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는 어떻게 너를 잃었는가 ㅣ 미드나잇 스릴러
제니 블랙허스트 지음, 박지선 옮김 / 나무의철학 / 2017년 6월
평점 :
품절
사람은 그 무엇에 대해 당위적 확신을 지닌 후에는, 그 실재의 가능성조차 부인해 버리는 습성이 있습니다. 극악무도한 악(惡)이 비난 받아 마땅해다 해도, 그 찌그러진 채 당당하며 기세등등한 행적과 살덩이가 남긴 작태는 세상 곳곳에서 역력히 발견되는 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객관적 현실과 동떨어진 인식은 그게 아무리 도덕적 당위를 바탕에 깔아도 우선 우리 자신의 생존, 혹은 정의의 구현을 위해서 하등 이로울 바가 없습니다. 다만 경우에 따라, 자신의 생존을 위한 노력과 진실의 규명에 다가서려는 몸부림이 그 방향이 같다면, 당사자는 Sein과 Sollen 사이에서 갈등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행운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혹시 미스테리 스릴러 장르 소설인지 모르고 시작한 분이라면, 세상에, 갓난아기인 자기 아들(이름은 딜런이라고 하네요)을 실수로 죽인 엄마라니, 앞으로 남은 생을 죄책감과 자기 혐오 때문에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아찔한 느낌이 전신을 휩쌀 겁니다. 그런 동정심 가득한 독자라도, 혹 같은 아파트 단지에 "이름과 신분을 통째 바꾼 바로 그 여인"이 이사라도 온다면, 과연 마음으로 그녀를 환영할 수 있겠습니까? 환영은 고사하고, 이웃들끼리 작당하여 무슨 핑계와 소동을 꾸며서건 내 사는 공간에 그런 범죄자를 못 들여 놓게 하러 골몰하는 게 보통이겠습니다. "자기 자식에게 그런 짓을 한 엄마가, 남의 자식들에게는 뭔 흉악한 시도를 못 하겠어?" 이게 정당치 못한 반응인 줄 잘 알면서, 먼발치에서 보는 우리들이라 해도 이런 (가상의) 집단이기주의에 대고 또 마냥 비난을 못 합니다. "나라도 별 수 없었을 듯." 그녀의 집에서는 가죽을 벗긴 고양이(그것도 이름이 붙고 정이 생겼던) 시신이 나오는가 하면 집안이 온통 페인트칠로 난장판이 된 사고가 잇달아 터집니다. 누구나 그 인근 주민들이 벌이는 테러, 간접 린치라고 짐작하며 경찰 측에서도 대응이 미온적입니다("누가 이런 동네로 이사 오라고 했어요?"). 그러나....
여튼, 책을 절반쯤 읽다보면, 사연의 또다른 트랙(시간과 퍼스펙티브와 공간이 다릅니다)에서 웬 이상한 녀석이 펼치는 불량한 작태를 보고(독자만의 특권), 아 이거 혹시 진상은 전혀 다른 모습이 아닐까, 어지간히 둔한 독자 아니면 다 눈치 챌 겁니다. 가뜩이나 수전 웹스터(어린 아들을 죽였다고 선고 받은 엄마. 1인칭 주인공이자 화자)의 운명에 불편함을 느끼던 차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는 뭔가 후련한 일말의 가능성은 곧 그게 아무리 희박하게 계산되어도 내가 가진 패의 전부를 걸고 싶게 만듭니다. 여전히 수전은 범죄자일 가능성이 높은데도 말입니다. 법정에서 그렇게 많은 전문가들이 나와 "산후 우울증 때문에 순간적 착란 상태에 빠지는 엄마들이 많음"을 증언했고, 범죄 현장에서 발견된 숱한 증거물들이 한 방향을 가리키기도 했다니 말입니다. 제목이 중의적이기도 한데, 영어에서 lose 뒤에 사람이 오면 보통은 죽어서 이별했다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이하 생략)
"저렇게 듬직한 팔뚝에 내가 안겨 본 게 언제였던가?" 수전은 4년이라고 이내 자문자답합니다(그 세월 동안 수인 생활을 했다는 뜻이죠). 소설 7/8 정도가 지나간 후반부에 수전 스스로의 입으로 털어 놓는 대목이 있는데, ".. 마크와는 달리 나는 언제나 별 존재감 없는 인생이었다. 마크는 그저 잘생긴 게 아니라, 그 온몸에서 풍기는 자신감이 주변 모두를 끌어당기곤 하는 그런 존재였다. ... 마크는 왜 나를 골랐을까? 그가 여태 사귀어 온 모든 매력적인 여성과는 단 하나의 공통점도 없는 나를 말이다. 혹시 과거와는 정반대 좌표를 지닌 나를 선택하여 애써 잊어야 할 그 무엇이라도 있었을까?" 같은 말로 보아, 그리 외모에 큰 자신을 품지 못할 여건인 듯 보입니다. 대신 그녀는 어느 정도 출신 성분과 성장 환경에는 긍지를 갖는지(얼마나 객관적 근거를 갖췄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만), 예컨대 "예전의 나와 내 이웃들(그 사건 이후로 완전히 그녀를 아웃시켰을)이라면 캐시 같은 애를 과연 가까이 두기나 했을까?" 같은 심중의 생각도 비춰지곤 하네요.
