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사람들은 HIM 있게 말한다
임붕영 지음 / 미래지식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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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주장하는 HIM의 본질은, 물론 힘(power)라는 뜻도 되지만 다음의 세 요소를 품습니다. 첫째 humor, 둘째 impact, 셋째 meaning. 이 세 개념의 머리글자를 따서 이 책에서는 성공적인 대화에 언제나 이 HIM이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일단 여기까지만 읽어 봐도 공감이 되는데, 이 책에서는 더 구체적인 방법론을 독자에게 자상하게 정리해 줍니다. 

("*책좋사의 소개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p78을 보면 유대인의 속담에 이런 게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울어라.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는웃어라." 저자는 웃음이 최후의 승자라는 말도 덧붙이는데, 우리 독자들도 자주 듣던 "일류는 힘들 때 웃을 줄 아는 사람이다"라는 격언과 일맥상통합니다. 웃음의 긍정적인 효과는 경우에 따라 질병도 낫게 하고, 주변에다 일을 잘 풀리게 하는 좋은 기운 역시도 옮긴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한국 속담에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도 했죠. 사업체이든 가정이든 웃고 즐겁고 화합하는 분위기라야 직원들에게도 그 긍정의 에너지가 방사(放射)되지 않겠습니까.

p140을 보면 모든 갈등은 타인의 감정을 잘 살피지 못한 데서 비롯한다고 합니다. 나는 내 나름대로 절실하게, 감정을 담아 말을 한다고 하는데, 상대방은 그 말을 오해하고 기분이 상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더 큰 원인이 내가 아니라 상대방에 있다 해도(즉, 상식적으로 바른 말을 했을 뿐인데 상대가 곡해하는 상황), 나 역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좀 더 무난하고 덜 공격적인 표현을 택할 수도 있었으니, 이 역시 내게 잘못이 없다 어찌 단정하겠습니까. 대화의 기술은 아무리 다듬고 다듬어도 개선시킬 여지가 남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왜 효과적인 소통에 (의지는 충만한데도) 실패하는가. 첫째 지나치게 재미있게만 말을 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외워서 준비한 후 남들 앞에서 풀어놓는 조크는 오히려 역효과만 부르기 쉽습니다. 유머 감각은 자리에 함께한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소통하며 공감하며 빚어지는 것이라야지, 억지로 자신이 주목 받으려는 의욕 과잉은, 그게 의도한 대로 효과가 안 날 때 거꾸로 당사자에게 자신감을 빼앗아갑니다. 둘째는 과거의 좌절, 실패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안 될 것이라는 자기세뇌도 한몫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남은 잘하는데 나만 이렇다고 불필요한 비교를 하는 데에도 세번째 원인이 있으며, 넷째로는 내 감정을 내가 조절하는 게 생각보다 어렵다는 게 그 이유입니다. 이 외에도 p164 이하에서 저자는 두 이유를 더 짚어 줍니다.

저자 임붕영 교수는 한국유머학회 회장직도 맡고 있습니다. "어떻게 말씀을 그렇게 재미있게 하십니까?" 저자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중학생 때부터 탈무드를 읽어서 그렇습니다."라고 답한다고 합니다(p185). 이어 탈무드가 왜 유머의 원천인지에 대해 일곱 가지의 원인을 저자는 제시하는데, 이 책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이처럼 저자가 토픽마다 딱딱 몇 가지로 보기좋게 정리를 해서 독자들에게 제시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독자들이 이해하기도 쉽고, 이 정도는 나도 따라할 수 있겠다며 자신감도 생기는 것입니다.

