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심보감 - 자기 성찰의 고전 명역고전 시리즈
범립본 지음, 김원중 옮김 / 휴머니스트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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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보감은 범립본의 편역서이며, 저자명의에 대해서도 여러 논란이 있기에 한마디로 정리하기가 아직은 어려운 상황입니다. 요즘 나오는 책들은 대개가 고려인 추적(秋適)의 명의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문헌적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오히려 명나라 사람 범립본을 주(主) 저자로 내세우는데 여튼 이 입장이 현재 학계의 다수설입니다. 김원중 교수님이 옮긴 이 책도 같은 입장에 서 있습니다.

쉽게 요약하면 1) 범립본의 원저가 있고, 2) 조선에 수입된 후 이름 모를 어느 편집자가 그 원저 1)을 초략한 판본이 있으며 3) 2)에 내용을 좀 더 보강하고, 한국의 고사까지 첨부한 판본이 또 있습니다. 2)와 3)은 원본과는 많이 달라진 한국식 변형으로 볼 수 있는데, 여튼 우리 조상들 사이에 널리 읽히고 고전의 권위가 부여된 책은 3)이라고 봐야겠습니다.

이 책도 3)을 저본으로 삼고 번역한 것입니다. 추적의 명의를 주장하는 분들은 1) 이전에 다른 어떤 책이 있었다는 전제에서 펴는 주장입니다. 추적의 저술이 사실이든 아니든, <명심보감>은 중국보다는 한국에서 특별한 의의와 의미를 더 갖게 된 텍스트가 된 셈이죠. 어느 게 진실이건, <명심보감>은 그보다 더 (훨씬) 앞선 시기에 출현한 여러 원전들의 편집본입니다. 비록 범립본이 저자 명의라고 해도, 이후 많은 변형을 거친 (이름만 같을 뿐인 -역자 김원중 교수님도 이런 표현을 쓰십니다) "명심보감"은 이미 우리 한국인의 고전이라고 해도 과히 틀리지 않습니다. 김 교수님의 이 책은 올해 9월에 나온 개정판이며, 그간 강단에서 가르치던 내용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간행되었다는 취지를 역자께서 서문에서 직접 밝히고 있습니다.

전체를 개관하면 유교 윤리가 완전히 사회 일반의 도그마로 자리한 후에 저술되고, 큰 지지를 얻은 교본이므로 당연히 공맹의 사상이 주종을 이룹니다. 그러나 직접 이 책을 펼쳐 보시면 알 수 있듯, 노장 사상의 여러 고전도 출전으로 다양히 쓰이고 있습니다. 게다가, 명언의 서두에 "장자", "노자" 등으로 언명자를 분명히 밝히는 게 또 보통이니 더욱 의외죠. 노장 사상등 제자백가에 대해 마냥 백안시했으리라는 우리의 선입견을 깨고, 조상들은 "좋은 말씀이면 나의 윤리 준칙으로 삼기에 주저함이 없던" 열린 자세를 이미 지녔던 증거입니다.

이 책의 장점이라면, 본문의 엄정성에 대해서도 비교문헌적 교차검증을 통해, 분명한 오류라면 지적을 하는 태도입니다. 김원중 교수님은 각주를 통해, 예컨대 해당 문장의 출전으로 명시된 <장자> 등에는 정작 해당 구절이 안 보이고, 오히려 <논어>에 그 비슷한 취지를 담은 문장이 보인다는 날카로운 지적을 하십니다. 서양의 경우, 자신의 주장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권위자의 명의를 거짓으로 갖다 쓰는 관행이 고대, 중세에 널리 돌기는 했으나, 그 반대로, 사회에서 이미 중추적 훈육의 원리로 위상을 굳힌 유가의 출전을 굳이 바꾼 후, 오히려 이단시되던 비주류의 명의를 내세우는 경우는 극히 드물뿐더러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안 됩니다. 아마도 도가의 입장 중 일부를 유가식으로 교차 변용하던 태도의 흔적(이 역시, 고대부터 두 유파는 치열한 대립 못지 않게 상호 인정과 교류를 이뤘다는 점을 상기해야겠죠)이 아닐까 생각도 해 봤습니다.

