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하지 않은 생각 - 아이디어 번아웃에 필요한 24가지 생각 습관
로히트 바르가바.벤 듀폰 지음, 김동규 옮김 / 교보문고(단행본)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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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암기력, 계산 능력보다는 창의력이 훨씬 중시되는 세상입니다.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도 참신한 아이디어가 중시됩니다. 아이디어는 아이큐보다 평등하기 때문에, 부지런히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회사에서 아이디어 머신이라고 해도, 사람인 이상 어느 시점에서는 아이디어가 고갈됩니다. 슬럼프에서 빨리 벗어나, 잘되었을 때처럼 반짝반짝 아이디어를 뽑아올리리면 어떻게 해야 할지, 이 책에 좋은 제안이 많이 나옵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영어에서 You're so predictable, you're too obvious. 라고 하면 넌 너무 속이 뻔히 보여, 다 읽혀, 뭐 이런 뜻입니다.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 패턴, 또는 그의 아이디어 생산 기제라는 것도 판에 박힌 듯 뻔하면 사회 생활이 어렵습니다. 저자가 창립한 회사 이름은 non-obvious company인데, 일단 뻔하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회사가 주목받을 자격이 있다는 발상입니다.

이 귀여운 책에서 제가 재미있게 본 건, 책 맨뒤에 몰아 놓은 "뻔하지 않은 주석"이었습니다. 대개 책의 미주는 참고문헌, 인용구의 출처를 모아 둡니다. "아니, 뭘 어떻게 했기에 심지어 주석까지도 뻔하지 않다는 거지?" 우선 이 책의 주석은 도서뿐 아니라, 필요한 경우 인터넷 문서의 URL로도 출처를 일일이 표시해 줍니다. 그런데 책에서 URL 출처를 대는 관행은 적어도 대략 십 년 전부터 있었습니다. 물론 인터넷 문서는 자주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므로 따로 아카이브되어 있지 않다면 매우 불안정합니다. 여튼 이 책의 주석이 뻔하지 않다는 건, 책이건 인터넷 문서건 일반 유저들이 쉽게 접하지는 않던 컨텐츠를 참조시켜 준다는 의미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아무리 회사에서 일 잘 한다고 칭찬이 자자해도, 어느 시점부터는 타성에 젖을 수 있습니다. 이럴 때에는 하루의 시작을 달리해 보라(p60)고 저자는 조언합니다. 밤낮을 바꾸거나 할 수는 없고, 루틴에 변화를 주라는 뜻입니다. 의외로 강박적으로 믹스커피 한 잔을 꼬박꼬박 챙기는 이들이 많은데, 커피 아니라 (건강에도 덜 해로운) 홍차 등으로 하루를 연다고 해도 큰일 나는 건 아닙니다. "꼭 이럴 필요가 없었네!"를 내 자신에게 알려 주면, 이 메시지를 기꺼이 받아들인 내가 정신의 리듬을 바꿉니다. 새로운 아이디어 감각은 여기서 다른 출구를 찾아 밖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영어에 rebuttal이란 말이 있습니다. "받아친다"는 뜻인데, 표현이 재치있기까지 하다면 repartee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자는 p41에서 prebuttal이란 말을 꺼냅니다. 이건 원래 영어에 없던 말이고 일종의 신조어입니다. 상대가 아직 나더러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저치가 나를 이렇게 보겠거니 짐작하고 선수를 쳐서 쏘아붙이는 걸 말합니다. 물론 사회생활에서 때로는 이렇게 해 줘야할 필요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대개 이런 행동은 괜한 자격지심, 자존감 부족, 피해의식 등의 산물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게 습관이 되면 인간관계가 원활히 만들어질 리 없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그런 폐단보다는, "프리버털이 습관이 되면 당신 자신의 시야가 좁아진다"고 합니다. 아이디어 생산에 해로운 루틴은 모두 디톡스하라는 이 책의 주제에 잘 맞습니다.