요즘은 컴퓨터, 디지털의 힘으로 세상 자체가 굴러갑니다. 이런 세상에 아날로그적인 무엇을 들이대면 비웃음이나 사기 쉽고, 시계도 디지털 표시에만 익숙해진 요즘 어린이들은 1부터 12가 새겨진 아날로그 방식의 장치는 못 읽어낸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은 그 근본이 아날로그 구조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전히 아날로그적인 호소, 매력, 추억 상기에 어쩔 줄 몰라합니다. 디지털 시대일수록 따뜻한 말 한 마디가 그립고, 정서적 안정감을 제공하는 건 여전히 아날로그(p239)이기 때문이라는 게 저자의 명쾌한 분석입니다. 이 아날로그 감성을 대화에 물씬 반영하는 게 임붕영 교수님처럼 말을 잘하게 되는 비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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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없는 쿠데타 - 글로벌 기업 제국은 어떻게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가
클레어 프로보스트 외 지음, 윤종은 옮김 / 소소의책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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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전 시인 청마 유치환은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을 보고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이란 천재적인 시구를 만들었습니다. 깃발이 펄럭이는 음향이 사람 귀에 안 들리는 건 아니지만, 깃발이 아우성치는 그 맹렬한 기세, 그 안에 든 다량의 메시지까지는 일일이 고막에 못 담는다는 뜻이겠습니다. 세상사는 이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드러나지 않는 충격파와 움직임이 더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북뉴스의 소개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기업은 군대와 달리 토착민들에게 달콤한 미소를 띠고 접근합니다. 그들이 제공할 서비스와 상품은 지금의 삶의 질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향상시킬 듯 현혹합니다. 맥도널드나 코카콜라 같은 달콤하고 간편한 상품은 그것이 제공하는 서비스와 분위기 등과 언제나 일체가 되어 어필하며 젊은층은 그런 브랜드가 자리한 장소에 젊음의 활기와 낭만이 함께하는 듯 착각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감언이설 교언영색으로 타국에 진출한 기업들, 글로벌 제국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주권을 잠식하며 어느새 현지의 정치적, 산업적 헤게모니까지를 장악합니다. 저자들은 이런 장기간의, 은밀한 권력 교체를 일러 "소리 없는 쿠데타"라 일컫습니다.

책의 원제목은 Silent Coup인데, 영어에서는 그냥 coup라고만 해도 프랑스어 원어의 coup d'etat를 뜻한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쿠데타란, 주권자인 국민의 뜻과 무관하게 정체불명의 소수가 권력을 탈취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글로벌 기업은 한편으로 현지의 정치인들을 매수하고, 다른 한편으로 대중을 세뇌하여 그공중의 참된 이익이 무엇인지 판단을 어렵게 만듭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 시민들은 다국적 기업의 탐욕이 향하는 곳에 곧 국가와 사회의 이익이 있다고 착각하게 길들여집니다. 군대가 주도한 쿠데타는 사람들의 주의를 쉽게 끌고 지탄을 받다가 좌초하기도 하지만, 이처럼 기업들이 주도하는, 보이지 않는 권력 찬탈은 미리 감지하기도 어렵고 쿠데타가 끝난 후에조차 알아채기 어렵습니다.

자유의 투사 만델라가 노력한 끝에 남아공 국민들은, 다수를 차지하는 흑인들은 노예에서 주권자의 위치로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지인들은 경제적으로도 완전한 자유를 찾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p63을 보면 남아공 마리카나 주민들이 빈약한 임금을 사실상 강요당하며 얼마나 어려운 삶을 영위하는지가 잘 고발됩니다. 투자자-국가 소송이라는 게 1990년대 후반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휩쓸며 강대국의 강요 비슷하게 개발도상국에도 규범으로 속속 도입되었는데, 이게 현지의 실정법과 거주자, 토착 기업의 이해를 얼마나 침해하는지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한번 다국적 기업의 눈에 나면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물어야 하는데, 조만간 한국인들도 그 무서운 위력을 구경하고 거액의 국부가 밖으로 유출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미얀마는 영토도 광활하고 인구도 많으며 부존 자원도 넉넉한, 하늘의 축복을 받은 땅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근세 이래 이 땅의 국민들은 풍요로운 삶을 누려 본 적이 없었습니다. 군부는 경제특구(p191)를 설치하여 외국 자본을 유치하려 애쓰지만 부패한 군부와 유착한 해외 자본이 어쩌다 이 제한지역에 발을 들여 놓아도 그들은 현지의 자원과 이익의 착취에 혈안이 되었을 뿐입니다. 정통성과 민주적 정당성이 부족한 군부가, 자주적이고 국민의 이익을 제대로 대변한 계약을 맺었을 리가 있겠습니까.