<명심보감>은 워낙 고전이다 보니 저희 때에는 국어 교과서에 그 언해본이 일부 실리기도 했습니다. 다만 <명심보감>은 어디까지나 편집서적이다 보니, 그 출전은 반드시 가장 상위의 출전을 대는 게 보통이었죠. 수신서의 핵심이라 불러 마땅한 "효행"에 대해, 이 책은 <논어>에서 공자님의 여러 말씀을 인용합니다.

부모님이 살아 계시면 멀리 놀러가지 않고, 반드시 가는 방향이 (정해져) 있어야만 한다.

"유(遊)필유방"이란 말로도 요약되는 이 가르침은 각주에 나온 대로 <논어> 이인편이 그 출전입니다. 역자께서는 이 가르침이 전제하는 상황에 대해, "자식이 돌아오지 않아 문지방에 기대어 기다리는 부모님"을 들고 있습니다. 본문만 보면 알쏭달쏭해도, 이렇게 권위자의 해설을 곁들여 들으면 바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믿을 수 있는 번역본은 이처럼 든든한 스승과 같습니다.

옛 사람들의 훈육에 있어 또 하나 좋은 점은, 글공부를 하면서 동시에 인격 수양이 되는 텍스트 구조를 갖췄다는 것입니다. 글공부를 하는 교재에 "학문"에 대한 내용이 나오지 않으면 또 이상합니다. 송나라 황제들은 문치주의를 극구 강조했기에, 입만 떼었다 하면 "공부해서 출세하라"는 다짐입니다. 4차 산업혁명을 맞는 작금에도, 사람이 공부는 하지 않은 채 하늘에서 떨어진 창의력에만 기대어 일을 해 나갈 수는 없습니다. 텍스트의 성격과 범위가 달라졌을 뿐, 공부하고 수신해야 한다는 근본의 이치가 바뀔 리는 없죠.

"배운 사람은 벼와 같고, 배우지 않은 사람은 잡초와 같다.
벼와 같은 사람이여, 나라의 큰 양식이며 세상의 보배이도다.
잡초 같은 사람이여, 밭 가는 사람이 싫어하고 김매는 사람이 귀찮아하는구나.
뒷날에 담을 마주하듯 뉘우쳐도 이미 늦은 몸이로다."

못 배운 자가 제 열등감을 해소하려 남의 말을 끊임없이 베끼고 목청 높여 읊어 대어도, 어제 한 말이 다르고 오늘 하는 말이 표변하니 까마귀가 경우에 맞지 않게 울어대는 양 사람의 실소를 자아낼 뿐입니다. 사람이 열등감이 사무치면 정신병으로 바뀝니다. 자기가 무슨 소리를 떠드는지도 모른 채 구호를 떠드니, 날이 거듭할수록 정신이 혼미해지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때를 놓친 자의 설움과 한계는 이처럼 뿌리깊은 것입니다. 그를 넘어, 얼굴과 용모도 썩은 잡초처럼 변하니 무지렁이처럼 처박힌 벽지 밖에서는 아무도 반기지 않는 촌구석 흉물의 처량함이 이와 같습니다.

편집본이라고는 하나 모든 문장이 재인용된 것은 아니며, 아마도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을 뿐 저술 당시에는 원저가 분명 있었겠으나 여튼 현대인에겐 출전이 미상인 대목도 꽤 됩니다. 에컨대 다음과 같은 <省心>편의 한 구절입니다.

自信者人亦信之 吳越皆兄弟
自疑者人亦疑之 身外皆適國

이 구절은 대체 어느 책이 가장 앞선 시기에 실었는지 아직도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역자 김원중 교수님은 <열자>의 "의심암귀"를 유사한 문맥으로 거론하시긴 합니다. 도끼가 사라졌을 때는 이웃이 도둑처럼 보이더니, 막상 찾고나자 그저 잘 알던 얼굴 이상이 아니었다는 교훈이죠. 도끼가 만약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땠겠습니까? 재물이 행방을 감추고 아니고는 그저 우연한 사정에 지나지 않지만, 제 마음 속에 확신이 없어 모든 사정에 대해 근거 없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게 체질이 된 인간은, 이미 정신병 직전까지 갔다고 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도끼가 돌아와도 아마 "내가 전에 쓰던 진본이 아닌, 손잡이에 독극물이 묻은 가짜"라며 제 속을 끓일 것입니다.

