방대한 분량의 책을 읽고 그것을 독서일기 혹은 서평으로 정리해내는 것 - 이것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요네하라 마리가 인용한 사이토 미나코(齌藤美奈子)의 말이 인상적이다: "무언가를 쓰는 일이든 읽는 일이든, 모든 지적인 작업에는 인간의 존엄을 회복시켜 주는 힘이 있다. [...] 감정을 발산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자기와 주변을 관찰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225쪽). 아마 요네하라 마리의 인간적 매력에 사로잡히는 것은 이 말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그녀 자신에게 해당되기 때문이리라.

p.s. 요네하라 마리는 일본어-러시아어 통역가답게 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그리고 한반도의 역사에 대한 통찰과 날카로운 현실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작가의 독서목록을 훑어보니 일본에서는 "컬트 국가" 북한을 비롯하여 이들 지역에 대해 우리나라가 갖고 있는 관심과 지식의 정도와는 대조될 정도로 상당히 많은 전문서적들이 출간되고 있는 듯하다. 거의 관심이 없었던 이 지역들의 역사와 현실에 관한 방대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던 것이 내가 거둔 수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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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로 낚였다!  

어지간하지 않으면 함부로 손대지 않는 분야가 있다. 바로 심리관련서와 자기계발서이다. 전공과 관련해서 들춰보는 프로이트나 라깡의 이론들 외에는 서점에 가서도 가장 인색하게 곁을 주는 책들이 바로 이 두 종류의 서적들이다. 고아노 아츠시(小欲野敦)가 <약한 자의 변명>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세상에는 자기 자신을 찾았다고 해서 무언가를 구현할 만큼 대단한 자기를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고.1) 인간은 결코 이성적, 합리적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이성의 신화로 포장된 감성적 동물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는 굳이 심리학 개론을 들춰보지 않아도 지금의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기만 해도, 자신의 삶을 잠깐 동안만이라도 반추(反芻)해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부정할 수 없는 사태(事態)인 것이다.  

심리관련서/자기계발서를 읽는 목적은 대개 자기 자신을 알고 싶거나 자신을 변화시키고 싶어서일 것이다. 나 자신을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이런 피상적인 심리학 개론서를 읽지 말고 차라리 문학작품을 곱씹어가면서 읽어보자. 짧은 단편이던 장편소설이던 거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간군상의 특징과 엉킨 실타래와 같은 갈등의 양상을 파헤쳐보자. 시 한 편에서 나 아닌 한 타인의 내면의 풍경을 훔쳐보거나 예민한 감수성의 절규를 들어보자. 예컨대 요즘 읽고 있는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은 상실, 사랑, 욕망, 결어, 두려움 등 모든 심리학적 주제에 대한 탁월한 보고서이다. 작가의 난해한 언어의 숲을 잘 헤쳐서만 갈 수 있다면 거기서 '나 자신'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사유를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나 자신을 변화시키고 싶은가? 무의식의 상처라고 하는 심연이, 갈등의 변증법적 전개가, 욕망의 질주가 문제가 되는가? 그것은 이런 저런 매뉴얼에 의하지 않더라도 자기 자신을 잘 들여다보면 변화의 방향과 내용이 보인다. 그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침묵의 시간을 갖는 것이 아마도 가장 어려운 일이겠지만.  

1) 요네하라 마리 (이언숙 옮김): 대단한 책. 마음산책 2006, 38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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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기 1: 영화 <빨간 풍선>에서 인형극 성우로 일하는 줄리엣 비노쉬의 멋진 발음을 듣고서 불어를 배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 동기 2: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세계의 끝>을 읽고서 작품의 신화적 세계를 원문으로 읽고 싶은 욕심이 났다.  
- 동기 3: 영화 <여름의 조각들>에 줄리엣 비노쉬가 또다시 등장하여 당연히(!) 불어를 쫑알거리며 내게 염장을 질렀다.  

그래서 결심했다. 불어를 배우기로!!! 
학원을 다닐까도 고민했지만 오고가는 시간이 좀 부담스러웠다. 백방으로 알아본 후 선택한 교재는 우선 동영상 강의가 제공되는 주장수의 <프랑스어 첫걸음의 모든 것>. 이어서 EBS의 <입에서 톡 프랑스어>를 시작하면 될 것 같았다. 우선 발음 공부하는데 일주일 정도 걸렸다. 전혀 흉내낼 수 없을 것 같았던 (가래침 뱉는) 프랑스어 발음이 내게서도 나더라. 독일어 원서에 번역도 없이 마구마구 인용된 프랑스어에 무지 짜증났을 때 확 배워버렸어야 했었는데... 그 좋은 환경에서는 마냥 그냥 있다가 이제야 시작을 한다. 어쨌든 전혀 해독불가능할 것 같았던 프랑스어가 조금씩 읽혀지기 시작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언젠가 엑상 프로방스에서의 한 달간의 휴가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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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 최초의 과학자
마이클 화이트 지음, 안인희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사생아, 동성애자, 채식주의자, 밀실 공포증, 편집증 환자, 강박적 피해망상증, 비밀주의자, 왼손잡이, 인간 혐오자 - 이 모든 것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규정짓는 특징들이다. 건축가이자 예술가이며 과학자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레오나르도에게 그의 성품과 삶에 깊이 각인된 이런 인간적인 약점들이 있었을 줄이야.
작가에 의하면, 레오나르도가 남긴 노트가 1만 3000쪽에 달하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서 그의 개인적 삶에 대한 흔적들은 별로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각종 추론과 상상력을 통해서 작가가 재구성한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풍경과 이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레오나르도의 삶의 여정은 오히려 한 편의 소설과도 같다. '르네상스'라고 하면 흔히들 유럽문화의 전성기라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보여주는 16세기의 삶의 조건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열악하다는 사실 또한 흥미롭다. 벌어진 상처를 위한 그 당시의 표준적 처방을 위해 필요한 약재가 1파운드의 올리브 기름, 녹색 도마뱀 10마리, 마요라나, 쓴 쑥 한 되라니! (다른 처방도 있다: 지렁이 여러 마리, 포도주, 고약, 전나무나 낙엽송의 수지)
작가는 레오나르도가 남긴 과학적 성과와 유산을 토대로 그를 '최초의 과학자'로 등극시키려고 작심하고 이 책을 쓴 것 같다. 하지만 이를 증명하기 위한 챕터인 <노트 I>, <노트 II>, <미술의 과학>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어설프고 억지스러운 '과학적' 설명이 오히려 레오나르도에 대한 흥미를 반감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레오나르도의 과학자로서의 면모를 보다 철저하게 파헤쳐놓았기를 기대했던 독자에게는 실망을, 그의 인간적인 면모에 호기심이 있었던 독자에게는 지루함을 가져다 준 셈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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