수백 년 전부터 서유럽의 자본은 카리브해,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에 진출하여 단일 농작물(상품 작물)만 재배하게 강요했습니다. 이를 플랜테이션 농업이라 부르며, 정작 현지인들은 일용할 양식조차 부족하여 빈곤선상에 내몰렸습니다. 이처럼 자본이 국경을 넘어 활보할 때 기층 민중의 생활은 더욱 곤궁해지며 마치 자본이 전제군주나 되는 양 그에게 세공을 바치며 자유를 박탈당하는 게 상례였습니다. 현대에 들어서도, 바로 우리의 주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감히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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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백끼 - 미식의 도시 홍콩에서 맛보는 100끼 여정
손민호.백종현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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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의 도시 홍콩에서 맛보는 100끼 여정!" 크~ 사람에게는 역시 먹는 낙이 있어야, 살아야 할 이유가 매번 생성됩니다. 물론 당뇨가 있다거나 한 분들은 칼 같은 의지로 조심하셔야 하겠지만, 사람이라는 동물은 역시 혀 끝에서 느끼는 쾌감이 있어야 뇌도 활성화하고 스트레스 대미지 누적도 리셋되는 듯합니다. 당뇨 있으신 분들이라 해도 이 책의 레시피를 조심스럽게 보면, 본인에게 잘 맞는 음식을 고를 수 있습니다. 그 기름진 중식을 다룬 책 중에 피해서 갈 길이 어디 있겠나 싶어도, 엄밀히 말해 중식과 홍콩 미식은 각각의 결이 제법 다릅니다.

(*북유럽의 소개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p104를 보면 "차찬텡"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챕터가 시작됩니다. 차찬텡은 茶餐廳(차찬청)을 광둥식으로 읽은 건데(보통화라면 차좐팅이었겠죠), 저자의 말씀이 재미있습니다. 홍콩에는 집밥이라는 게 없고 모든 음식을 밖에 나와서 사먹어야 한답니다(물론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그 이유가, 세계에서 부동산 가격이 가장 비싸다 보니 집에 부엌을 둘 수 없고, 이 차찬텡이라는 업소에 들러서 사 먹을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홍콩의 살인적인 렌트 수준이야 우리 모두가 알지만, 차찬텡 유형의 영업 번성에 그런 배경이 깔렸다니 뭔가 덩달아 마음이 울적해집니다. 차찬텡 고유의 풍미 발전은 사회 구조 모순의 부작용인 셈입니다. 다행히 모든 메뉴가 60 홍콩달러를 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역시 면 하면 세계 양대 산맥이 이탈리아의 파스타, 그리고 중식의 모든 면류입니다. 그런데 p159에서 저자들은 "차원이 다른 면 요리"로써 이 홍콩 고유의 메뉴들을 꼽습니다. 이 책에서는, 밥상에서 국수가 밥을 이기는 유일한 나라(지역)가 홍콩이라고 합니다. 요즘은 (한국에서) 순대를 시켜도 기호에 따라 돼지 간을 뺄 수도 있는데(반대로 더 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홍콩에는 라면에다가 이 돼지 간을 얹어 먹는 猪潤麵(저연면)이 있다고 합니다. 홍콩에서는 쭈연민이라 발음하나 봅니다. 한국에서도 수원처럼 조선족들이 많이 사는 곳에서는 우육면(牛肉麵)이라는 걸 만들어 파는데, 저자들은 "홍콩의 우육면은 이름도 맛도 모두 달랐다"고 합니다. 牛腩麵(우남면)이라고 쓰는데, 저 "남"이라는 글자가 예스24 같은 데서는 구현 안 될 수 있어서 잠시 설명하자면, 고기 육(달월) 변에 남녘 남 자를 씁니다. 腩이 양지라는 뜻입니다.

p211을 보면 저자들은 "홍콩 음식 하면 딤섬부터 떠오른다. 그러나 막상 홍콩에 가 보니 훠궈의 도시라고 할 만했다."라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수원 같은 데 가 보면 사방팔방이 훠궈집이라서 아주 머리가 아플 지경입니다. 한자로는 火鍋(화과)라고 쓰는데, 음식점 간판에는 火锅라고 간체자로들 썼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들은 재미있는 말씀을 합니다. "훠궈의 뿌리는 홍콩이 아니고 심지어 광둥 요리도 아니다. 쓰촨이다." 사천성은 한국인들이 너무도 사랑하는 명대 소설가 나관중의 <삼국연의> 등에서 나오듯 유비의 촉나라가 자리했던 서북의 먼 변방입니다. 그런데 수원역 같은 데를 가 보면, 어떤 사천요리 특선 가게가 辣妹子라는 간판을 달고도 있죠. 사실 랄매자(라메이즈)는 후난[湖南]성 여성을 주로 가리키는 말이지만 뭐 사장님이 지가 스스로 라메이즈라는데 남이 시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라탕이라고 할 때에도 한국식으로는 가운데 글자를 랄(辣)이라고 읽어야 원래는 맞습니다.

