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섬니악 시티 - 뉴욕, 올리버 색스 그리고 나
빌 헤이스 지음, 이민아 옮김 / 알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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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에서는 나와 특별한 관계가 아니었던 누군가가 곁에서 죽었을 때도 "We lost him(her)."라고 말할 때가 잦습니다. 오래 내 주변에 간직해 오던 무엇인가를 잃었을 때도 우리는 좀처럼 상실감을 이기지 못하고 방황하곤 합니다. 하물며, 가족, 친구의 죽음이라면, 그 아픔과 충격은 짧은 시간 안에 극복하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 누구든 한 번은 겪어 봤을 텝니다. 감정적으로 깊은 교감을 나눠 왔고, 대부분의 경우 육체적 결합 관계까지 이뤘던 동반자(배우자는 말할 것도 없고요)를 혹 잃었다면, 그것도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채 갑작스러운 교통사고처럼 아픈 순간을 통한 상실이었다면, 이를 전혀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이라 해도 그 존재 차원의 충격에 대해 상상이 될 만합니다.

내용만 봤을 때 소설이 아닐까 착각할 수도 있을 서정적 문체의 이 책은 작가 빌 헤이즈의 개인 회상록입니다. 책 전체를 통틀어도 풀 네임이 한 번도 나오지 않고 그저 "스티브"라고만 불리었던, 17년 동안의 동반자를 잃고 그는 오랜 근거지인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뉴욕으로 이주합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런던에 한 번 들러 스티브의 유해를 강에 뿌린 후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갖습니다. 한 달 가까이 머문 이곳에서, 그는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사이 일종의 가교로 여길 택하고 활용한 듯합니다. (세 도시의 지리상 위치는 거꾸로지만)

"뉴욕에 잘 오셨습니다. 제가 한 잔 사죠."

로렌스 H 스테인, 변호사라는 이의 대접으로 입맛을 다시게 된 '파트론 테킬라'는 그런 서브장르가 따로 있는 술이 아니라 멕시코의 한 회사에서 개발, 판매하는 테킬라의 한 상표입니다. 스테인 변호사나 빌 헤이스 본인에게도 잘 어울리지는 않을 법한 묘한 선택입니다. 전 읽다가 처음에 나초 이야기하는 줄 착각했는데(묘하게도 이 역시 멕시칸 메뉴에 듭니다만), 그게 아니라 특히 이 작가님한테는 잘 받지도 않을 듯한 독한 술이어서 약간 의아했습니다.

"마이클 잭슨이 뭡니까?"
물론 나이 지긋한 분이라면 꼭 생전의 올리버 색스와 같이 세속과 절연된 생을 살지 않았다 해도 그가 누구인줄 모를 수도 있습니다. 누군지 모르는 이상 "누구"가 아니라 "무엇"이라는 의문사를 썼다 해도 그  실수의 이상함은 독립된 게 아니라 이미 직전 번의 효과에 포함될 뿐입니다. 사실 진짜 이상한 건, 아무리 전세계적인 화제를 뿌린 대스타라 해도, 왜 지구상의 모든 이들이 그의 이름을 꼭 알아야 하느냐는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어쩌면 "지구상의 거의 모든 이들이 마이클 잭슨의 이름을 안다"는 사실 자체에 더 열광하여 그를 실물보다 더 큰 크기로 만드는, 일종의 자기 강화 작업에 빠졌는지도 모르죠.

저자가 푹 빠지게 된 올리버 색스는 예컨대 <아내를 모자로...> 같은 화제작의 author라든가, 내내 세상과 철저히 스스로를 차단한 채 살았다는 사실이라든가, 실제로 만나 보니 너무도 티 안 묻고 심오한 사념으로 세상(당위)을 재구축할 줄 알았다든가, 무엇보다 아름답고 능숙하며 진정성 깃든 문장으로 작품을 아름답게 빚을 줄 알았다든가 하는 능력으로 타인을 매혹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빌 헤이스는, "내가 지금 올리버 색스를 보고, 이야기하고, 생각을 공유한다"는 사실 자체에 매혹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올리버 색스라는 이가 대체 누구인데? 성공한 작품을 여럿 쓴 셀럽이 아니었다면 함께한 시간이 과연 그토록 황홀할 수 있었을까?" 이런 속물적 동기에 대한 지적을 누가 혹 한다면, 그에 대해서도 자신 있게 부인할 수 있게 된 게, 올리버 색스라는 매혹적인 거인과 그가 함께 지낸 보람 중 가장 큰 것이겠습니다. "아니다. 올리버 색스는 그저 함께 있기만 해도, 당신에게서 다른 자신을 발견할 수 있게 돕는 인물이다."

우리 독자들에게는 고마운 선물(올리버 색스 이야기 + 뉴욕의 사연)입니다만, 작가 빌 헤이스는 뉴욕으로 새로 이주함으로써 작가 올리버 색스를 만나고, 대화하고, 깊은 정도까지 교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빌의 한껏 고양된 감정과 각성이, 어디까지가 색스로부터의 영향이며, 어디서부터가 도시 뉴욕의 촉촉한 샤워 덕분이었는지는 본인도 알 방도가 없습니다. 마치 파트론 테킬라의 화끈한 감촉이 목을 넘기고 지나갈 때, 이런 느낌이 예컨대 스톡홀름에서도 같은 상표의 술(물론 엄청 비싸지겠습니다만)을 마시고 재현할 수 있는 건지 전혀 확신이 안 서듯 말입니다.

"행복과 즐거움 중 어느것이 더 서열이 높을까요?"
"행복은 보다 복잡한 녀석이야."

