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소앙 평전 - 삼균사상가
김삼웅 지음 / 채륜 / 2017년 6월
평점 :
품절


조소앙 선생은 책 첫머리에 나오듯 본명이 "용은"입니다. 김삼웅 저자께서는 "아호가 본명보다 더 유명한 경우"라고 규정하는데, 이런 경우가 한국에서 아주 흔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대체로는 독립 운동가들의 경우, 한 번의 의거로서 이름을 떨친 분들을 제외하면 "아호와 본명이 함께 유명한"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안창호 선생, 김구 주석 등에 대해 그 호를 함께 기억합니다. 오히려 "도산 안창호" 등으로 자주 부르지 이름만 거론하는 적이 더 드뭅니다. 심지어 독립 운동과는 매우 거리가 먼 어느 작가에 대해서도 "춘원 이광수"로 호칭하는 게 더 잦을 정도죠.

"조소앙"을 본명으로 잘못 알고 있는 이들도, 그 함자 앞에다 "삼균주의"를 마치 대명사나 수식어처럼 붙일 만큼, 그의 독창적인 이념은 유명합니다. 만약 "삼균주의"를 모르는 이가 있다면, 아마 "조소앙"에 대해서도 모를 가능성이 더 큽니다. 대개 김삼웅 작가님의 전작 평전들은 이처럼 인물 이름 앞에 아호를 붙인 제목으로들 나왔는데, 이 책만큼은 "소앙 조용은 평전"이란 문구가 어색했는지 보다시피 이런 제목입니다.

조소앙 선생의 일생과 그 의의를 새기자면 필수적인 전 단계라 할 것이, 대체 삼균주의가 무엇이며 그의 현대적 해석과 자리매김은 어떠한 것이 되어야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삼균주의가 오늘날에 와서 다시 재조명 받는 이유는, 남북이 서로 비생산적이고 파멸적인 대치를 이루는 지금, 양쪽 모두에서 큰 거부감 없이 수용하고, 상당한 공감을 형성할 만한 이념적 중간지대를 모색할 만한 사상이랄까 이데올로기가, 이 이른 시기에 조 선생이 마련해 놓은 것만큼 성숙하고 큰 체계를 지닌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조소앙 선생은 많은 이들이 착각하는 바와 달리, 38선 이남, 오늘날의 경기 파주(당시 지명 교하라고 책에 나옵니다. 물론 이 지명은 오늘날에도 행정 구획만 달리해서 살아 있습니다)에서 탄생했습니다. 김구와 이승만보다는 십여 년 아래 세대이며, 몽양 여운형 등과 비슷한 또래입니다. 독립 운동가들이 대개 출신 성분이 다양한데 경기 일대에서 부농 출신으로 생계에 큰 곤란이 없었으며 조부모로부터 정통 한학을 교육받았다는 내용 말고는 그의 가계에 대해 자세한 바가 밝혀지지 않은 듯합니다. 그가 중요 인물로 부상하게 된 건 대한 제국 체제 하에서 영재 소년들을 선발하는 과정에 그가 두각을 나타내어 어린 나이에 황실(고종 칭제 이후) 후원을 받아 엘리트 교육을 이수했으며, 이후 일본 명치 대학에 입학하여 서양식 현대 문명에 눈을 뜨게 되고부터입니다.

저자는 이를 두고 "전통 한학과 근대 문물에 대한 이해"에 고루 밝은, 균형 잡힌 지성을 갖춘 보기 드문 인재로서 그를 높이 평가합니다. 제가 파악하기로는 김삼웅 저자가 특히 소앙의 행적과 사상에 후한 점수를 주는 까닭이, 1) 중상층 부농 출신으로서 자신의 영달과 출세에 집착하기보다,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놓고 오로지 민족의 앞날이 밝게 창달될 길이 무엇인지에 천착하고, 이를 실천할 방안을 연구한 점 2) 사상적으로는 오늘날의 시선으로도 급진 좌파에 가까운 혁신 노선이었다는 점 3) 방략가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진, 막연한 주의주장이 아닌 구체적 수치를 거론하며 방법론을 구상한 경세가였다는 점(대원칙뿐 아닌 디테일을 제시한 정책 전문가였다는 점) 등입니다.

