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키퍼스 와이프
다이앤 애커먼 지음, 강혜정 옮김 / 나무옆의자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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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구약에 보면 노아의 방주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급박한 상황에서 사람의 이기적인 생존만을 도모한 게 아니라, 식용에 직접 기여도 못 하는 각양각색의 동물들까지 모두 큰 배에 싣고 "종 다양성"이라도 수호하겠다는 양 사명감에 불타는 노아의 모습은 현대인에게까지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합니다. 우리가 동물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그것이 우리 인간의 본성 일부이기도 하지만, 그를 넘어 "동물에게도 연대 의식을 가짐으로써, 인간에 대한 근원적 애착과 존엄을 더욱 다지게 한다"는 목적이 더 크게 작용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폴란드에 본래부터 유대인들이 많이 살기는 했습니다만, 이 책의 주인공 얀과 안토니나 부부는 유대 혈통은 아니었습니다. 부유하고 명성 높은 가문 출신이었고, 나이도 아직 젊었던 터라 조국 폴란드가 언제나 외세로부터 든든히 독립해 왔던 양 긍지와 애국심도 대단했죠. 이민족의 탱크와 폭격기가 강토를 짓밟고, "슈, 슈 하는 거친 치찰음과 낯선 말투, 어휘가 내가 살던 고장을 가득 메울 줄은" 전혀 짐작 못 했던, 외국의 침략은 역사 교과서에나 나왔던 일일 뿐 나와 내 이웃에게 실제로 닥칠 줄이야 꿈에도 몰랐던, 그저 선량하고 자신의 일상을 충실히만 살아 오던 이들이었습니다.

얀과 안토니나는 진심으로 동물을 사랑하며, 자신이 돌보던 동물들에게 세심한 주의를 베풀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일생을 두고 가꾸던 동물원은, 1939년 9월 1일 나치가 국제법이란 깡그리 무시하고 폴란드의 국경을 무단히 넘음으로써 처참히 망가졌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동물들 역시, 여태 평화로이 거주하던 터전이 철저히 파괴되고, 생전 겪어 보지 못하던 혼란과 결핍, 굶주림에 시달리며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우리는 이상하게도, 전쟁통에 피난 행렬을 떠나는 난민들에 대해서는 무심히 눈길을 주는 데에 그치지만(지금도 진행형의 현실 아닙니까? 아프리카 각국이나 시리아 같은 데서요), 난데없이 폭격을 받은 동물원 안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공황 상태에 빠진 동물들을 놓고는 그 상상 만으로도 측은함이 솟습니다. 어떤 사람은 동정을 베푸는 듯하면서, 경멸감과 쾌감까지 드러나며 빈곤과 전쟁의 참상을 비웃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나치나 공산주의 잔당처럼이나 비뚤어지고 타락한 심성의 소유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도 자기 감정을 다룰 때는 추한 눈물을 지어가며 자기 연민에 빠지죠. 싸이코패스보다 몇 배는 더 저질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얀과 안토니나의 조국은 무참하게 짓밟혔습니다. 히틀러는 참으로 가증스럽게도, 명시적으로 "폴란드의 문화, 인종, 관습, 이익 등 모든 것을 철저히, 서서히 말살하라."고 명령까지 내렸다고 합니다. 자기 일을 무리하게 추진하려다 부수 피해를 입힌 것도 아니고(설령 그랬다 해도 용서가 안 되지만), "레벤스라움"을 마련하려고 처음부터 작정을 하고선 제노사이드를 획책했다니 이런 나쁜 놈이 또 어디 있습니까.