운이 좋았다고 스스로 평가하는 "사건"은, 올리버 색스가 살던 건물 다세대 주택 중 한 채가 마침 비게 되었고, 그 사실을 경비원이 알려 주었다는 겁니다. 이날 오전에 벌어진 어떤 다른 "사건"에 대해서도 빌 헤이스는 따로 기록하는데, 아마 기억에 의존해서라기보다는 그의 성격과 스타일상 어떤 꼼꼼한(혹은 간격이 좀 뜨는) 메모를 이어가는 중이었지 싶습니다. 그는 거인과 인접해 살게 된 행운을 굳이 부각하기보다, "그(이) 11층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이 좋았다."는 표현을 씁니다. 즐거움은 여러 층위에서 발생하지만, 행복은 보다 복잡한 녀석이라서일까요?

"몸의 어느 부위가 당신 것이 아니라고 느낀 적 있어?"
"내가 이래서 당신을 사랑한다니까요."

이는 뭐 특별히, 그(들)만의 개성적인 느낌은 아닙니다. 우리들 일반인(중에서 남성이라면 더욱)들도 마찬가지고, 가장 순도 높은 원초적 본능만을 대변하는 부위와, 나머지 정신적인 영역이 치열한 다툼(대개는 타협과 평화 중에 시간을 지냅니다만)을 벌임은 아무리 둔한 이라도 자각하면서 삽니다. 게다가 문학 작품 중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기도 했죠. 뭐 거기까지는 좋은데... 읽다 보면 좀 불편해지는 여러 서술이 특히 이 장(章)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사실 책 첫 장도, 사정을 모르는 독자라면 좀 놀랐을 법한 사연이 당연한 전제마냥 제시되기는 했습니다만.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인다고, 대체로 그가 책을 통해 전하는 뉴욕의 풍경은 무척 고요하고 평화롭습니다. 이 책에는 여러 컷의 사진이 실렸는데, 그 중 상당수는 실제 인물(중요한 사람들이라기보다, 그가 뉴욕에서 마주친, 지나가던 이들, 그가 "이웃"으로서 공감하던 그 아주 짧은 순간의 "친구들"이었습니다)을 담은 것입니다.

이미 노년에 접어들기까지 단 한 번도 타인과 성행위를 해 보지 않은 사람, 영혼, 그에게라면 "샴페인의 코르크 따는 장면, 그 폭발하는 기포의 향연"도 생애 처음 겪는 신기한 목도일 수 있습니다. 물론 꼭 그러라는 법은 없죠. 혹 누가 앞의 사정(virginity)을 알고, "당신 샴페인은 따서 마셔 본 적 있어?"라고 묻는다면(대체로 이는 조롱이거나 경멸감의 표현입니다. 상대가 노인이라면 더욱 그렇고, 저는 우리 한국에서라면 거의 예외가 없을 듯하지 싶네요), 상대방은 크게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작가 올리버 색스는, A를 모르기에 B 역시 모를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 빌 헤이스는 너무도 잘 알 수 있었기에,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어느 하나의 정체성, 개성으로 요약할 수 없는 사람이었어. 뭐랄까, 그가 가진 모두가 그를 표현하는 하나의 전체라고나 해야겠지. force of nature일까?" 이것은 올리버 색스가 그의 "친구"인 고 칼턴 가이듀섹(노벨 의학상 수상자)에 대해 내린 평가입니다. 이런 사항이라면 영어(라틴어지만)에는 sui generis라는 좋은, 합당한 어구가 있는데 구태여 그 말을 쓰지 않으시네요. 1부 맨처음에도 잠시 언급되었지만, 작가 빌 헤이스는 그 늙은 나이에도 여러 사람, "상대"를 만나고 다닙니다. 그쪽 기준이라면 아주 난잡한 정도까지는 안 가겠지만. 여튼 그가 올리버 색스를 좋아하는 한 이유는, "대체 저 사람은 어떻게 이런 충동을 참을까?" 같은 경이로움이지 않을까 짐작합니다. 그가 일생을 두고 불능이 아니면서 아무 갈등을 겪지도 않았다는 점은, 빌 헤이스가 확신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죠.

빌 헤이스가 술을 좋아하는 건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벌써 성씨부터가 Hayes 아닙니까. 일로나와의 대화에서 그는 자기 부친이 아일랜드인임을 (그녀와 독자에게 모두) 밝히고, (이번에는) 자리에 어울리게 보드카를 마십니다. 이 앞 2부에서 그는 뉴욕의 여러 인물들을 만납니다. 대부분은 택시 운전수, 길거리의 사환, 가게 주인 등 평범한 이웃들이죠. 크리스, 압델 처럼 흔하고도 자기 색깔(적어도 종족의 색깔)을 드러내는 이름들은, 때로 불측한 욕망과 함께 각인될망정 모두 뉴욕의 정체성을 모자이크처럼 구현하는 필수 요소들입니다. 일로나와의 만남 이야기로 시작된 이 3부는, 어느 상점에 든 강도 사건을 O, 즉 올리버 색스 노인("자기")과 함께 나누는 등 제목에 맞게 약간은 씁쓸하고 불편하며 슬픈 사연들이 채워집니다. 대단원은, 우리가 잘 알듯 작가 O의 죽음을 다룹니다. 그러니 죽음으로 시작해서 이별로 끝나는 책이 되는 셈이네요.

책 서두에는 시인 김현의 헌시가 한 편 실려 있습니다. 책보다는 O, 올리버 색스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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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jtmzl 2017-10-02 0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책은 인섬니악인데, 리뷰 내용은 내 나라가 낯설다네요
리뷰 잘 보고 갑니다.

빙혈 2017-10-02 09:50   좋아요 0 | URL
네, 지적 감사합니다.
비슷한 시간대에 서평 두 개를 올리다가 내용이 서로 바뀌었던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