윗 줄에서 "인"은 물론 타인을 뜻합니다. 저걸 간단한 문장으로 고치면 自信者, 亦信人 으로 바꿀 수 있죠. 말의 맛을 살리기 위해, 목적어를 앞으로 빼고 뒤에는 일종의 가목적어를 형식상 보충해 넣은 것입니다. 이처럼 한문 고전 공부는 그 깊은 속뜻을 새김과 아울러, 모든 문장의 격조 높은 공통 구조를 분석하는 재미가 쏠쏠하죠. 이래서 권위 있는 역자의 책은 항상 원문을 같이 싣는 게 원칙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한자 원문은 작은 폰트로 처리했는데, 일단 뜻만 익히고 제일독을 마치려는 독자의 편의를 위한 센스라서 좋았습니다. 이 텍스트가 이미 익숙한 분들은 대뜸 원문부터 읽어나가셔도 되겠고 말이죠.

"어진 사람이 재물이 많으면 지조를 더럽히게 되고,
어리석은 자가 재물이 많으면 허물을 더하게 된다."

이는 한나라 때 사람 疎廣의 말입니다. 결국 재물은 누구 손에도 지나치게 많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뜻인데,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말 "부자가 천국... 낙타가 바늘구멍... "을 연상케도 합니다. 천품이 어리석은 자는 그 가진 재물을 전부 자신의 허물을 덮는 데 낭비하고, 돈이 잘못 가르친 나쁜 버릇을 반성할 계기조차 마련하지 않아 구제불능으로 어리석어진다는 뜻도 됩니다. 가장 나쁜 건 돈도 없고 얼굴에 잡초만 무성히 늘려가며 어리석음을 폭력적으로 가중시키는 벽촌의 무지렁이 인생입니다. 돈이나 있으면 그나마 구제의 희미한 가능성이나 마련할 텐데 그조차도 여건이 안 되니, 졸부의 선심에나 애타는 기대를 걸 뿐인 가련한 신세이죠.

성심 하권에 보면 염계 선생, 즉 주돈이의 말이 나옵니다. "교언영색"이란 주지하듯 공자의 말씀인데, 주돈이는 이를 다소 변형한 언명으로 후학들을 깨우칩니다.

"소박한 자는 말이 없으며 편안하다."

재능과 수련은 부족하고 남 앞에 그 못난 꼴을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가득한 늙은 자는, 남이 듣고 싶어하지도 않는 비천한 신상의 넋두리를 일삼는 법입니다. 김원중 교수님께선 원문의 "拙者"를 옮김에 있어, 대체로 "拙"이 나쁜 뜻으로만 쓰이는 관행을 감안하여 "소박한 자"로 번역했다고 역주에서 밝힙니다. 이처럼 고전 한문의 용례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번역 과정에 베푸신 마음씀이 돋보입니다.

책의 후반부에는 우리나라의 고전 <삼국유사> 등에서 간추려 넣은 "손순매아"라든가, 바보 온달의 고사 등이 실려 있습니다. 대단원은 그 유명한 주희의 권학문입니다.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가 어렵다.

이는 마치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던 히포크라테스의 명언을 연상케도 합니다. 여기서 예술은 기예를 가리키는 말로서, 그 숨은 뜻을 살피자면 저 주희의 언명과 다를 바가 별로 없습니다. 어쩌면, 추적이 되었든 범립본이 되었든 인생 궁극의 가르침을 담은 명저 고전은 이처럼이나 천 년을 헤아리며 후대인에게 전하고, 이를 지은 분이든 애독하는 후학이든 백 년도 되지 못할 짧은 인생을, 미혹됨과 미망, 터무니없는 욕심 때문에 더럽히고 마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깊어가는 가을, 고대의 현인들께서 다정히 일러 주는 그윽한 가르침과 함께 알찬 시간을 보내게 도와 준 고마운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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