저자는 다분히 풍자적으로, 히틀러가 노린 건 "사람의 레벤스라움"뿐이 아니라, 동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그의 미친 순혈주의는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식물 종에 대해서도 같이 적용되었는데, 이런 걸 보면 무지하고 비뚤어진 인간의 광신이, 어느 정도까지나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자신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불쌍한 보르수니오!" 가족 같던 어린 것이 겁에 질려 문 앞에서 애원했을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아팠다.(p74:1) 가업을 동물원 경영으로 삼고 사람보다 더 자주, 더 속 깊게, 동물들과 소통했을 자빈스키 부부가 꼭 아니라도, 우리 독자들 역시, 갑자기 하늘에서 날벼락을 맞고 이러저리 분주히 뛰어다니며 생존을 도모했을 동물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찡해지죠. 상상만으로도 너무 불쌍합니다. 혹시 동물들도 궁지에 몰려 다 죽어가는 인간을 보면, 자신의 생존에 어느 정도 여유가 확보된 후라면, 도와 주고 싶은 마음이 들까요?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냉정하게 그런 사정을 주판알 굴려 가며 계산한 후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불쌍하니까 도와 주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가 "인간임"을 확인합니다. 자, 그리고, 이제 다시 히틀러가, 유대인, 집시, 불구자 등에게 무슨 만행을 저질렀는지 떠올려 보십시다.

루츠 헤크는 이 논픽션 저작 속에서 양가적인 성격을 띤 인물입니다. 물론 독자에 따라 "생각할 여지도 베풀 필요 없는, 또하나의 극악무도한 나치"로 여겨도 무방합니다. 저자도, 또 자빈스키 부부도, 그 판단을 크게 다르지 않게 내립니다. 여튼 이 논픽션은 꽤 공정하기에, 그의 외견상 신사적이고 품위 있는 처신(속에 무엇이 들었든 간에)까지도 상세히, 또 인상적으로 묘사합니다. 아이히만이나 히믈러, 괴링 같은 자들도 취향은 꽤 고상하고, 반려동물을 특히나 아끼고 사랑하는 면모를 보인 이들이었음을 고려하면, 이 헤크란 자의 다분히 모순적인 개성은 그리 놀랍다거나 충격적인 것도 아닙니다. (숨은 동기로는, 이 서평 저 위에서 언급한 대로, "게르만 동물의 레벤스라움"을 마련할 작정이었다는 걸 저자가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저자의 연구는 참으로 폭 넓어서, 식민주의자들의 공통 습성 중 하나가 새로이 식민한 지역에 기존 거주지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이식하고 싶어한다는 것도 날카롭게 짚습니다) 자빈스키 부부는 유대인도 아니고, 해당 지역에서 오랜 시간 기반을 다지며 풍족한 생활을 영위한 계급이기에, 헤크는 "같은 중산 계급의 동질감"으로 이들을 정중하게 대우합니다. 일단은요.

민간어원설에 불과하겠지만 폴란드라는 나라 이름이 히브리어로 "포 린", 즉 여기서 쉬라(이 책 p22 중간쯤)는 뜻과 통해서 아슈케나짐 유대인들이 이 지역에 광범위하게 거주했다는 이야기가 전할 만큼, 폴란드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히틀러에게는 가뜩이나, 독일인의 거주 공간을 침훼하고 드는 슬라브인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차에, 유대인들까지 바글바글하니 얼마나 못된 침략 야욕을 합리화하기에 좋은 여건이었겠습니까.

"지엔 도브리!" 폴란드는 제법 떨어진 프랑스의 문물 영향도 폭 넓게 받았지만(유럽에서 안 그랬던 국가가 없긴 하지만요), 기본적으로는 슬라브 민족이기에 러시아 문화와 닮은 점이 꽤나 많습니다. 이 책 저자는 "독일"에 대해 그처럼이나 오랜 기간 동안 침략당하고, 점령되고, 무시, 능멸당한 역사를 언급합니다만, 사실 폴란드를 직접적으로, 더 자주, 더 길게 괴롭힌 건 당연히 러시아입니다. 저 인삿말도, "도브리 지엔(디엔)!"이란 러시아어 인사와 어순만 차이 날 뿐 거의 같은 구성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레지스탕스라고 하면 비시 정부와 나치 직접 통치 지역에서의 프랑스에서 이뤄진 저항 활동만 압니다. 그러나 이 책은, 폴란드인들이 나치에게 야만적인 기습 침략을 당한 후 생활 터전이 초토화한 후에도, 얼마나 치밀하고 효율적으로 사보타지, 소규모 공격, 정보망 가동, 위조 증명서 발급 등으로 후방에서 나치를 괴롭혔는지 자세히 묘사합니다. 폴란드 레지스탕스가 이토록 영웅적인 활약을 펼친 줄 소상히 확인하는 것도 책을 읽는 큰 재미와 보람 중 하나였습니다. 세계 역사가 이런 줄기찬 노력을 너무 과소평가해 온 듯하고요. 폴란드는 1980년대 레흐 바웬사의 자유 노조 운동을 통해 공산주의의 압제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저항을 벌였습니다. 이런 노력이 아니었다면 1990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는 일은 없었거나, 훨씬 늦게 일어났을 겁니다. 2차 대전사를 읽다 보면 폴란드 망명 정부(김광균 시인의 <추일 서정> 중 어느 구절 때문에 친숙하기도 하죠)의 분투, 영국군에 조력하며 펼친 활약이 지나치게 폄하, 푸대접 받는 대목에서 분개하기도 했는데, 이 책을 읽고 그런 사항들이 더 단단한 맥락을 갖추게도 되었습니다.