여튼 외모에 자신 없는 이런 여성이 유독 남자한테는 그간의 열등감을 보상 받기 위해 많은 걸 기대하나 모양입니다. 그래서 수전은 "전 남편" 마크에 대해 전혀 의심을 품지 않고, 합리적으로 의심해 볼 구석이 있다며 그렇게 충동하는 "새로운 친구, 클라크 켄트(기자 직업인데다 잘생겼고, 외로운 자신에게 슈퍼맨처럼 의지가 되기도 하기에)"인 닉에 대해서도 곧바로 의심 없이 친분을 쌓습니다. 캐시와 그가 은근 친해지는 기색을 보이자 바로 불 같은 질투(를 넘어 증오)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주인공 수전은 어리석고, 아름답지도 못하며, 그 하는 말에 큰 신뢰를 줄 수 있는 타입도 아닌 듯 보입니다(그래서 그런 누명을 써도 싸다는 뜻은 아니고요).
책을 읽으면서 음 범인은 이놈이군, 하고 결론을 다 맞혔다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다면, 그게 바로 착각이며 작가가 노린 함정에 빠진 겁니다. 다 밝혀져 가는 진상에 오직 수전만 까맣게 눈먼 채로 남은 듯 보였으나, 결국 엉뚱한 오해를 했던 건 우리 모두가 다 마찬가지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소설은 수전의 1인칭 시점에서 그녀의 온갖 시시콜콜한 변덕과 불안정한 감정과 불안과 의심과 절망과 간절한 기대 따위가 낱낱이 다 공개되는 점도 독특한데, 그 와중에서도 그녀는 누구와 누구를 향해선 그 화사한 외모에 여성으로서 주눅이 들다가, 한참 뒤 누구를 찾아가서는 "이런 여자도 있기에 내가 마음이 놓인다(정확한 표현은 이게 아니지만 결국 그런 뜻입니다)" 같은 감정을 일일이 (마음 속에) 떠올리는 등 희한하게 외모에 집착하는 타입입니다. 심지어 어느 건물에서 누군가를 만나고선, 태어나서 이렇게 잘생긴 남자는 처음 본다며 아무 생각이 없어집니다. (이 문단은 전체가 은근 스포일러인지도 모르겠네요)
안정감과 신뢰를 결여한 인물이라고 해서, 부조리한 운명의 장난(운명도 아니고 그냥 못된 놈들)에 희생되어 마땅하다는 건 물론 아닙니다. 이 소설의 매력은, 왠지 신뢰가 안 가는 어느 여성의 입을 통해 진술되는 세계를 관찰하고, 독자로서(혹은 일종의 배심원으로서) 그에 마냥 휩쓸려 가지 않은 채 이성과 추론을 통해 진실에 접근해 가는 그런 재미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그런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구요." 아니,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근거 없는 집착과 현혹, 눈먼 사랑, 자기 기만, 터무니없는 요행심, 혹은 못난 에고의 투사, 투영이 있을 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