p322 이하에서는 로가닉이라는 레스토랑이 소개되는데 사이먼 로건이 홍콩에 직접 오픈한 곳이라고 나옵니다. 책에도 설명이 있듯이 자신의 이름 로건에다가 오가닉(organic. 유기농)을 합성하여 지은 이름이라고 하네요. 이름하여 지속가능한 미식을 표방한다는데 솔직히 저는 심드렁한 느낌입니다. 여튼 이 책에서는 해당 레스토랑을 비중 있게 소개하기 때문에 독자인 저도 저자들의 태도에 따릅니다. 재료를 보니 감자는 윈난[云南], 가리비는 홋카이도[北海道]에서 공수해 온다고 합니다. 명품 식당답게 글로벌리 리소스풀합니다. 윈난 성은 정체자로는 雲南이라 쓰지만 책처럼 저렇게 표기하는 건 간체자죠.

요즘은 특히 여성들이 인스타에 올리기 위해 뷰(view)가 좋은 업소를 또 선호합니다. p460 이하에서는 유카 드 락(yucca de lac)을 소개하는데, 빅토리아 피크의 라이언스 전망대에 위치했으므로 뷰 관련해서는 최고로 꼽힙니다. 유카는 용설란의 일종으로 식물 키우는 분들이라면 알 수 있는 나무이고 lac은 프랑스어로 호수, 영어의 lake입니다. 한자로는 雍雅山房이라 쓰는데 두 이름 사이에 특별한 관계는 없습니다. 독자의 호기심과 관심사를 잘 간파한 우아하고 영리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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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공화국 - 법은 정의보다는 출세의 수단이었다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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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대학에 진학하여 열심히 법 공부를 하고, 마침내 사법시험(구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면 죄 지은 자들을 찾아내어 엄단하고, 또는 힘 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세상을 공평하게 바꾸겠다는 마음을 품었던 이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요즘은 로스쿨을 통해 법조인이 배출되고 그 과정도 복잡하여, 예전처럼 청운의 뜻을 품고 상경하여 법조인의 꿈을 꾸는 젊은이들이 거의 없습니다. 여튼 과거에는 이런 절차를 거쳐 법조인이 양성되었고 그들 상당수가 지금 정계로 진출하였기에 정치인 대다수가 법조인 출신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들은 정의로운 이들이며, 법조인이 된 후 초심을 지켜 사회에 공헌하였을까요? 저자 강준만 교수는, 사정이 전혀 그렇지 않았으며 오히려 남을 짓밟고 부당한 이익을 거두려는 추악한 출세욕으로 똘똘 뭉친 이들이 훨씬 많았다고 주장합니다. 그 결과가 지금 난장판이 된 대한민국 정치판, 재계, 사회라는 것입니다.

(*북뉴스의 소개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이라고, 한국 현대사 연구에 많은 흔적을 남긴 외교관, 언론인이자 저술가가 있었습니다. 그의 논문이나 저술은 1980년대 후반 시사잡지에도 자주 인용되었는데, 예를 들면 이승만 초대 대통령에 대해 우리는 그가 명문 프린스턴 박사 출신이라서 대단히 영어에 능통했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러나 헨더슨은 "마치 영어를 어떤 공식에 맞춰, 머리에서 조립하여 말하는 것 같았다."라고 예리한 인상 비평을 남긴 바 있습니다. 이런 헨더슨은, "모든 한국인의 마음은 서울에 있으며, 삶은 오로지 그 안이라야 살 가치가 있는 것처럼 여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p40). 이게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을 지적한 게 아니라(그는 1988년에 타계했습니다), 해방 직후 그 혼란한 와중에도 그러했으며, 심지어 조선 시대에도 다를 바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문외출송이라는 게 양반 계급에게는 하나의 형벌로 기능했겠습니까? 한국인에게는 조선, 아니 고려 이래 중앙에서 벼슬하여 권력을 잡고 동료들을 아래로 깔아보는 자리에 오르는 게 영원한 로망이었던 것입니다.  