"의도적으로 뺄셈을 거듭해 보라(p146)." 회의를 할 때도 최소 인원으로 최소 장비로 홀가분하게 해 보라고 합니다. 이 페이지에서 저자가 인용하는 생떽쥐페리는 "인생에 있어 진정한 행복은, 더할 게 없을 때가 아니라 뺄 게 없을 때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참 맞는 말입니다. 이 말의 진짜 뜻은, 가족들끼리 휴일에 집이나 휴가처에서 오순도순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혹은 아무말도 없이 따뜻한 온기를 공유할 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작업 환경을 풀옵션으로 세팅할 생각만 하지 말고(대개는 허영심입니다), 몸도 마음도 가볍게 차리고서 머리를 비울 때 진짜 아이디어가 찾아옵니다.

플랜B가 없이 사는 사람은 무모합니다. 아무리 능력, 자신이 있어도 사람 사는 세상에 어떤 변수가 생길지, 끼어들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보통은 두 대안을 놓고 보다 나은 선택지를 고르며, 정 안 될 때에는 기존의 차선책으로 진행합니다. 그런데 p167을 보면, 플랜C를 마련하는 습관을 들여 보라고 합니다. 가뜩이나 아이디어 스로틀이 뻑뻑한데 무슨 C 타령이냐? 이 플랜 C라는 건 제3자 시야에서 사태를, 상황을 보는 습관에서 잘 나올 수 있다고 하네요. 저자가 이 책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포인트 중 하나는, 타인과 관계를 원만히 가지고 내 안에 그가 들어올 공간을 넓히라는 점입니다. 왜? 내 아이디어의 풀(pool)을 더 넓히고, 더 신선히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관계 개선은 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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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이지 않는 법 - 무엇이 죽고 싶게 만들고, 무엇이 그들을 살아 있게 하는가
클랜시 마틴 지음, 서진희.허원 옮김 / 브.레드(b.read)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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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받아들고 처음에는 좀 의아한 느낌이었습니다. 살아가는 방법도 아니고 "나를 죽이지 않는 방법"이라니? 그런데 요즘처럼, 전혀 모르던 사람과도 밀도 높게 소통해야 하고, 젊은 객기에 다소 무모한 도전을 벌이다가 실패라도 겪을 일이 많은 세상이라면, 자살 충동도 뜻밖에 자주 찾아올 수 있습니다. 이런 충동이라는 게 신산(辛酸)을 많이 체험하고 스트레스에 크게 노출된 어른들의 문제만도 아닙니다. 치밀어오르는 자기 감정을 잘 다스릴 줄 모르는 아이들도, 느닷 닥친 쇼크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큰일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잘 살기 위한 방법보다 먼저 배워야 할 건, 까딱 잘못해서 나를 성급히 내 스스로 죽이지 않는 방법이라는 저자의 말에 공감하게 됩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자살을 시도했던 건 우리집 지하실이었고 나는 그때 개 목줄을 사용했다." 이 책의 머리말인 "지금의 나는 살아 있어 기쁘다" 중 p10 맨처음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이런 말을, 우리가 책을 통해 접하니 이 정도로 무덤덤하게(도) 다가오겠지만, 아무리 모든 고뇌를 극복하고 사뭇 의연, 성숙해진 마인드셋으로 꺼내는 말이라 해도, 당사자는 얼마나 참담한 기분이겠습니까. 저자 클랜시 마틴 교수님은 본인이 열 번 이상의 자살을 시도하고 그 끔찍한 체험으로부터 회복을 이뤄낸, 이른바 자살 생존자입니다. 보통 영어권에서 suicide survivor라고 하면, 자살로 생을 마친 이의 지인, 가족이 스스로를 책망하는 마음에서 쓰는 말인데, 이 경우는 자살 미수와 이후의 피폐해진 심신 회복 과정을 마친 이를 일컫는 드문 용례겠습니다.

