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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공화국 - 법은 정의보다는 출세의 수단이었다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5년 3월
평점 :
법과대학에 진학하여 열심히 법 공부를 하고, 마침내 사법시험(구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면 죄 지은 자들을 찾아내어 엄단하고, 또는 힘 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세상을 공평하게 바꾸겠다는 마음을 품었던 이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요즘은 로스쿨을 통해 법조인이 배출되고 그 과정도 복잡하여, 예전처럼 청운의 뜻을 품고 상경하여 법조인의 꿈을 꾸는 젊은이들이 거의 없습니다. 여튼 과거에는 이런 절차를 거쳐 법조인이 양성되었고 그들 상당수가 지금 정계로 진출하였기에 정치인 대다수가 법조인 출신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들은 정의로운 이들이며, 법조인이 된 후 초심을 지켜 사회에 공헌하였을까요? 저자 강준만 교수는, 사정이 전혀 그렇지 않았으며 오히려 남을 짓밟고 부당한 이익을 거두려는 추악한 출세욕으로 똘똘 뭉친 이들이 훨씬 많았다고 주장합니다. 그 결과가 지금 난장판이 된 대한민국 정치판, 재계, 사회라는 것입니다.
(*북뉴스의 소개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이라고, 한국 현대사 연구에 많은 흔적을 남긴 외교관, 언론인이자 저술가가 있었습니다. 그의 논문이나 저술은 1980년대 후반 시사잡지에도 자주 인용되었는데, 예를 들면 이승만 초대 대통령에 대해 우리는 그가 명문 프린스턴 박사 출신이라서 대단히 영어에 능통했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러나 헨더슨은 "마치 영어를 어떤 공식에 맞춰, 머리에서 조립하여 말하는 것 같았다."라고 예리한 인상 비평을 남긴 바 있습니다. 이런 헨더슨은, "모든 한국인의 마음은 서울에 있으며, 삶은 오로지 그 안이라야 살 가치가 있는 것처럼 여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p40). 이게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을 지적한 게 아니라(그는 1988년에 타계했습니다), 해방 직후 그 혼란한 와중에도 그러했으며, 심지어 조선 시대에도 다를 바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문외출송이라는 게 양반 계급에게는 하나의 형벌로 기능했겠습니까? 한국인에게는 조선, 아니 고려 이래 중앙에서 벼슬하여 권력을 잡고 동료들을 아래로 깔아보는 자리에 오르는 게 영원한 로망이었던 것입니다.
p90을 보면 저자는 존 스타인벡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에게 우리는 도저히 한 사람이 해낼 수 없는 일, 감당할 수 없는 책임, 견딜 수 없는 압박을 부여한다." 그래서 이후 헌법 수정조항을 통해 미국인들은 대통령의 3선이 불가능하게 만들었으며, 이미 그 전에도 재선임기 만료 후 퇴임을 불문율로 존중했던 것입니다. FDR도 어쩌면 그런 중압감 때문에 건강을 미리부터 크게 해쳐 급서에 이르렀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가 발표되었을 때 히틀러는 그 책을 읽고서 "미국은 곧 망할 것이다!"라며 쾌재를 불렀다고도 하죠.
이처럼 대통령이란, 마치 초인과도 같이 명석하고 강인하고 심지어 건강하기까지 해야 하는 자리일진대, 과연 우리는 그런 대통령을 뽑아 왔는지 강준만 교수는 독자들에게 묻습니다. 지성 대신 배우자의 개성과 흡인력에 과도하게 의존한 사람은 아니었는가? 나아가 강 교수는 진보 진영 인사들을 향해서도, 출세욕에 빠져 압제의 시절에도 저항하지 않고 도피하여 이기적인 고시공부에만 몰입한 수구 세력과 얼마나 차별되는 인생이었는지 공평하게 꾸짖습니다. 서울법대는 육법당의 하위파트너였다는 비판(p67)도 있는데, 이는 5공 출범 당시 집권 민정당이 육사와 서울법대 출신으로 주류가 짜여졌고, 서울 법대가 육사에 오히려 밀려 아래 서열을 이룬 현실을 타매하는 표현입니다. 30년 전부터 일관되게 강준만 교수는 서울대 망국론을 설파한 적 있죠.
사면의 일상화, 인질극의 구조 등은 p129에서 인용되는 이국운 교수의 책 중에 나오는 말입니다. 한국에만 존재하는 전관예우의 폐습은, 국민들로 하여금 사법부에 대해 근원적인 불신을 품게 하는 원인인데, 이 역시도 조선시대 이래 내려오는 관존민비의 후진적이고 퇴행적인 그늘이 오늘에까지 잔존하는 불길한낌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전관예우 금지법이 아무리 마련된다 한들 이런 "인질극"의 상태가 법복귀족들을 장악하는 한 사법개혁의 효과라는 게 나올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강남이 "한국 자본주의의 엔진"일 수 있으나 모든 모순을 해결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겠는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며 불의의 카르텔에 암묵적으로 동의해 왔을 수 있는 독자들에게도 맹성을 촉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