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미소
줄리앙 아란다 지음, 이재형 옮김 / 무소의뿔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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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자신의 인생이 큰 고비를 맞을 때마다 누군가가 다가서서 따뜻한 미소를 지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 게 어디 있냐? 삶은 본래 고난의 연속이요, 각자가 알아서 헤쳐 나가야지."라고 퉁명스레 내뱉는다면, 물론 말이야 맞는 말이겠으나 그 사람 본인은 참 각박하고 여유 없으며 이미 황폐화한 삶을 사는가 보다 하고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암만 맞는 말이라 해도 우리는 일일이 입 밖에 내어 그 불쾌한 진실을 재확인할 만큼, 필사적으로 스스로의 기분을 망치려 들 만큼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자기 기분만 망칠 뿐 아니라 남들 비위까지 상하게 하는 민폐입니다. 이런 걸 모른다면 이미 "망쳐질 기분"조차 스스로 없애버린 답 없는 인생이며, 이런 사람이 남과 함께 사는 법이야 당연히 알 리가 없습니다.

소년(소설 중후반부로 가면서 청년, 장년으로 성장합니다만) 폴 베르튄은 아주 평범한 프랑스 시골에서 태어났습니다. 평범하다는 건 평범한 사람들만큼의 행복을 누리고 자라났다는 게 아니라, 그 시절 평범한 프랑스 농민들처럼 고되고 희망 없는 삶을 살 뻔한 처지였다는 뜻입니다. 농촌 생활이란 일이 몹시 고될 뿐 아니라, 농업이라는 저부가가치 산업의 본질적 속성 때문에 중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손에 쥔 재산은 그것대로 적은, 빈곤과 고통의 악순환에 갇힌 절망의 생으로, 이 소설 속에서는 묘사됩니다. 프랑스는 중세 이래 풍요로운 1차 산업의 소출로 왕성한 국부를 누린 나라라서, 다른 곳은 몰라도 프랑스의 농촌만큼은 각별한 낭만이 있을 줄 착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1789년 대혁명 당시에도 농민들의 삶은 그저 목숨만 간신히 붙어 있었을 뿐, 천대와 멸시와 중노동의 고통으로 점철된 지옥상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비교적 젊은 작가님의 작품이라서, 이런 분들의 데뷔작이 흔히 그렇듯 자전적 사연 아닐까 짐작했는데 전혀 아니었습니다. 1인칭 주인공 폴 베르튄은 1930년대에 태어나 성장기 주요 국면에 나치 독일의 침략이라는 큰 트라우마를 겪었고, 이 과정에서 아버지를 잃습니다. 농촌의 가장들이 종종 그렇듯 책임과 의무는 다하지 않으면서 불쌍한 식구들 위에 폭군처럼 군림하려는 욕구만큼은 무척 강한데, 소년 폴 베르튄은 부친의 죽음을 보며 오히려 (죄의식 가득한) 해방감을 느끼는 걸로 표현됩니다. 하지만 우리 독자들은 그의 "해석,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사태를 객관적으로 재구성할 필요도 있는데, 소년 폴에게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지만 그의 증언과 고백이 모두 객관적 사실과 일치하지만는 않을 겁니다. 마을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죠. "나치놈들에게 용감히 대들다가 목숨을 잃은 거야." 폴은 냉소적으로 받아들입니다만 우리 독자들이 꼭 (어린)폴의 판단에 전적으로 따를 필요는 없을 겁니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지만 가세는 여전히 어렵고 폭군의 자리는 맏형 "자끄"가 바로 계승하니 폴은 여전히 행복을 못 누리는 처지입니다. 이 젊은 폭군 자끄에 대해서는 딱히 옹호할 여지를 저도 못 찾겠습니다. 아버지는 어쩌면 나약한 몽상가 기질만 다분한 막내 폴이 딱하게 여겨져 "저런 식으로는 이 거친 세상 못 살아나간다. 현실의 한계가 빤한데 나라도 가슴 아프지만 독한 심성을 길러줘야 하지 않겠는가" 같은 걱정에서 폴을 그리 가혹하게 대했는지도 모릅니다. 허나 자끄는 자기 부친에게서 나쁜 본만 받았을 뿐, 어린 형제들을 배려하는 마음씀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영리한 폴과 정치적 타협을 시도하는가 하면, "네놈의 그 악마 같은 미소가 너무 싫어! 네 그 미소가 아버지를 죽인 거야!" 같은 황당한 반응도 드러냅니다.

폴 스스로는 자각 못 하지만 남이 보기에 그는 미소가 참 아름다운 소년인 듯합니다. 이 미소는 애정 가득한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고, 어려서부터 그를 지켜 봐 온 달님(그저 la lune이란 일반명사일 뿐인데, 소년 폴은 Lalune이란 이름을 지닌 인격체처럼 받아들입니다)이 더 다사로이 보듬었고, 조금 더 커서는 이웃집 소녀 마틸드를 짝사랑하면서 한층 깊이를 더한 자질, 매력입니다. 폴은 국가가 지운 병역의무를 다하기 위해 몸을 담게 된 군대에서 "제2의 자끄"라 할 부대장을 만나는데, 양차 대전의 PTSD 때문에 좀 정신이 나간 폭군형 관리자입니다. 이 부대장이 미친 듯 발악하며 폴도 구타하고 나중에는 폴의 친구(군대 동기) 장까지 때리는데, 광기의 발작인 터라 정말 무방비상태의 장을 죽기 직전까지 폭행합니다. 이때 폴은 (어디서 그런 주변머리가 생겼나 싶게) 기지를 발휘하여 뒤에서 부대장을 가격하여 기절시키는데(ㅋㅋ), 책임을 추궁받을 게 뻔하다고 생각이 미치자 폴 자신도 바닥에 드러누워 불의의 사고나 당한 듯 연극을 합니다. 이 미친 부대장이 처음에 폴을 찍어놓고 괴롭힌 것도 "그 미소"가 싫어서였다고 하니, 악마에게 혼을 빼앗기고 폭력에 찌든 불쌍한 인간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우리는 눈치챌 수 있습니다.