한국에서도 요즘은 애 셋 있는 집안을 좀처럼 찾기 힘듭니다. 그런데 책 p58을 보면, 마틴 교수님은 슬하에 자녀가 무려 다섯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 책을 읽다 보면, 그 시련을 딛고 일어서며 그 누구보다 "삶, 생존"의 중요성을 절감한 분이니, 가족 계획(?)이 이렇게 진행된 것도 이해가 됩니다. 다만 저자는 세 번 결혼하셨는데, 첫째 부인에게서 한 명, 둘째 부인에게서 두 명의 자녀를 봤습니다. 책에서는 이렇게 쓰지 않으시고 약간 우회적인 문장으로 진술하셨는데, 위트와 재치가 엿보이는 대목입나다. 독자인 제가 이 대목을 눈여겨 본 이유는, 상처로부터 그 사람의 감정이 얼마나 회복되었는지를 체크할 하나의 단서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경우 예전부터 자살을 죄악으로 간주했습니다. 신이 내린 소중한 선물인 목숨을 스스로 파괴한 자는 결코 천국에 갈 수 없으며 교회의 묘지에도 묻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 p168을 보십시오. 제임스 힐먼은 그의 1968년 저서에서 "자살 역시 인간 가능성 중 하나이며, 선택은 존중되거나 이해될 측면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20세기의 지성답게 자살에 대해 마냥 긍정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19세기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자살론>에서 "인간 자유의 궁극적 형태가 자살"이라고까지 주장했는데, 이에는 전근대적 종교의 그늘을 합리주의의 기치 하에 걷어내려는 배경도 있었던 거죠. 지금은 무슨 종교 같은 것이 사회를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자살은 그냥 자살로만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게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문은 늘 열려 있다." 이 말은 그리스도교 이전 로마 사회 지배층의 주류 사상이었던 스토이시즘 철학자들이 자살할 권리를 옹호하며 표명한 명제입니다. 저자는 그저 후세 학자들이 스토이시즘을 해석하며 도출한 사항이 아니라 그들의 원전에 이 말이 나옴을 분명히 밝힙니다. 이어 저자는 자신이 일으킨 교통사고 때문에 검거되어 단기일간 구치소에 수감된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deferred adjudication 처분을 받았다고 털어놓는데, 책에서는 친절하게 역주를 달아 이 제도가 우리나라에는 없다고 설명해 줍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십여 년 전 텍사스에 체류해서 이 제도에 대해 들은 적 있는데, 이게 미국에서도 텍사스에만 있습니다. 아주 쉽게 말하면, 검사 아니라 판사가 내리는 "기소유예" 처분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한국에선 이게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만, 미국은 기소독점주의가 아니고 대배심(grand jury)이 기소(conviction) 여부를 결정하므로 판사가 저렇게 개입할 여지가 있습니다.

스토이시즘은 로마 제국 최전성기에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갈 수 있는 데까지 올라가 본, 신선과도 같은 유한 계층에 의해 만들어진 사상이므로 요즘 사람들이 봐도 매우 쿨한 면이 있습니다. 요즘도 스위스에서 합법적 안락사를 요청하기 위해 현지 시설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부유층입니다. "살 만큼만 사는 게지혜로운 선택이다." 일견 수긍이 가기도 하지만, 사회 문제가 되는 자살은 대부분 취약 계층의 선택이거나 아직 판단 능력이 부족한 젊은이들의 경우입니다. 이런 자살은 개인에게도 비극이거니와 사회적으로도 커다란 손실입니다. 저자처럼 충분한 학식, 능력, 경험을 갖춘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파국을 면하고 건강한 일상으로 돌아오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인문학적 전거가 매우 많이 쓰였기에, 자살이라는 이슈를 떠나 유능한 인문학자가 어떻게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여 담론을 펴는지 배울 수 있는 아주 좋은 텍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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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달러 슈퍼리치 - 환율과 썸 타기
변정규 지음 / 연합인포맥스북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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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이나 채권 시장의 규모보다 훨씬 큰 게 외환 시장의 스케일입니다. 자본의 큰손이라는 게 그만큼 외환 시장에서 승부를 보려 든다는 건데, 작년 11월부터 해서 한국 원화의 가치가 지속적으로 떨어져 큰 우려를 낳았고, 이제는 1400원대를 뉴노멀로 봐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 신 정부가 갓 들어서서 여러 정책의 혼선(의도든 아니든)을 빚는 중이므로 더 상황을 주시해 봐야 합니다. 여튼, 이번 사태를 계기로 개미들도 "외환 변동성으로 수익(또는 손해)을 볼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실정법을 위반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환율의 파고를 타고 영리하게 주식, 채권을 갖고 노는 방법을 새로 배울 때라고 하겠습니다.