p90을 보면 저자는 존 스타인벡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에게 우리는 도저히 한 사람이 해낼 수 없는 일, 감당할 수 없는 책임, 견딜 수 없는 압박을 부여한다." 그래서 이후 헌법 수정조항을 통해 미국인들은 대통령의 3선이 불가능하게 만들었으며, 이미 그 전에도 재선임기 만료 후 퇴임을 불문율로 존중했던 것입니다. FDR도 어쩌면 그런 중압감 때문에 건강을 미리부터 크게 해쳐 급서에 이르렀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가 발표되었을 때 히틀러는 그 책을 읽고서 "미국은 곧 망할 것이다!"라며 쾌재를 불렀다고도 하죠.

이처럼 대통령이란, 마치 초인과도 같이 명석하고 강인하고 심지어 건강하기까지 해야 하는 자리일진대, 과연 우리는 그런 대통령을 뽑아 왔는지 강준만 교수는 독자들에게 묻습니다. 지성 대신 배우자의 개성과 흡인력에 과도하게 의존한 사람은 아니었는가? 나아가 강 교수는 진보 진영 인사들을 향해서도, 출세욕에 빠져 압제의 시절에도 저항하지 않고 도피하여 이기적인 고시공부에만 몰입한 수구 세력과 얼마나 차별되는 인생이었는지 공평하게 꾸짖습니다. 서울법대는 육법당의 하위파트너였다는 비판(p67)도 있는데, 이는 5공 출범 당시 집권 민정당이 육사와 서울법대 출신으로 주류가 짜여졌고, 서울 법대가 육사에 오히려 밀려 아래 서열을 이룬 현실을 타매하는 표현입니다. 30년 전부터 일관되게 강준만 교수는 서울대 망국론을 설파한 적 있죠.

사면의 일상화, 인질극의 구조 등은 p129에서 인용되는 이국운 교수의 책 중에 나오는 말입니다. 한국에만 존재하는 전관예우의 폐습은, 국민들로 하여금 사법부에 대해 근원적인 불신을 품게 하는 원인인데, 이 역시도 조선시대 이래 내려오는 관존민비의 후진적이고 퇴행적인 그늘이 오늘에까지 잔존하는 불길한낌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전관예우 금지법이 아무리 마련된다 한들 이런 "인질극"의 상태가 법복귀족들을 장악하는 한 사법개혁의 효과라는 게 나올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강남이 "한국 자본주의의 엔진"일 수 있으나 모든 모순을 해결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겠는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며 불의의 카르텔에 암묵적으로 동의해 왔을 수 있는 독자들에게도 맹성을 촉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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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컬러 명화 수록 무삭제 완역본) - 명화와 함께 읽는 현대지성 클래식 63
알베르 카뮈 지음, 유기환 옮김 / 현대지성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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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겉표지에는 우리들에게도 익숙한 클림트의 <죽음과 삶> 일부가 미려하게 인쇄되었습니다(본문 중에서는 p368에도 있습니다). 현대지성에서 고전을 정확히 다듬어 펴낸 기획이 이 번역본으로 벌써 예순세권째에 이르렀습니다. 이 책은 유기환 한국외대 명예교수께서, 카뮈 특유의 그 박력 있고 냉소적인 문체를 잘 살린 완역으로 독자들에게 선보입니다. 현대지성 클래식 특유의 일관된 장정 디자인은 여기에서도 그대로이며, 본문 중에는 뭉크, 빅토르 타르디유, 게리 맬커스 등의 그림들이 천연색 도판으로 실렸는데, 이 작품 <페스트>의 내용 전개와 어느 정도 관련도 있는 주제들이라서 더욱 흥미롭습니다.