2)와 관련해서는 특히 독자로서 제가 재미있게 본 게, 1929년 광주 학생 운동을 두고 소앙은 "광주 혁명"으로 규정했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광주 혁명"이라고 해서 "웬 5.18 예언?"이란 생각도 잠시 스쳐갔는데, 그건 물론 아니고 당시 민중들이 일제의 폭압적 처사에 들고 일어난 의의를 그 정도로 높이 평가한 소이겠죠. "학생"을 굳이 뺀 이유는 소앙 본인부터가 학생 시절부터 열혈 혁명 분자로 활동해 온 동질감이 있기에, 어린 학생들이 구태여 "학생"으로 보이지는 않았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물론 "그 학생"들보다야 자신이 3. 40년 가까이 선배지만, 영원한 학생으로서의 정체감이 그의 내면에 자리했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책을 좀 넘겨 가며 김이 약간 빠지는 게, 이분은 심지어 이하응의 집권마저 "혁명"으로 규정했다는 사실입니다. 이하응의 혁신 조치가, 종래의 구체제(심지어 자기 기득권마저 못 지킬 만큼 낙후하고 부패했던) 폐단을 일소한 면이 있긴 하나 오늘날의 어느 학자도 그의 집정을 "혁명"으로 보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이 용어가 그리 엄정한 기준에 따라 쓰이지는 않았구나 하는 다소의 실망이랄지. 이후 김옥균 등의 갑신정변도 그는 "귀족, 벌열 출신에 의한 혁명"으로 주저없이 명명합니다. 오히려 3. 1운동은 그의 시각에서 "실패"로 보였는지 혁명 범주에서 제외됩니다.

3. 1운동 실패의 원인을 그는 "평화적 수단"에서 찾을 만큼, 그의 성향이나 사상이 온건하다거나 절충, 유화적이라곤 도저히 볼 수 없습니다. 심지어 그는 이런 말도 합니다. "젊은이들이여, 오늘날 가장 유망하고 장래가 안정적일 직업은 바로 혁명가로서의 삶이다." 어느 혁명 노선에 가담하든, 혁명 자체를 어떤 관점에서 보든, 혁명가만큼 극도로 불안정한 삶이 없음은 자명할 텐데 정말 역설적인 표현이며, 이 한 마디가 그의 성품과 지향성을 그대로 대변하는 듯합니다. 그런가 하면 이념으로서의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그는 상당한 반대 의사 표명, 거부감을 드러냅니다. 하긴 확고한 반공 노선을 걸었던 백범 밑에서(국무령 시절) 외무부장을 지낸 분이기도 하니요.

책은 장덕수 암살 등 해방공간에서 그의 활동은 아주 자세히는 다루지 않습니다. 예전부터 야당 성향으로 유명한 성북구에서 소앙은 전국 최다 득표를 기록하며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그 이전 한독당과 결별하면서도 백범과는 연계를 유지하며, 백범과는 차별되는 노선으로 단정을 지지하기도 합니다. 저자는 한독당 분당이 어느 정도는 백범의 묵인 하에 이뤄졌으리라는 추측을 내어놓습니다. 하긴 이후 백범의 방북 행렬에 그도 김규식 등과 함께 수행했으니 말입니다. 단 책에서는 이 부분(남북 협상)에 대해 역시 그리 소상히는 저술하지 않습니다.

보통 백범의 사망 당시 "서거"라든가 심지어 "시역'이라는 말을 쓰는 이들도 있었는데, 소앙은 진술에서 담담히 "김구의 피살"이란 표현에 그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여러 성명서와 저술 속에서 "...향후로는 명망가 중심의 결사체가 아니라, 이념과 노선 중심으로 정당이 만들어지고 활동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같은, 시대를 근 반 세기는 앞서간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앞서 적은 대로 그는 1950년 5월 30일 치러진 2대(代)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되었는데, 저자의 분석에 의하면 새로 원 구성이 될 때 국회의장 피선이 유력했다고 합니다. 이러던 게 느닷 6. 25가 터지고, 그는 납북 인사 대열에 끼고 만 불운을 맞이했음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죠. 책에서는 최신 연구 결과로 러시아측 보고서를 인용하며 "김일성의 노선에 협조 않던 그가 자살을 선택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계획 경제를 통해 머리와 꼬리가 함께 번영해야 국가가 일어설 수 있음"을 일관되게 주장한 그의 노력 덕에, 사실 우리 현행 헌법도 제헌 당시부터 사회적 시장경제 이념을 지향한다 봐야 합니다. 또한 이러한 그의 지조와 소신 때문에 김일성이도 끝내 그를 포섭, 회유하는 데 실패했던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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