(*북뉴스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연합인포맥스는 연합뉴스 산하의 경제 전문 케이블채널인데, 다른 채널에는 잘 안 나오는 고위 임원, 권위자들이 가끔 출연하므로 개인적으로 휴일에 고정으로 재방송이라도 챙겨 보는 편입니다. 저자 변정규 전무님은 아주 자주 나오는 패널은 아닌데, 그만큼 드문 기회라서 더 집중해서 시청하곤 했습니다. 지금 이 책은 2년 전, 코로나 위기가 가라앉아 갈 무렵에 처음 출간되었고 이번에 개정된 것입니다. 그때에도, 코로나 때 풀린 돈을 회수하느라 파월 의장이 금리를 급격히 올렸고, 덩달아 원홧값 환율도 올라(달러 가치가 급상승했으니) 위기론이 돌기도 했습니다. 파월 의장은 지금 트럼프가 욕 먹는 만큼이나 엄청난 원성을 들었고 주식 시장은 침체를 면치 못했습니다. 그러니 지금이 과연 환율 공부할 때가 맞기는 합니다.

p109를 보면 "상상을 초월하는 외환 시장 규모"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일상에서 달러나 옌, 유로를 구경할 일도 별로 없습니다. 여행을 간다 해도 카드(비자나 마스터 제휴)나 유로패스 같은 걸 미리 준비해 가니 말입니다. 상경계를 졸업하고 은행 같은 데 취업을 해 봐야 아 그런 세상이 있구나 하고 눈치를 좀 채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큰손, 제도권 금융기관은 말할 것도 없고, 1997년 한국 외환 위기에서 큰 이익을 본 조지 소로스 같은 이들이 주로 하는 게임의 필드가 바로 외환 시장입니다. 메이저 시장은 24시간 돌아가는데, 제가 이 이야기를 지인한테 해 주니까 "마치 코인 같네"라고 대번에 반응이 나오더라구요. 그런데 사실은 외환 시장이 코인 같은 게 아니라 코인이 (훨씬 먼저 나온) 외환 시장을 따라한 것입니다. 이제 한국도 짧게 나이트 거래 타임이 열렸으니 새로운 국면이 열렸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초판을 읽고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만 변정규 전무님의 이 책은 일러스트, 도판이 많아서 경제 서적(대중서)이라는 무거운 인상이 거의 없습니다. 마치 중고등학생 독자라도 배려하는 듯 어투도 친절하고 설명이 쉬워서 우리 주린이 경린이 환린이 독자들도 쉽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각 챕터 말미에 가면 묵직한 이론 정리가 깔끔하게 차트, 표와 함께 등장하여, 실무뿐 아니라 이론적 배경까지 탄탄한 엘리트로서의 저자 면모가 드러납니다. 변정규 전무님은 소속 하우스가 미즈호 은행인데, 미즈호는 (요즘은 히라가나나 아예 로마자로만 표기하는 게 일본에서도 대세이긴 한데) 한자로 瑞穗(서수)라고 씁니다. 훈독하면 저게 일본을 가리키는 미칭이죠. 한국을 청구, 밝달(=배달. '배달의 민족'이라고 할 때 그뜻) 등으로 부르듯 말이죠.

