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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뺏는 사랑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17년 6월
평점 :
진짜 심각한 범죄, 가증스러운 악행은 그게 악행인지 뭔지도 모를 태연한 외관 안에 싸여 있는 부류일 것입니다. 가장 간악한 범죄자는 곁에 있는 사람들을 홀리면서, 자신이 피해자인지 뭔지도 모를 상황으로 몰고가 이익만 취한 후 버리는 유형입니다. 소설을 끝까지 다 읽어도, 누구를 비난하고 단죄해야 할지는 타깃이 정해집니다만, 과연 그 사람이 범인인지 아닌지는 100% 확신을 할 수 없습니다. 만약 "범인 걔 아냐? 다 나왔던데 뭐." 같은 반응을 보이는 독자가 있다면, 작가의 섬세한 의도를 거의 다 놓친 불운한, 좀 둔한 이라고 하겠습니다.
한번 남에게 호구로 엮인 인물은, 20년이 지나도 똑같은 패턴의 사기 행각에 놀아날 만한 어리석은 그 뭔가가 체질로 자리하기라도 한 걸까요? 이건 소설을 읽을 독자가 직접 판단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이 소설은 인생의 두 단계, 즉 대학 신입생 시절과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중년 초입(모든 게 싫증나기 시작한다는) 두 국면이 한 챕터씩 교차하며 서술되는 형식입니다. 물론 결말은 현재로 복귀하여, 화자가 이해한(혹은 주장하는) 버전으로 통합되는 리얼리티이고요.
1인칭 화자 조지 포스는 대학 신입생 시절 한 동급생과 불같은 사랑에 빠지고, 1년 가까이를 연인으로 지냈습니다. 소설 후반부에 어떤 놈의 입에서 나오는 말처럼 "미인을 잘 다루는 특별한 뭔가"가 그에게는 있는가 봅니다. 신입생 시절에는 A와 B(라고만 적겠습니다. 소설 초반까지만 읽은 독자는 조지를 두고 1년 사이에 두 명의 연인을 갈아치운 바람둥이라고 여길 수도 있을 텐데, 그렇지는 않고 뭔가 심각한, 도무지 있을 법하지 않은 복잡한 사연이 뒤에 슬슬 설명됩니다)와 사귀었는가 하면, 4학년때는 레이첼과 진한 연정을 나눴고(중요 인물 아니지만 여튼 여자 사귀는 재주가 좋다는 걸 알리기 위해 작가가 배치한 듯요), 보스턴 최고의 잡지사에 근무할 땐 또 유능한 데다 빼어난 미모까지 갖춘 아이린과 거의 결혼 직전까지 갑니다.
여기까지만 읽어도, 순진한 듯 보이면서 명문대도 졸업하고 품격 있는 집안 출신인 데다(누구와는 큰 차이가 나죠), 사회인으로서 능력도 좋은(공인회계사 자격을 땄으며, 가장 위태로운 재정 상태의 회사에서도 마지막에 가서나 짤릴 전망일 만큼이죠) 조지가, 이런저런 여자들과 엮이면서 겪는 파란만장 연애담인가 지레짐작하는 독자들도 많을 겁니다. 성격들이 재미있게 꾸려진데다 정말 이 방향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도 저는 책장 신나게 넘겨 가며 읽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안 죽을 법한 사람이 죽기도 하며, 거액의 재산 행방이 오리무중이 되고, 남의 이름 훔쳐다 쓰는 게 버릇이자 근성이고 쾌락인 듯한 악당(들)이 나와 독자의 혼을 빼 놓는 이 소설은, 아주 치밀하면서도 신선한 구성을 장착한 미스테리물이(기까지 하)네요. 물론 못된 것들한테 걸려 휘청거리는 건 픽션 속의 1인칭 화자 조지지만, 그에게 그림의 소실점을 맞추고 행보를 따라가는 우리 독자들도 덩달아 현기증이 느껴질 밖에요.