유대인들 사이에선 지금도 바그너의 곡들을 공개장소에서 연주하는 게 금기시된다고 합니다. 사실 독일은 인류 문명 창달에 기여한 바가 너무도 큰, 뚜렷한 문화 민족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이 부부가 급박한 상황에서 "독일인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p361 중간쯤)"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독일어로는 슈텐트헨. 도이치넘버 889)"를 연주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 곡은 아주 고품격의 클래식이라기보단 (너무 자주 들어서 그런지) 민요처럼 궁상맞은 느낌도 없지 않은데, 여튼 정치와는 전혀 무관한 순수 예술 작품도 이처럼 후손들의 실책과 과오에 따라 흉측한 빛깔이 덧씌워지는 건 참 안타깝죠.

자빈스키 부부의 영웅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몇몇 동료는 게슈타포에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고, 두 열강의 싸움판 가운데에 끼어 피해를 입는가 하면, 마침내 소련군의 진주에 의해 이뤄진 바르샤바 해방은 진정한 해방도 아니었습니다. 책에 자세히 서술된 대로, 독일인들은 폴란드인에게 너무도 낯설게 들리는 이방의 어휘, 언어를 구사하며 나치 군의 행진에 뒤이어 "살 터전(레벤스라움)"을 찾아 몰려와선, 이곳저곳에서 식민지를 일구고 살려 들었습니다. 강점기에 일인들이 보였던 행태와 비슷하죠. 이러던 게, 소련의 진주와 함께 썰물처럼 휩쓸려 나가고, 구 동프로이센이나 오데르 나이세 동안(東岸) 같은, 전통적인 독일인 거주지 일부에서조차 독일인들이 대거 쫓겨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 땅은 폴란드에 고스란히 귀속되었으나, 소련은 대신 폴란드 동부 영토를 집어삼켰는데, 소련은 폴란드의 민족 감정을 철저히 억누르고 탄압했습니다.

"감히 전쟁(2차 대전 발발, 나치 침략) 전의 독립을 찬양하거나, 독립을 되찾기 위해 봉기에 참여하여 싸웠던 이들을 영웅시하는 행위는, 반동적이고 어처구니없는 것으로 위험시되었다(p391에서 재인용)..." 자신의 의지와 주견을 자유롭게 펴면서 살 수 없는 어떠한 개인, 집단, 민족도, 마치 야생의 본능을 억압당하며 동물원에 갇혀 박제된 생을 연명하는 신세와 다를 바 없음을, 이 책은 예외적이고 온정적이며 정의로웠던 개인들의 실제 삶을 통해 잘 보여줍니다. 왜 우리는 자빈스키 부부의 사연을 지금에서야 알게 된 걸까요? 억압자 소련과 사실상 타협, 공모하여 약소 민족의 명예와 권익을 무시한 미국의 의도 때문이라고 해도 그리 과장이 아닙니다. 우리 역시 제국주의 세력의 야욕과 만행 때문에 크나큰 상처를 입은 처지이기에, 이런 슬픈 역사를 접하고 얻는 감회가 더욱 남다를 수밖에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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