모든 거래는 무엇인가를 주고 받습니다. 그래서 영어로 거래소를 그냥 exchange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외환은 특히 일정 비율에 따라 특정국 간의 통화를 교환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두 통화의 페어(pair)가 맞아야만 하는데, p119를 보면 세계에서 가장 거래가 많은 통화페어는 유로-달러라는 내용도 나옵니다. G2니 뭐니 해도 돈들의 게임, 저기 천룡인들의 세상에서는 아직 저렇게 백인들이 주도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p134를 보면 SWIFT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3년 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쳐들어갔을 때 바이든이 러시아를 이 국제결제시스템에서 제외하는 조치를 내렸습니다. 이때 관측자들은 당장은 러시아가 힘들겠지만 오히려 대체 결제 체제가 생겨 궁극적으로는 달러 패권이 약화될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 SWIFT에 어떤 위상 약화가 감지되지는 않는데, 작년 10월 카잔의 브릭스 정상회의에서 푸틴은 주머니에서 새 지폐를 꺼내들고 브릭스 통화를 만들자고도 했지만 중국이 위안화를 지키는 이상 터무니없는 소리입니다. 러시아와 중국은 겉으로 보이는 만큼 그렇게 친하지 않으며 오히려 앙숙에 가깝습니다.

모든 금융거래는 미래의 불확실성을 헷징하는 의도에서 비롯하고, 새로운 상품이 설계, 고안되는 것입니다. p236 이하에는 스왑이 설명되는데, 한국인들도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이른바 통화스왑이라는 조치로 여러 번 고비를 넘겼기에 이 용어가 익숙합니다. 통화스왑은 이 책에 나오듯이 자산스왑, 부채스왑 등의 유형이 있습니다. 회계 원리에 익숙하다면, 자산스왑이라는 게 있다면 부채스왑 포맷도 얼마든지 있겠음을 짐작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한 페이지를 넘겨 보면, 해외 자산에 투자할 때는 거의 언제나 환 헷징이 필요한데, 이걸 바이앤셀이라고도 한다고 저자는 말씀합니다. 전 처음에 저게 왜 저런 이름인지 몰랐는데, 책을 읽고 보니 너무 쉽게 이해되어서 약간 허탈해지기까지 했습니다. 

요즘은 동네 아줌마들은 물론이고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아파트 주식 카페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제롬 파월이 어떻고 재닛 옐런이 어떻고 글로벌하게 대화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호키시 도비시 같은 영어가 뭐 일상언어처럼 되어 버렸는데, 대화의 맥락에 자주 노출되다 보면 대충 무슨 뜻인지야 알지만 그래도 체계 속에서 정확히 이해할 필요도 있겠습니다. p402 같은 곳을 보면 연준 매파와 비둘기파의 스탠스 차이가 표로 정리되었는데, 뭔가 비주얼적으로도 깔끔해서 한눈에 바로 이해가 됩니다. p359를 보면 세상에 홍콩 같은 나라(라기보다 경제구역)가 어떻게 고정환율제를 운용하는지에 대해 설명이 나오는데 그간 아리송하던 게 단박에 해결되었습니다.