상급 책임자가 나서서 폴에게 경위를 묻습니다. 위생병은 폴, 장, 부대장을 후송할 때 폴 역시 부상을 당한 게 확실하다고 오판을 했고, 책임자 역시 이 정직해 보이는 청년이 거짓말을 할 리 없다고 여깁니다.

"자네는 좋은 사람처럼 보이는군. 허나 명심하게. 여기는 좋은 사람을 반기는 곳이 아니야."

"여기"는 물론 병영이겠지만, 어디 좋은 사람을 반기지 않는 곳이 군대뿐이겠습니까. 세상 전체가 다 마찬가지죠. 핍박받고 가난할 뿐 마음은 선량한 사람들이 모인 듯했던 농촌도, 알고 보면 얼마나 큰 악의와 광기가 지배하는 곳이었습니까. 나치가 하루아침에 패망하자 악귀처럼 돌변하여 패잔병들을 농민들이 린치하던 모습을 폴은 생생히 기억합니다(아 물론, 독일군 병사들도 못된 짓 많이 한 걸로 나옵니다. 폴의 아버지도 그 과정에서 후유증으로 죽었고요. 하지만 악을 악으로 갚는 순간 놈들과 똑같은 인간이 되는 거죠). 복수라는 허울 좋은 핑계를 걸고 자신의 추악한 광기 해소에 기회를 악용하던 그 농민들의 모습. 린치 중에 죽어가던 독일군 장교 중에는 (규율을 어기고) 폴의 생명을 살려 준 인정 많은 (어느 소녀의) 아버지, 한 집안의 가장도 있었습니다. 마틸드를 짝사랑하는 폴의 모습이 안타까워, 혹은 이렇게 괜찮은 녀석이 내 딸도 지극정성으로 사랑해 줬으면 좋겠다고 여겨, 폴에게 그런 호의를 베풀지 않았을까요. 사람이 가장 초라해지는 건 자신의 은인에게 합당한 보답을 못 하고 현실에 굴복할 때입니다. 폴은 그 독일군 장교 아저씨(얼굴도 모르는 카트린의 아버지)가 린치를 당하고 죽을 때 아무 도움도 못 준 걸 평생의 수치로 간직합니다.

멀쩡한 부인을 놔두고 정부와 바람을 피우려 도피하는 남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누구나 그 무책임한 남편을 손쉽게 비난할 수 있습니다. 허나 어느 선장님은, 나중에 추궁(?)하던 폴에게 이렇게 변명하는군요.

"나는 내 아내에게서, 모든 순수함을 잃고 삶의 비천한 질곡만을 몸에 감고 다니는 어느 늙은이, 곧 나 자신을 보았네, 하지만 그녀(정부)에게서는 삼십 년 전 순수했던 젊은이의 풋풋한 희망을 보게 된다고. 자네가 나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나? 인생이 그리 단순하게 선악이 재단되는 과정 같나?"

이 말에 이상하게 진한 공감이 되더군요. 물론 아내를 그리도 메마르고 황폐한 존재로 만든 장본인은, 바로 "고생을 시킨 못난 남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늙고 지친 선장님의 "도피"도 뭔가 사람 마음을 짠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젊은 폴은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튼 도피를 도와 준 대가로 그의 배에 "아무 경험도 없는" 풋내기인 자신을 고용해 줄 걸 요구합니다. 이 선장은 황당해하지만, 청년 폴에게서 30년 전 풋풋했던 자신의 이상과 순정을 발견하고, 이후 폴이 벌이는 갖가지 무모한 짓에 "다시 젊어진 마음으로" 신나게 가담까지 합니다. 물론 폴이 띠는 "마법의 미소"도 큰 몫을 했겠지요.

세상사 풍파가 아무리 인생을 높은 파고에 몰아넣어도, 하늘 위에 두둥실 떠 만인의 삶과 일천 가닥 실개천에 두루 따스한 미소를 불어넣는 달님이 있기에, 우리는 세상에 아직 희망이 남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달님의 미소를 밤하늘로부터 받아 각박한 세상에 뿌리고 다니며 "아직 여기, 살만한 곳임"을 두루 깨닫게 하는 폴 같은 사람이 있기에, 우리는 연대와 악수와 포옹이 먼 달나라 이야기만은 아님을 다시 확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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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8-01-04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쟁을 겪은 세대들의 작품은 언제나 절절한 치열함이 있었어요. 생각의 막을 깨는 경험이었던 거 같았죠. 인간이 성장하는 큰 도약판이기도 했겠지요. 그 성장이 긍정적 결과와 정립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빙혈님, 2018년에도 건강히 즐거운 독서 생활 꾸려 나가시길요/

빙혈 2018-01-04 21:04   좋아요 1 | URL
옳은 말씀이십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치열함 끝에 부쩍 자란 정신의 키로, 더 순수해지고 더 이웃과 가족에 정직해지려는 영혼의 뭄부림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AgalmA님도 새해에 하시는 일 모두 잘 풀리시고 원하시는 성과 모두 이루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