(문제의) 두 남녀가 인생의 가장 좋은 시절 캠퍼스를 누비며 다녔고, 그 중 한 사람은 졸업까지 한, 작품 절반의 배경이 되는 "마더 대학"은 어디일까요? 그런 이름을 가진 대학은, 적어도 코네티컷이나 미국 동부(뉴잉글랜드)에는 없습니다. 아마도 매더(철자가 Mather에요 -_-;:) 홀을 품에 낀 트리니티 컬리지가 아닐까 짐작합니다. 저도 그 근처에 다녀 온 적 있고, 중간 쯤에 로케이션으로 어사일럼 힐까지 언급되니 거의 틀림없습니다. 작가 피터 스왠슨도 학부를 그곳에서 졸업한 분이고 말이죠.
(약간의 내용 누설이 있으니 이하 대목은 조심해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말이 있지만 어떤 격언이라도 적용의 여지가 없는 예외, 적용되어서는 안될 금단의 선이 있는 법입니다. 하물며 저런, 상식의 범주에도 못 들 우스개 시쳇말의 경우야 두말할 나위도 없죠. 이 미스테리, 스릴러의 주인공인 "어떤 여자"의 경우, 본능으로 타고난 변신 그 자체가 유죄겠으며, capital punishment을 받아 마땅할 못된 범죄로 점철된 삶을 살아왔다고나 하겠습니다. 남자라면 무릇 이런 질 나쁜 여성하고 엮여 행여 몹쓸 일이나 당하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할 일입니다.
....만, 과연 우리는 조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어도 될까요? 일단, 머리가 꽤 좋은 듯 보이는(대학교 1학년 때 전과목 A를 맞았다고 합니다) 누구누구가, 범죄와 사기와 기막힌 연기 재능을 타고나기까지 해서 그 모든 (인물들 말대로 너무 복잡한) 계획을 다 세워서 성공했다고 가정한다면, 글쎄요 그 누구누구처럼 머리가 좋지 못한 우리들로서는 차라리 부인을 하고 들어야 덜 자괴감이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지는 태연하게 로베르타 형사(이분도 꽤 미인인데, 수사 도중 조지한테 은근 호감을 보입니다. 이분까지 포함 모두 네 명이 조지에게 넘어왔군요)에게 설명하기를 "플랜 A가 설계의 본체이며, 플랜 B는 사실 되어도 그만 안 되어도 그만인, 실패시 어떻게도 둘러대거나 다른 계획으로 곧바로 넘어갈 수 있는 부수 장치이다"라고 합니다. 거 맞는 말 같기도 하고, 범죄자의 수법 진화를 예고하는 다차원 퍼지(fuzzy) 패러다임인 것 같기도 합니다.
조지처럼 순진해서 매번 범죄자들에게 이용당하거나 협박이나 당하는 위인이, 어쩌면 그렇게 간악하고 복잡한 흉계를 잘 이해하는 걸까요? 사실 여기서 우리는 제3의 가능성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구와 누구는 근 이십 년 동안을 함께 호흡해 온 필생의 파트너였다든가... 너무 비약이 아니냐고 누가 지적한다면, 사실 극중에서 조지의 버전으로 설명되는 "누군가"의 설계 역시, 너무도 많은 우연의 개입과 행운의 보조가 있어야 가능한 finesse를 지향했죠. 이런 번거로운 설명을 시도하는 바로 그 사람이 더 의심스러운 겁니다. 여튼 확실하게 정리할 수 있는 건, 여자가 한번 마음먹고 메서드 연기를 펼치며 재주를 피우면 당해낼 재간이 별로 없다는 겁니다. 평균적으로 멍청하기에 그만한 연기력을 발휘하거나 대응할 능력이 없는 남자들은 조심하고 또 조심할 일입니다. 아 물론, 극중의 누구를 봐도 알 수 있지만, 이런 질나쁜 여자하고 엮이는 남자 역시 영혼이 깨끗한 쪽과는 또 아주 거리가 먼, 유유상종이라고 할 수 있는 화상이긴 하죠. 똑같은 것들끼리 사기치고 속고 하는 뭐 그런 저질 인맥. 뭐 언제나 보던 모습 아닙니까?