환린이들에게 너무도 쉽고 친절힌 기본서이지만 의외로 깊이 있는 설명도 많아서 너무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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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제럴드, 글쓰기의 분투 - 스콧 피츠제럴드는 ‘이렇게 글을 씁니다!’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래리 W. 필립스 엮음, 차영지 옮김 / 스마트비즈니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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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3월, <헤밍웨이, - 글쓰기의 발견>을 읽고 독후감을 쓴 적 있습니다. 지금 이 책도 같은 소설가, 언론인, 평론가 래리 필립스가 편집했는데, 글의 취사 선택과 배열에 있어 어떤 일관된 시야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F 스콧 피츠제럴드는 우리에게 <위대한 개츠비>로 유명한 작가인데, 젊어서부터 화려하고 주목받는 삶을 살았으나 배우자 젤다, 그리고 자신의 무절제함 때문에 말년에 큰 고생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글쓰기에 대한 열정과 재능만큼은 진짜였는데, 이 책에 실린 그의 솔직한 고백들을 보면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그 역시 우리와 크게 다를 바까지는 없는, 한 인간이었음도 확인하게 됩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p60에는 원래 1936년(그가 죽기 4년 전) 에스콰이어 誌에 기고한 글 일부가 인용됩니다. 스스로에게 "설교"한다는 표현을 쓰며 원칙과 초심을 잊지 말 것을 다독이는 느낌인데, 사후에 출판된 <The crack-up>에서 이 부분 원문을 독자인 제가 잠시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Let me preach again for a moment: I mean that what you have felt and thought will by itself invent a new style, so that when people talk about style they are always a little astonished at the newness of it, -because they think that it is only style that they are talking about, when what they are talking about is the attempt to express a new idea with such force that it will have the originality of the thought. (It is an awfully lonesome business, and, as you know, I never wanted you to go into it, but if you are going into it at all, I want you to go into it knowing the sort of things that took me years to learn.)

newness, originality 등이 그의 마음을 어느 정도 사로잡았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래리 W 필립스가 인용하지 않은 뒷부분도 제가 괄호 안에 옮겨 보았는데, 이로써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도 더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 책 p48 상단을 보면 스콧 피츠제럴드가 맥스 퍼킨스에게 보낸 편지 일부가 인용되었는데, 이 맥스 퍼킨스라는 편집인은 (피츠제럴드가 지금 거론하는) 토머스 울프(Wolfe)와도 아주 밀접한 관계였습니다. 특히 저 토머스 울프는 이 편집자가 완성해 낸 천재라고 해도 되겠는데, 편집자가 작가한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확인시켜 주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이 사연을 다룬 영화가 콜린 퍼스(M 퍼킨스 역), 주드 로(울프 역) 주연의 2016년작 <지니어스>입니다.

아무튼 그는 토머스 울프가 (자신과 같은) 천재임을 인정하며, 이런 천재가 천재로 태어난 재능, 모습 그대로 성장해야지 세상과 독자의 기호에 맞추느라 무슨 서커스 차력사 같은 길로 빠져서는 안 된다고, 제발 울프를 그 생긴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게 좀 놔두라고!라며 퍼킨스에게 간곡히 호소하는 중입니다. 저는 이 절규가, 꼭 울프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바로 자신을 염두에 두고서도 하는 말 같이 들렸습니다. "그러니 제발 날 좀 가만히 내버려 두시오!" 무슨 좀머 씨(Herr Sommer)도 아니고 말입니다. 공교롭게도 이 페이지 하단의 글에서는 피츠제럴드 자신이 헤밍웨이에게 준 영향에 대해 본인이 직접 평가하는(가정법을 쓰긴 했으나) 대목도 있습니다. 이 세 사람 중에서는 피츠제럴드가 가장 나이가 많고, 헤밍웨이, 울프 순서입니다. 울프를 빼고 도스패서스를 넣으면 Lost Generation 대표 리스트 완성입니다.

애초에 글을 쓸 때 그 구조부터가 잘 이뤄져야지, 누덕누덕 기워 만든 글은 본인이 나중에 읽어도 잘 읽히지 않더라고 털어놓는 대목도 p36에 나옵니다. 스스로도 자기 글이 잘 안 읽힌다면 남이 읽을 때야 대체 어떻겠습니까? 물론 이것도 에스콰이어 誌를 읽을 만큼 어느 정도 문해력을 갖추고 독서 감각이 있는 독자를 전제로 하는 말이지, 초등 국어 교과서 말고 읽을 수 있는 글이 하나도 없는 사실상의 문맹자라면 무슨 불평을 할 자격도 없습니다. 저는 어느 커뮤에서 초6용 고난도 수학 문제를 보고 "이런 걸 애들더러 풀라니 미친 나라 아니냐!"고 포효(?)하는 분을 봤는데, 나라에 이런 아저씨들만 잔뜩 있으면 반도체 회로나 자동차 엔진은 누가 설계하겠습니까? 부존 자원 하나 없는 한국은 뭘 먹고 살겠고 말입니다.