(*북유럽의 소개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이 번역본의 특징 중 하나는 요즘 독자들에게 낯설다 싶은 한자어에 일일이 한자를 병기했다는 점입니다. 이를테면 p62 같은 곳에서 기벽(특이한 습관. 奇癖), 명구(名句) 같은 단어들이 그렇습니다. 재미있는 건 이 대목에서 베르나르 리외(Bernard Rieux)가 그랑(Joseph Grand)을 가리켜 "출처를 모를 진부한 표현을 덧붙인다"며 불편해하는 모습이 담겼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의사인 리외는 이내 "필경 심각하지는 않을, 여기서의 페스트가 아니라, 역사상의 재난이었던 페스트 한복판에서도 그는 항복하지 않을 사람"으로 그랑을 평가합니다. 물론 지금 이 역병이 대수롭지 않으리라는 의사(le docteur)의 예상은 빗나갔지만 말입니다. 참고로, 이 번역본에서 "꿈 같은 시절"로 옮긴 구절 원문은 un temps de reve, "도원경의 불빛"은 un eclairage feerique입니다.

"이때는 또한 도시에 갇힌 모든 수인(囚人)이 자포자기하던 시절이기도 했다(p137)." 기자 랑베르는 특히나 무력감을 느끼며 특히 리외의 눈에는 길 잃은 유령처럼 보였다는 문장이 인상적입니다. 이 고전을 읽은 이들은 익히 다 알듯 랑베르는 당시 그럴 만한 개인적 사정이 있었습니다. 애초에 식민 북아프리카에 딱히 뿌리를 둔 처지도 아닌데, 하필이면 끔찍한 역병이 돌 때 손으로 찾았던 도시에 억류된 꼴이니 말입니다. p174를 보면 코타르가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 있죠. "다른 의미에서는, 페스트가 돈 이후로 제 형편이 더 좋아졌다는 사실입니다." 이 알쏭달쏭한 말은 그의 수수께끼 같은 처지와 함께 독자에게 묘한 느낌을 주며 나중에서야 드러나는 충격적인 사건을 암시합니다.

"페스트가 끝날 때가 됐어(p218)." 시민들은 희망 섞인 바람을 근거도 없이 품고 표현하지만 이 질병이 도시에 내린 계엄이 해제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많은 이들은 2차 대전 중 나치 독일이 강점한 북아프리카 오랑(Oran)의 암울한 처지를 이 장편이 암유했다고 해석했으며, (카뮈의 정치적 성향과 다소 배치되기는 하나) 미셸 푸코적 의미에서의 감시, 처벌, 억압 기제를 이 페스트(la peste)가 상징한다고도 새깁니다.

"사랑을 대신한 맹목적 고집에 저녁마다 더없이 충실하고 음울한 목소리를 부여한 제자리걸음 소리(p222)"는, 비상사태 때문에 더이상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아 일체의 기계음 따위가 사라진 도심에서 사람들이 웅얼거리는 소리, 힘없는 구둣발 소리 등을 놓고 저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점령된 도시, 빼앗긴 문화와 문명, 압류당한 자유와 활기를 이렇게 묘파한 카뮈의 통찰과 상상력이 빛나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보잘것없었던 만큼 더욱더 효율적이었던 페스트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p218)." 이민족이 명분 없이 짓쳐 들아오건, 조상 대대로 지켜온 자존과 명분을 능멸당하건, 사실 우리 소시민들은 비굴하고 무기력하며 비루한 목숨을 지키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할 각오가 된, 하찮기 그지없는 부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 같은 고귀한 사치가 비상시에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역병균은 바이러스와 달리 여름에 강하고 겨울에 힘을 잃습니다. 이 작품의 시대, 공간 배경에서 만성절(p280)이라 하면 오늘날의 할로윈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시민들이 살아 있는 유령들이 되어가는 즈음, 코타르는 p281에서 "이 (억압된)도시의 하루하루가 만성절이었다"라는 기막힌 독백을 뇌까립니다. p330에서 코타르는 드디어 사람들이 우려하던 방향으로 경솔한, 혹은 통제 안 되는 행동을 저지르며, 도시의 긴장이 해소되어가는 흐름과 정반대의 침체를 겪는 그를 보며 독자의 마음도 착잡합니다. p362에서 기관총에 맞아 쓰러지는 개 한 마리와, "형용사가 모두 지워진" 도시의 풍경을 보며 우리도 일상과 비상의 진정한 경계가 무엇인지 생각에 잠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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