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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 내 것을 버려 모두를 구하다 ㅣ 봄나무 사람책 6
김은식 지음, 김호민 그림 / 봄나무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윤봉길, 신채호, 안창호등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여러 독립운동가가 있지만
다른 운동가들에 비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이회영 독립운동가..
일제 강점기의 한국의 아나키스트 계열(아나키즘이 자본주의 반발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평등을 중시한다고 공산주의로 오인하는 사람이 많은 데
평등을 강조하면서 자유를 보장하기 때문에..
자유와 평등을 함께 추구하는 이념으로)의 운동가로
대한민국 제 1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의 형이며
개방적이고 호탕한 성격으로 일찍부터 개화사상을 받아들인 것으로 전해집니다..
소년시절부터 개방적인 성격이어서 집안의 종들을 장민으로 풀어주거나
남의 집 종들에게 높임말을 쓰는 등 파격행보를 보였다고 합니다..
독립협회에 참가하고 계몽운동을 벌였으며 신민회를 주직하여 을사조약 이후
일본의 국권 쟁탈이 가시화 되자
그의 형제들과 독립운동을 시작합니다..
이들은 독립운동을 하기로 가족회의를 마무리한 뒤
아주 은밀히, 차분하게 집과 땅을 팔아 재산을 정리하게 되는 데
재산을 처분하면서 노비문서도 모두 불태워 버렸다합니다.
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끝내 모진 추위 속(북방의 영하 이삼십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에
길바닥에서 일주일 넘게 만주 벌판을 헤매어 간 망명길까지 동행하였다 합니다..
줄잡아 60명이 넘는 일행이었다고 합니다.. 정말 대단하죠?!
총독부 의심을 살까해서 소문이 날까봐 미쳐 팔지 못한 종택은 버려두고 수습해 온 돈이 모두 40만원..
지금 화폐가치로 따지면 약 600억원이 넘는 엄청난 액수로 그만큼 엄청난 부와 명예를 누리던 가문이었습니다.
그런 엄청난 부와 명예를 포기하고..
그렇게 중국으로 갔으나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된 조선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중국 땅에 정착하기 시작하면
언젠가 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일본 군이 넘어올 것을 걱정한 중국은
그들에게 땅조차 주지 않습니다.
그러자 총리 교섭 통상 대신으로 조선에 부임했을 당시 친분이 있던 중국 총통 위안스카이를 찾아가
일본의 지배를 받아들일 수 없어 망명하게 되었다고 사정 설명을 하게 되고..
겨우 정착하게 되는 데
그 땅에서 오래도록 살아온 만주족과 한족들 사이에서
이회영 일행에 대한 경계심이 많아 습격 대상이 되어
이회영의 아내도 마적이 쏜 총에 어깨를 맞게되고..
약이 없어 치약을 바르고 싸매 놓을 수 밖에 없을 만큼 형편없었다 합니다..
태어난 지 돌도 채 지나기 전에 마적이 지른 불에 얼굴을 데어 평생 상처를 안고 살아야 했던 아들 규창..
그 숱한 고생들.. 그러나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계획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추진해 나갑니다..
해외 독립운동 기지의 핵심적인 부분이었던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게 되고..
이 학교 살림을 책임진 이회영 일가의 재산은 부쩍 부쩍 줄어
그 많던 재산은 불과 10년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됩니다..
일본 비밀 경찰대가 국경에서 출발했다는 이야기에 블라디보스토크로 피하기로 하는 데
이회영은 자금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호랑이 굴인 서울로 향합니다..
오늘날 너무나도 알려진 것이 적은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인 보재 이상설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져 있던 이회영은 뭔가 의미 있는 흐름을 만들려고
고종을 중국으로 탈출시켜 독립운동에 가담하도록 구상하여
고종 망명의 계획을 세웠으나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무산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게 되고..
불도 넣지 않은 냉방에서 싸흘째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옷이 없어 속옷 차림으로 방에 죽은 듯이 누워있던 가족들을 보게 됩니다..
가족들이 온기 한점 없는 냉방에서 이불을 둘러쓰고 오직 죽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회영의 기분은 어땠을까요? 정말 기가 막혔을테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습니다..
동지들의 도움으로 이렇게 굶어 죽고 얼어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넘겼는 지 모릅니다..
이회영 처자식 뿐아니라 여섯형제 모두 그렇게 모친 추위와 가혹한 운명으로 내몰려 있었던거죠..
대한 민국 임시정부 수립 당시 내분이 일어났는 데 이때 신채호와 조정역할을 하고..
비밀 결사단 다물단을 만들어 아들인 규학과 조카 규준을 조직 요원으로 활동하게 했고,
한중일 아나키스트 합작으로 독립운동단체인 항일구국연맹을 결성 의장으로 취임하였고
행동대 흑색 공포단을 조직하여 일제를 공포에 떨게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임시정부 주석이자 민족주의자인 백범 김구 선생이 주도한 한인 애국단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의열 행동 단체를 이끈 것은 아나키스트였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군대같은 큰 조직과 비교하면 적은 수가 비밀리에, 효가적으로 움직일 수 있어 유리한 점이 많기 때문이죠.
이회영은 그런 의열 투쟁 단체들과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습니다..
의열투쟁은 1920년대 이후 가장 적극적인 방법으로 성과를 만들어내 세계 여러나라의 언론이 이들 사건을 크게 다룸으로써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가 어느 정도인지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고 동포들의 잠들어 있던 독립의식을 일깨우는 데까지 이어졌고요..
이회영은 제 한 몸 버려 민족을 구하고자 한 동지들의 영혼을 위로 하고..
언젠가 자신도 그 뒤를 따를 것임을 스스로에게 다짐합니다..
그리고 예순 다섯이 되던 1932년, 온 민족을 짓누르는 절망감을 떨치기 위해 최후의 임무를 자신에게 맡기게 되죠..
그러다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그 당시 그는 이미 65세로 ..
현재 그의 묘소는 국립 현충원에 모셔져 있으며
아이들과 함께 서울 종로구에 세워져있는 우당 이회영기념관에 찾아가 보는 것도 좋을 듯 싶습니다..
수 많은 고맙고 위대한 영웅들 중 한 사람, 아니 이회영의 6형제와 그의 가족들에게
그들의 고단하고 용감한 삶이 있어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우리들 모두가 이처럼 기꺼이 자기를 희생하고 어려운 난관에 맞서 극복하고
역사를 위해 삶을 통째로 받친 그들의 정신을 본 받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