p25를 보면 피츠제럴드가 과연 그답게, 헤밍웨이 스타일(당대 독자들이 더 좋아했던)을 자신에게 은근 강요하는 퍼킨스더러 "같은 말을 반복해서 쓰는 헤밍웨이처럼, 나는 나 자신에게 관대하지 못하다"고 강력 항의합니다. 헤밍웨이는 문장이 단조롭고 간명했는데, 그건 헤밍웨이가 대단한 공력을 갖추고 시적(詩的) 심상을 문장에 담을 줄을 알았기에, 그 사람이니까 그래도 되었던 것이지, 무슨 초딩 문장의 합리화 같은 게 아닙니다. 피츠제럴드는 "이건 생존 본능의 문제"라고까지 말하는데, 쉽게 말해 "당신 자꾸 이러면 작가로서 나는 죽으라는 소리"라는 뜻이죠.

스콧 피츠제럴드는 1920년 <낙원의 이편 This side of paradise>로 데뷔했는데 p136 이하에 보면 그 숱한 거절을 당하면서도 기어이 출판을 이뤄내던 때의 기쁨, 다른 일화 등이 나옵니다. 이런 걸 보면, 고뇌와 불안 끝에 예술적 희열을 맛본 14세기 예술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다를 바 없는 삶입니다. 한 분야에서 대가가 되려면 무릇 이 정도가 되어야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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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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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4년 동안 프린스턴에서 사랑받아 온 바움가트너 교수(p81). 키는 185cm 정도이며(p72), 그에게는 이제 곁에 아내가 없습니다. 아니, 있습니다. 분명 있는데, 다만 그 연장(延長)이 이제 없을 뿐입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p75에 나오는 연장이라는 말은, 최고의 번역가 정영목 선생이 역주에서 설명하는 대로 데카르트가 썼던 용어입니다. l'extension이 불어 원어인데 영어로도 그냥 extension이라 씁니다. 대륙 합리주의의 완성자답게 그는 본질이 따로 있고, 그 본질이 차지하는 물리적 실체는 그저 "연장"일 뿐이라 생각했습니다. 바움가트너 교수님이 사랑하던 부인 애나는 사망했지만, 이는 단지 육신, 연장이 소멸했을 뿐 그녀는 여전히 교수님의 마음과 기억 속에 존재합니다. 그 본질이 이렇게 뚜렷이 그의 곁에 있는데 고쟉 그 "연장"이 땅에 묻혔다 한들 어찌 감히 누굴 죽었다고 평가하겠습니까.

p35에는 환지통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마도 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환상통, 유령 감각 같은 말이 더 익숙할 텐데, 영어 원어로는 phantom pain이라고 하며, 손가락이나 팔, 다리 등이 (사고 등으로) 잘려나갔는데도 여전히 그 부분에 아픔을 느끼는 현상을 뜻합니다. 물론 고통이란 실제로도 팔다리가 느끼는 게 아니라 뇌가 그리 느끼는 것이지만,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limb에 대해 아픔이 느껴진다는 게 어쨌든신기한 일입니다. 내 팔다리란 그만큼 나한테 소중했기에 없어도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기이하게도 이게 저 데카르트적 의미에서 "연장"과도 통합니다.

