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보혈의 능력 세계기독교고전 29
앤드류 머레이 지음, 원광연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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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 있어 어떤 영성의 문제는, 말하는 사람의 문맥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텍스트를 읽을 때 정보의 이해와 취합에 중점을 둘 때도 있고, 줄글 전체를 관통하는 어떤 박력, 영감, 호소력 등을 느껴 가며 읽을 때도 있습니다. 후자는 독서라기보다 모종의 감동적인 연설을 들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죠. 종교적 감화와는 직접 관련이 없지만 예컨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1963년 링컨 메모리얼에서 행한 "I have a dream." 같은 연설을 들어 보면 (그 유명한) Free at last 대목에서 연사의 고음이 파르르 떨리는 느낌이 듣는이에게 그대로 전해지며 전율이 느껴지는 체험을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영감, 영성"이 가득 채워진 채 쓰여진 글을 읽을 때도 이와 같습니다.

신구교 막론하고 기독교 신학 서적은 읽고 이해하기에 꽤 어려운 편입니다. 그나마 한국어로 옮겨진 책은 역자들의 노력, 즉 의역, 개념의 세분화와 재정립을 거치기 때문에 낫고, 영어로 쓰여졌거나 한 텍스트는 각각의 단어가 통상의 의미와는 너무도 다른 용례(usage)를 지니기 때문에 독자는 마치 바다에 빠져 표류하는 듯합니다. 하긴 신학뿐 아니라 법학, 영문학, 정치외교학 등 모든 분야의 jargon이 다 마찬가지이긴 합니다만.

그런데 정말 영감, 영성에 가득 휩싸인 저자가 쓴 책은, 설령 개별 어휘가 난해하거나 낯설망정 전체 맥락이 부분을 이끌고 가는 힘이 있기에, 독자의 교육 수준을 불문하고 결론적으로 얻는 감동의 레벨이 같아진다는 효과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 책 본문 중에도 그런 말이 나오지만, "... 어리석고 미개한 토인들에게 신앙을 전파한다는 게 무슨 소용인가?" 라든가, 그런 시도를 한 선교사들에게 "파송받지 아니한 자" 등으로 매도하는 태도는, 회개와 구원의 보편성을 부정하는, 어찌 보면 반(反) 그리스도적 성향인지도 모릅니다.

저자는 마치 이런 편견에 가득찬 이들을 깨우치고 교화하려는 모범을 보이려는 듯, 글 전체의 고유의 생동감과 경건함, 참된 각성의 교훈이 넘치는 이런 멋진 저작으로, 구원과 감화와 거듭남에 유-무식의 조건 차이가 있을 수 없음을 독자들에게 납득시킵니다. 마치 신라의 원효 대사가, 무지한 중생에게 "나무아미타불만 읊어도 극락 왕생할 수 있음"을 강론한 사실과도 흡사하죠. 연단에 서서(혹은 명저를 저술하여) 무리를 깨우치는 지도자의 덕성과 인품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말이나 글이 멋져서가 아니라, 그 사람됨됨이의 힘이 이만큼이나 강력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 모든 감동의 원천이, 예수의 희생과 대속을 은총으로 깨닫는 그 순간에 있다고 하며, 그 상징이자 실천적 징표가 바로 "보혈"입니다.

대표적인 복음주의 신학자, 설교자였던 앤드류 머레이(Murray. 이하 이 책의 표기를 따릅니다)의 이 감동적인 강좌는, 본디 네덜란드인이었고, 당대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가장 뚜렷한 지도자격 인물이었습니다. 본디 네덜란드어로 쓰였던 원본을 그의 동료 윌리엄 더글라스 목사가 영어로 옮겼고, 이 책은 그 영어 번역본을 다시 한국어로 옮긴 텍스트이기에 1권, 2권 모두에 그 사정을 반영하는 서문이 실려 있는 것입니다. 영성과 감동에 충만한 텍스트는, 여러 차례 번역을 거친 후에도 여전히 그 박력이 남아 있음이 신묘할 뿐입니다.

"보혈"은 보배 보(寶), 피 혈(血) 자를 써서 보혈이라고 합니다. 보배로운 피라는 뜻인데, 구교 신앙 가진 분들은 "성혈"이란 말을 더 자주 접했겠는데, 깊이 들어가면 좀 다른 의미로 분화됩니다. Sanguis Pretiosissimus(가장 값비싼 피. 뒤에서부터 해석합니다)라고 라틴어로 개념화한 걸 각국어로 옮기면서, 영어로는 Precious Blood라고 부르게 됩니다. "성스럽다고 하면 될 것을 왜 물질적, 세속적 뉘앙스의 보배롭다는 말을 쓰는가?" 그에는 이유가 있고, 이 책이 간접적으로 그 의문을 상세히, 후련하게 풀어 주기도 합니다.