바움가트너 교수에게 아내의 부재는, 잘려나간 손가락이 두뇌에 보내는 환지통과도 같으며, 교수에게는 여전히 아내가 곁에 있는 셈이기에 이걸 환상이라 부를 수도 없습니다. 역시 똑똑하신 지성인이라서 배우자의 사별로 인한 아픔도 대단히 형이상학적으로 체험하고 또 표현하시는 것 같습니다. 최고 수준의 은유적 적합성(p68)입니다. 농담이고, 소설 전반을 꿰뚫는 슬픔과 허무함은 어지간히 무딘 독자의 마음에도 환지통을 전염, 전파하기에 충분할 만큼 절절합니다. 폴 오스터 특유의 문체의 힘이며 공교롭게도 이 소설이 그의 유작이기에 더욱 페이소스의 농도가 짙습니다.

시모어 티쿰셰 바움가트너. Baumgartner라는 독일계 이름을 쓰지만 사실 할아버지는 폴란드 사람이었으며 부친 야코프(제이컵)가 아메리카에 발을 디뎠을 때 고작 여섯 살이었다고 p153에 나옵니다. 아버지는 그리 넉넉하지 못한 환경에서 살아왔고, 바움가트너 교수 역시 밀턴 프라이버그 등 진보 성향 일색인 교우관계에 싸였던 인생이었습니다. 미국에도 진보주의자들은 특히 교육 받은 이들 중에 많았으며 1939년의 독소 불가침 조약은 그들에게 어지간히 충격을 주었나 봅니다. 1950년대 매카시즘은 그들의 삶에 직접 피해를 안기기도 했습니다.

미국인 기준으로도 170cm의 키는, 더군다나 1940년대라면 여성에게 작은 키가 아닙니다. 1960년대를 풍미한 여배우 오드리 헵번도 당시에 장신이라고 했는데 저 정도입니다. 애나는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잘했고 힘도 세었던 편이지만 2차 성징이 나타나고 호르몬이 제대로 작용한 후 비교도 안 될 만큼 근육량이 늘고 강해진 남자 아이들과는 더 이상 경쟁할 수 없습니다. p46을 보면 "주제를 모르고 감히" 남자들과 육체적으로 경쟁하려 나선 애나가 잔인하게 조롱당하는 장면이 있는데, 정영목 선생이 역주에서 설명하는 대로 bite the dust는 쓰디쓴 좌절을 가리키는 관용 표현입니다. 그룹 퀸의 노래 제목도 있었죠.

하지만 프라이버그가 스페인 내전 당시 의용군에 들어가 파시스트 돼지들을 박살내려 들고 악마와 손을 잡은 스탈린을 바로 손절쳤듯이, 이들(애나의 첫사랑인 프랭키 보일도 포함)은 대체 마르크스적인 기계의 법칙과 그리 잘 맞는 심성들이 아니었습니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육신의 소중함을 알면서도 기꺼이 대의를 위해 희생하려 들기도 했죠. 그들은 본래 사람 됨됨이들이 그랬던 것입니다.

가스 검침원 에드에게 "그냥 사이라고 부르세요."라고 할 때(p15) 바움가트너 교수는 참 소탈해 보입니다. 시모어가 어떻게 Sy(사이)로 줄여지는지 이상할 수 있으나 Seymour Tecumseh Baumgartner라는 원 철자를 보면 납득이 될 것입니다. 가스 검침원은 우스꽝스럽게 긴 그리스식 성씨를 부끄러워하고 교수는 시모어가 촌스럽다고 생각하지만(이 이름은 양성적입니다), 사실 독자인 제게는 티쿰셰가 더 눈에 띄었습니다. 인디언 추장의 저 이름을 이상하게도 미국 백인들은 좋아합니다(제각각의 이유에서). 교수는 가스 검침원이 자기 이름을 잘못 읽었을 때 난도질당하는 느낌이었다지만, 사실 Baumgartner는 작중에서 에드의 발음처럼 읽힐 가능성이 미국에서는 훨씬 크죠. 뭘 그 연세에 새삼스럽게요. p190에는 오스터(!)라는 이름이 스타니슬라프 유대인에게는 흔하다는 말도 나옵니다.

우리에게는 무엇이 소중합니까. 연장입니까, 아니면 그 이름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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