저자의 논지는 일단, 이 세상은 악이 지배하는, 사탄의 권세가 만연한 곳이라는 전제에서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1장에도 그런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언제나 어둠이 지상을 감싸 왔지만, 어둠이 빛을 이긴 적은 없었다." 이기지는 못해도 무력하고 죄 많은 인간들을 짓눌러 온 건 악이고 사탄입니다. 신은 그런 불쌍한 우리들에게, 자유의지와 회개를 통해 죄를 씻고 스스로의 힘으로 악을 이긴 다음 천국에 들 것을 말하는 것이겠고 말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영(靈)과 육(肉)으로 이뤄졌습니다. 이 중 본체는 영적인 부분이며, 육은 우리를 타락과 죄악으로 이끄는 악의 근원입니다.맨날 교회 가고 성당 다니면서 열심인 척 해도, 주일 예배나 미사를 마치고 나와서는 문란하고 추접스러운 색(色)의 행각에 빠진다거나, 그나마 목적도 달성 못 한 채 마음만 더럽히는 한심한 인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 성당 다니는 목적은 그저 돈 많이 벌게 해 주십시오, 대학 붙게 해 주십시오 같은 푸닥거리, 더러운 기복 신앙 욕구를 채우는 게 다입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마치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내려와 대중에게 불벼락을 내리고 갈라진 대지의 틈 사이에서 영원한 고통에 빠지게 했듯, 복은 고사하고 천벌이나 떨어져야 맞습니다. 신앙을 가졌다면서 이런 육적인 욕구에 끌려 입으로 몸으로 더 큰 죄를 짓는 자들에게, 앤드류 머레이는 "왜 예수가 지상까지 내려와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가장 처참한 고통과 굴욕을 겪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라고 준열한 설교를 베풉니다. 이어 그는 교회가 영을 멀리하고 육의 방향으로 타락한 샛길을 걸음으로써 대대적인 개혁이 벌어졌던 지난 역사를 거론합니다.

"보혈"의 원어에서 Pretiosissimus가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저자 앤드류 머레이는 먼저 "사다"란 말의 의미를 곱씹어 보라고 합니다. 사는 건 값진 물건을 "대가를 치른 후" 내 것으로 만드는 행위를 말합니다. "치르다"는 말도, 꼭 물건값을 치른다는 뜻만 있는 게 아니라, 죗값을 치르다, 응보를 겪는다는 용례도 있습니다. 죄를 씻으려면 감옥에 가고, 매를 맞는 등의 고통만 겪는다고 끝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통회의 시간도 거쳐야 합니다.

로마인들이 무력을 앞세워 세상 곳곳을 정복하며 저지른 악행만 악행이 아닙니다. 유대인들 역시, 입으로 행위로 무수히 많은 죄를 짓고, 동족을 못살게 굴고, 율법이라는 미명을 앞세워 사실상 신성 모독을 범했습니다. 지상을 가득 채운 인간의 무리가 저지른 악행이 그 수위를 넘게 되자, 신은 드디어 자신의 "아들"을 보내되, 죄의 대가는 그 죄를 저지른 인간들이 아닌, 아들이 대신 치르게 함으로써 못난 인간들을 전율케 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예전 훌륭한 스승들이 제자에게 회초리를 쥐어 주며, "내가 너희를 잘못 가르친 탓이니 나를 쳐라"고 했던 미담과도 맥이 닿는 것입니다. 예수의 육신이 그토록 큰 고통을 겪은 건, 자신이 모범을 보임으로써 "이처럼이나 육신이 아무 의미도 없는 짐덩어리에 지나지 않음"을 깨우치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대속과 구원의 효과를 "피"로 압축한 것입니다. 이 "보혈"은, 뭇 인간의 죄를 씻되 뭇 인간(=죄인들)의 피가 아닌, 오히려 가장 죄없고 가장 귀한 아드님의 피로 죗값을 대신 치렀다는 뜻에서, "가장 값비싼 피"가 되는 것입니다. 이 뜻을 모르고 백날천날 교회, 성당에 가서 복을 빈들, 예수의 상처에 손가락을 넣고 소금을 뿌리고 침을 뱉는 더 큰 죄를 지음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책은 두 저서의 합본 1책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반부는 제1권 "예수의 보혈의 능력"이요, 후반부는 제2권 "십자가의 보혈"입니다. 1권의 서문은 앤드류 머레이의 아들 M E 머레이가 서문을 썼으며, 2권은 이 책 전체의 번역자인 더글라스 목사의 서문이 내용을 이끕니다. 예수의 피로 씻김을 받고 자신이 저지른 죄를 통렬히 뉘우치는 영혼이라야, 선택받은 자로서 천국에 비로소 들 수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죄의식이 없고 모고해를 버릇처럼 일삼는 자는 지옥의 가장 깊은 불구덩이에 빠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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